년 명문가의 가문 경영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가정에서도 위기를 관리하지 않으면 결코 지속 가능한 가문 경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지속 가능 경영의 출발은 바로 사회적 소통을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소통은 가문의 구성원들(내부)에게는 엄격하게 관리하되 이웃들(외부)에게는 베풂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돌볼 줄 아는 관대함에서 시작했다. 이를 통해 윤리에서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가문들이야말로 요즘 말하는 ‘사회적 소통’에 성공한 역사적인 사례들이다.달리 말하면 명문가란 사회적 소통에 성공한 가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소통의 출발은 배로 베풂에 있다. 즉, 가문이든 개인이든 ‘사회적 소통’이 중요하며 그 소통의 출발은 다름 아닌 후한 베풂에 있는 것이다. 이때 후함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그 후함을 베푸는 사람의 검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한 푼의 돈도 아끼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면 흔쾌히 주머니를 연다. 자신에게는 엄격함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관대함을 견지하는 것. 이게 바로 명문가를 만든 주인공들인 이른바 ‘가문기획자’들의 공통점이다. 가문의 기획자는 ‘가문주식회사’의 최고경영자(CEO)라고 할 수 있다.베풂을 통해 사회적 소통을 잘해 명문 가문으로 회자되는 대표적인 가문으로는 명재 윤증(1629~1724)가와 경주 최부잣집을 들 수 있다. 명재가(家)는 이미 400년 전에 문중학교인 종학당을 만들어 요즘의 경영학에 해당하는 ‘이재(理財)’를 자녀들에게 교육했다. 1628년에 문을 연 종학당은 현재 세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보다 10년 앞서 문을 연 학교로 기록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도 결코 해외의 조류에 크게 뒤지지 않았던 셈이다.종학당은 엄격한 학칙(종약)을 만들고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을 합숙시키며 체계적인 교과과정에 따라 교육했다. 바로 여기서 시대정신을 조직화할 수 있는 기획자의 존재와 시스템의 도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하버드대가 세계 일류의 고등교육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획형 인재’와 이들에 의한 ‘시스템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공교육이 부재했던 조선시대에 종학당은 시스템 경영을 시도했다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명재가는 재난에 대비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그게 바로 개인이 운영하는 의창인 사창(社倉)이었다. 특징적인 것은 모두 시스템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종학당과 사창은 후손들에게 지속적으로 검소함과 베풂, 실용주의 정신을 재교육해 사회적 소통에 성공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명재가의 검소하고 실용적인 가풍은 ‘아들에게 훈계한 글’이라는 계제자서(戒諸子書)를 세 번이나 남긴데서 알 수 있다. 명재의 조부인 윤황이 쓴 가훈에는 ‘옷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면 안 되니 몸을 가릴 정도면 될 뿐이고, 집은 편안하고 크게 하면 안 되니 바람만 가리면 될 뿐’이라며 검소한 생활을 후손들에게 누누이 당부한다.①남자는 오십이 되어야 비단옷을 허락하라.②부녀자의 상용 의복은 베옷, 무명옷으로 하고 비단옷은 외출할 때에만 잠시 갈아입되 고운 비단은 입지 말라.③채소같이 소박한 반찬을 먹되, 담배와 도박을 절대 금하라.④떡쌀은 닷 되를 넘지 말며 지짐이는 세 꽂이로 하고, 유밀과는 쓰지 말라.⑤혼수는 절대 비단을 쓰지 말고, 시부모가 새 며느리에게 예물을 주는 것 또한 폐습이니 일절 행하지 말라.명재가는 지금도 차례상에 송편과 떡, 꿀로 만든 유밀과나 전 등을 올리지 않는다. 허례허식을 없애기 위해 내부적으로 명문화를 통해 엄격하게 검소함을 실천해 왔던 것이다.명재가는 또 베풂의 방안도 다른 가문들과 달리 시스템으로 접근했다. 국가가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사창을 만들고 여기에 그 운영과 실천 방안을 명문화했다. 문중과 주변 사람들을 위한 베풂의 방안으로 사창을 200년 동안 운영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명재가는 매년 갹출하는 200석의 쌀로 수해나 가뭄 때 굶주리는 이웃들을 위해 구휼 사업에 나섰다. 사창은 불의의 재난과 일가의 궁핍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가정에서는 사람 수에 따라 벼 1섬씩을 내놓았고 관리로 재임하고 있을 경우 봉급의 일부를 내놓게 했다. 종약의 ‘치전재(置錢財)’에는 현감이나 병사에게 필목 10필, 백지 10속, 먹 5동, 붓 10자루를 받는 등 사창의 구체적인 운영 조목이 들어 있다. 명재가와 더불어 경주 최부잣집도 12대에 걸쳐 적선을 한 가문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조선 최고의 존경받는 부자 가문이었다. 화재로 불에 탔던 최부잣집의 사랑채가 지난해에 다시 복원된 것도 이 가문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의 정도를 말해준다.경주 최부잣집은 동학도에 의해 소실의 위기에 처했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최부잣집도 위기를 맞았는데 활빈당이 양반집을 태우고 돈을 강탈하던 중 최부잣집에도 들러 처마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활빈당 두목은 “양반과 부자 치고 도둑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이에 당시 종손은 “최씨 집이 그동안 어떻게 처신했는지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했다. 최부잣집의 내력을 확인한 동학도들은 순순히 물러갔다. 최씨 집안은 12대에 걸쳐 이웃에 베풀어 온 적선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경주에는 배씨, 정씨, 이씨, 최부잣집 등 네 집의 만석꾼이 있었다. 최부잣집은 다른 만석꾼 세 집안을 합쳐도 안 바꿔준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최부잣집의 ‘제가’ 가훈인 ‘육훈’에는 이런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셋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다섯째,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여섯째,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성경 구절은 세계 최대의 부자들을 배출한 유대인들에게는 고전으로 통하는 율법이다. 길게 보면 남에게 먼저 베풀고 먼저 대접하는 게 고단수에 속한다. 문제는 이를 알지만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가끔 재벌 회장이 구속될 때마다 사회적으로 냉담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이들의 베풂이 아직은 국민적 기대치에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법보다는 ‘인심’이 위에 있다.가문이든 기업이든 나아가 국가든 지속 가능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만이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 탁월한 시스템, 진취적인 조직 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더 중요한 덕목은 바로 ‘윤리 경영’이다.부나 권력을 가지고 있되 반드시 ‘윤리성’을 갖춰야만 누대의 명문가로 회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기업인들이 마음속에 철칙으로 되새겨야 할 대목이 아닐까.가난하다고/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부자라고/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그것은/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후함으로 하여/삶이 풍성해지고/인색함으로 하여/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생명들은 어쨌거나/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길가에 굴러 있는/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중략)//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후함은 낭비가 아니다/인색한 사람은/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후한 사람은/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고(故) 박경리 선생의 유고 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나오는 ‘사람의 됨됨이’라는 시다. 박경리 선생은 베풀지 않는 삶이란 한낱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다를 바 없는 삶이라고 강조한다.‘선행을 쌓는 집안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주역’의 ‘문언전’에 나오는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널리 존경받는 ‘인간의 길’이 전상(前相)보다 후상(後相), 후상보다 심상(心相)에 있는 이치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자녀경영연구소장.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는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주식회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