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①기도 여주에 있는 금강골프장은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정 명예회장의 막내 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설계할 때부터 형님이 편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개장한 뒤에도 정 명예회장이 라운드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곳은 계속 개조했다. 벙커를 없애기도 하고 나무를 심거나 뽑아냈다. 해저드가 방해가 되면 티잉 그라운드를 조정하기도 했다.정 명예회장은 골프 코스에 대해 “아마추어들이 스코어가 잘 나오도록 해줘야 한다. 1주일에 한 번 라운드 하러 나오는데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코스는 쉬워야 한다’는 정 명예회장의 지론 때문에 금강CC에는 벙커가 많이 사라졌다. 처음에 약 100개가 있었는데 20개 정도가 사라졌다. 티잉 그라운드도 앞으로 많이 당겨 놓았다. 페어웨이는 넓고 큰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 이 골프장에서 자신의 베스트 스코어를 치는 골퍼들이 많다. 이곳에서 좋은 스코어를 내면 모두 정 명예회장의 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정 명예회장은 사업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한 주도 라운드를 쉬지 않을 정도로 골프를 좋아했다. 그래서 금강CC는 매주 일요일 오전에 정 명예회장의 티오프 시간으로 30분 정도 여유 시간을 뒀다. 정 명예회장이 골프장에 나오는 시간에 맞춰 티오프 시간을 조정하기 위해서였다.클럽하우스 4층에는 정 명예회장을 위한 전용 로커룸이 있어 거기에서 옷을 갈아입고 식사도 그곳에서 했다.정 명예회장이 즐겨 먹은 것은 소머리국밥. 라운드 전에 소머리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라운드 후에도 소머리국밥을 또 시켜 먹었다. 라운드 중 그늘집에서는 떡 종류를 즐겨 먹었고 여름에는 수박, 가을에는 연시를 좋아했다.정 명예회장은 골프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모터마스터스’라는 골프대회도 만들도록 지시했고 정상영 회장에게 골프장을 여러 군데 만들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다만 정상영 회장은 자력으로 해보려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 명예회장은 특히 “북한에도 골프장을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다.정 명예회장의 골프 장비를 보면 모두 깜짝 놀랐다. 정 명예회장의 골프장갑은 항상 낡은 것이었다. 절대로 새것을 끼지 않았다. 골프 옷도 누군가가 선물하면 불편하다며 예전에 입던 옷만 입었다. 골프백도 국산으로 낡아서 보기에 흉할 정도였다. 클럽은 요넥스사 제품이었는데 20년도 더 된 것이었다. 평소의 검소함이 골프를 하면서도 그대로 배어나온 셈이다.정 명예회장의 라운드 동반자는 대부분 가족이었고 라운드 도중에는 사업 얘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오로지 운동으로만 골프를 즐겼다. 이는 회사 중역들과 라운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할 때와 즐길 때’를 철저히 구별하는 그의 평소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가족들과는 내기 골프도 즐겼는데 내기에 거는 대상은 볼 3개가 든 한 줄짜리 박스였다.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1992년 대선 직전 정 명예회장이 라운드를 하는 날 하필 앞 팀에 현대건설 중역들이 골프를 하고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플레이 스타일이 굉장히 빠르다. 연습 스윙도 없이 샷을 한다. 그러다 보니 앞 팀에 뒤처지는 일이 절대 없다. 오히려 앞 팀에 바짝 따라붙기 일쑤다.이때 앞 팀의 한 중역이 뒤에 정 명예회장이 오는 것을 보게 됐다. 이들은 깜짝 놀란 나머지 카트에 백을 실어 둔 채 도망갔다.정 명예회장이 당도하니 손님은 없고 캐디가 혼자 멀뚱멀뚱 서 있었다. 정 명예회장이 “왜 앞 팀은 안 나가느냐”고 묻자 캐디는 “급한 일이 생겨서…”라며 우물쭈물했다. 나중에 정 명예회장은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망할 놈들, 인사하고 치면 되지 왜 도망을 가”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정 명예회장은 잘못 치더라도 절대로 ‘멀리건’을 받지 않았다. 주변에서 ‘회장님, 그래도 한 번 더 치시죠’라고 권해도 듣지 않았다. 스코어도 줄여 적지 않고 곧이곧대로 적으며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았다.정 명예회장이 라운드를 나가면 정상영 회장이 붙박이처럼 항상 함께 플레이했다.정 명예회장 일가는 가정교육이 매우 엄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정상영 회장이 정 명예회장을 대하는 자세는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는 그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극진했다.정 명예회장이 골프 하러 나오면 정상영 회장은 만사 제쳐두고 나와서 모셨다. 단 한 차례도 이를 어기지 않았다고 한다.식사할 때도 정 명예회장이 숟가락을 들어야 자신도 들었고 함께 라운드를 할 때면 결코 형님을 앞질러 가지 않았다.로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정 명예회장을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정상영 회장 뿐이었다.정 명예회장은 누가 부축해 주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누가 옆에서 붙잡으면 손으로 탁 쳐 물리쳤는데 정상영 회장의 부축에는 순순히 응했다.정 명예회장도 정상영 회장을 극진히 아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려고 했으나 정상영 회장이 자력으로 하고 싶다며 고사하곤 했다.가족들은 정 명예회장이 골프장에 오기 30분 전에 미리 도착해 준비를 했다. 정상영 회장은 혹시나 늦을까봐 아예 토요일 저녁 클럽하우스 4층에서 자면서 대기했을 정도다.가족들 외에 라운드를 함께한 사람은 회사 중역 가운데 이내흔 현대통신 회장과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 정도였다. 특히 김윤규 전 부회장은 정 명예회장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 사람 중 하나인데 가족 외에 정 명예회장을 부축할 수 있는 유일한 중역이었다.정 명예회장을 골프장에서 가장 가깝게 모셨던 프로는 이강천 전 금강CC 헤드프로다. 이 프로는 정 명예회장을 모시고 가끔 라운드를 나갔다.정 명예회장은 라운드에 임하면 항상 ‘오너’를 했다. 정 명예회장이 티샷을 하면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했다. 연로한 탓에 티샷이 조금밖에 나가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이스 샷’하며 호응을 해주면 고맙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한은구 한국경제신문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