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아 영화 ‘굿모닝 바빌론’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진정한 장인(匠人)은 손과 판타지가 결합돼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은 수공품과 수공예품의 차이를 단순하면서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 최우람의 작업이 일반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과 차별화되는 것 또한 작가의 판타지를 담아 표현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것은 2002년 인사동의 어느 갤러리에서였다. 지나던 길에 우연히 들른 작은 전시장 안에는 쇠로 된 거대한 생선 모양의 조각품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거친 소재를 섬세하게 가공했다는 것과 작품의 크기에 강한 인상을 받고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나왔었다. 이후 알고 보니 작품명은 ‘울티마 머드폭스(Ultima Mudfox)’로 ‘안모로프랄 델피누스 델피스 우람(Anmoropral Delphinus Delphis Uram)’이라는 학명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저 쇠로 된 조립품이 아니라 작가적 상상에 의해 탄생한 괴생명체였던 것이다.중앙대와 동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당시 마이크로 로봇이라는 로봇 공학 전문회사에서 프라모델 설명서를 일러스트로 제작하는 일을 하면서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 즈음 울티마 머드폭스가 팔리면서 과감히 회사를 그만뒀다. 사장이 작품 활동을 지원해 주고 미대에서 배우지 못한 기계적 부품, 조립품에 대해 알게 되는 등 도움이 됐지만 작업에만 전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작업실을 얻고 5개월 정도는 실업 수당을 받으면서 버텼습니다. 내가 월세를 못 내는 상황이 되면 다 집어치우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했는데, 그 사이 작품이 몇 개 더 팔리는 덕분에 꾸준히 할 수 있었죠.”‘무생물에게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 하나인 운동성을 부여한다’는 작품적 모티브는 대학교 3학년 때 키네틱 조형 강의를 들으면서 얻었다. 그러나 미술과 기술이 복합된 예술품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유전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조부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산한 자동차인 시발차를 만든 인물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특히 만들기를 좋아하는 그를 위해 부모님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만든 프라모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총 구입비용을 따지자면 족히 집 한 채 값은 될 것이라고 한다.금속물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제어 기술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청계천 상인들에게 물어서 적합한 부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때때로 엔지니어의 조언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기계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가 움직임의 원리를 터득하고 머릿속에 그린 형상을 구체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술적인 부분이 미비한 탓에 초기에는 전시장에 설치하면 움직임이 멈추는 일이 왕왕 발생하기도 했다. ‘최우람의 로봇 곤충들은 자연계마저 지배하게 될 기계들의 진화를 경계하며 만들어졌으나 자연과 인접한 소박한 환경에 적응을 못한 듯 개막 시간에 맞춰 멈추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가제트 공화국이라는 주제로 열린 단체전을 소개한 어느 미술 비평가의 글에는 이런 말이 등장하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맞은 것은 2006년. 일본 모리 미술관이 전 세계 젊은 작가들 중 주목할 만한 인물에게 개인전을 열어주는 맘 프로젝트(MAM Project)의 네 번째 주인공으로 선정되면서였다.“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예전에 근무하던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엔지니어 박태윤 씨에게 ‘나와 함께 해보자’고 프러포즈를 했어요. 이와 함께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하고 재료비에 좀 더 과감하게 투자하고 무엇보다 레이저 커팅을 함으로써 형태의 완성도가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전에 상상하다 이루지 못한 것들이 그럴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죠.”앞서도 말했듯 그의 작품은 단지 금속 물체를 형상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먼저 구성하고 만드는 경우도 있고, 이야기와 작품 구상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도 한다. 2006년 3월 모리 미술관에 선보였던 작품 어바너스(Urbanus)는 후자에 속한다. 초고층 빌딩에 자리한 까닭에 도쿄 시내가 핏줄처럼 쫙 퍼져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미술관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는 이런 내용이다.‘어느 날 아침, 뉴스 앵커는 ‘기계생명체 연합 연구소(United Research of Anima Machine)’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도시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는 새로운 기계 생태계가 발견됐다는 소식이다. 이 연구소에 따르면 이 생명체는 태양에너지를 광합성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처럼 도시 에너지를 흡수하며 생활한다. ‘어바너스(Urbanus)’라고 명명된 암컷은 꽃과 같은 형태를 띠며 축적된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기 위해 약 15분 간격으로 날개를 펼친다. 도시 에너지의 활동이 활발한 도시 상공 200m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주로 초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발견된다. 간혹 야간에 촬영한 도시의 위성사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들은 인간의 도시 문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요컨대 도심 속에 암수의 괴생명체가 서식하고 있다는 것. 이들은 언제, 어떤 식으로 자가 증식을 할지 알 수 없으므로 현대 문명 속에서 공존하는 사람들에게 묘한 공포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공상과학영화 같은 상황을 상상하고 그 내용에 부합되는 살아있는 조형물을 형상화하는 게 작가의 작업 방식이다. 또한 어떤 도시에서 전시한다고 하면 그 도시의 역사, 환경에서 스토리를 만든다. 요즘에는 9월에 열리는 리버풀 비엔날레에 소개할 작품을 구상 중인데, 항구도시이고 노예무역이 왕성했던 곳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스토리를 짜고 있다. 강에서 기계 생명체가 발견되는 가상 이슈에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힌트에 벌써부터 어떤 생명체가 만들어질지 궁금해진다.“그는 지금까지 봐왔던 미술과 거리를 두고 있다. 현대 미술에 통속적으로 쓰이는 키치(kitch: 눈길 끌기)나 표현주의 등으로 규정되는 범위가 아닌 새로운 영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시대적 가치를 잃은 전통적인 미술이나 이론 등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단지 스스로의 예술적 직감만을 믿고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걷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활동이 현대 미술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됐다.”그의 일본 개인전을 기획한 모리 미술관 큐레이터 김선희 씨는 여러 작가 중 그를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돼 표현 방법에 있어서 끊임없이 ‘진화’돼 왔다. 작가 최우람의 작품은 현대에 나타난 새로운 작업 방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대가의 작품에는 딴죽을 걸지 않는 반면 그의 조각품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보여 주고 그에 대한 감상과 평가가 공존하는 시기이므로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철의 심장’이라는 작품으로 포스코 스틸 아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뉴미디어 전문 갤러리인 뉴욕 비트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뉴욕 화단에 데뷔한 작가 최우람. 지난 달(5월 27일부터 6월 28일까지)에는 도쿄 스카이(SCAI) 갤러리에서 신작을 선보여 많은 이들의 발길을 불러 모았던 것을 보면 사람들이 그의 낯선 방식의 작품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는 듯하다.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