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어간다. 안동 봉정사(鳳停寺) 덕휘루(德輝樓) 언덕 아래 늙은 감나무는 고욤 같은 홍시를 시린 하늘 속에 묻고 언제나 그 자리에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봉정사 극락전, 한국 최고의 목조 건축과 조선 사대부 여염집 같은 대웅전의 단아함이 12월 오후 짧은 겨울 햇살에 반짝인다. 동쪽 언덕 영산암(靈山庵) 우화루에선 노스님과 동자승의 선문답이 들리는 듯하다.“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그는 진리를 묻는 제자에게 말없이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였다.봉정사가 유명해진 것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더 앞선 한국 최고의 목조 건물인 극락전이 있다는 것 외에도 한국 영화사에 혜성같이 빛나는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이곳 영산암에서 촬영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몇 해 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 방문 때 하회마을과 봉정암을 다녀가면서 더욱 알려지게 됐다. 여왕의 방문 코스에 들어갈 만큼 봉정사는 유서도 깊지만 한국 전통 건축물로서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선비 같은 풍모의 절집이다.안동에서 영주로 가다가 안동 삼베로 유명한 저전을 끼고 들어 얼마쯤 차를 몰았다. 사과나무 과수원 위로 한 무리 새떼들이 떴다 내린다. 풍경이 평화롭다. 한 5분쯤 지났을까. 절 입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 오르니 소나무 숲길이 다정하다. 절 초입 바위가 장대하고 여름장마엔 계곡물 소리가 시원할 자리에 앉혀 있는 단정한 정자가 눈길을 끈다. 정자의 이름은 명옥대(鳴玉臺).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70)이 16세에 도산서원을 떠나서 이곳 봉정사에 잠시 머물러 공부할 때에 심성을 닦고 심신을 휴식하던 곳이다. 옛사람들의 자연 사랑은 경치의 크기에 상관하지 않고 산수 간에 마음을 내고 정을 둘 수만 있다면 그곳에 작은 정자 하나쯤 경영해 심회를 풀어내곤 했으니 그 옛날 풍류가 새삼 부럽기만 하다. 12월 찬바람이 소나무 숲을 휘감아 불어 내려온다. 걸음을 재촉해 산길을 오르니 일주문 명당수 건너 키 큰 떡갈나무 숲 사이로 봉정사 뒷산 봉우리가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다. 멀리 봉정사 기와지붕이 차분하면서도 고색으로 빛난다. 12월 오후의 햇살에 ‘천등산봉정사(天嶝山鳳停寺)’라고 쓰인 현판이 달린 누마루가 수줍은 듯 보인다.봉정사 덕휘루, 누마루 아래 언덕진 자연석 석축 돌계단을 밟고 올라 성루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망루 같기도 한 누마루 아래 잠시 서서 뒤를 돌아본다. 수문장 같은 늙은 소나무가 지난해 겨울 폭설에 가지가 부러지고 옆으로 쓸려 비스듬히 서 있다. 그 아래 수령이 백년은 족히 됨직한 노송도 버팀대에 의지해 위태롭게 서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누마루를 지탱하는 아름드리 노송의 굵게 파인 무늬와 갈라진 피부에 세월의 연륜이 한껏 묻어난다. 자연석에 그대로 기둥을 올려 건축하는 덤벙주초와 자연스러운 나무기둥이 잘 어울린다. 덕휘루는 단청 하나 하지 않고 나무 그대로 비바람과 눈보라로 세월의 때를 겹겹이 둘렀다. 누마루의 자태가 한겨울 빛바랜 소나무 잎사귀와 더불어 쓸쓸하다. 이 지역 대부분의 사찰이 산지 사찰의 계단형 진입 구조를 갖추고 있듯이 봉정사도 마찬가지여서 누마루 아래 계단을 오르니 눈앞에 학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는 듯 우아한 자태의 대웅전이 펼쳐진다.봉정사의 창건은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오늘날 볼 수 있는 절집 풍경은 고려시대에 건축한 극락전을 제외하고 모두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봉정사의 건물 배치와 느낌은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풍모를 보는 듯하다. 대웅전은 팔작집으로 다포와 서까래, 부연에 고색단청을 하였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단청(丹靑)이 보이지 않는다. 기둥과 문짝을 자연나무 그대로 두어서 전체적으로 정갈한 느낌이 든다. 대웅전에 쪽마루 난간을 둔 것은 여느 사찰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색조는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자연스러워 사대부가를 보는 듯하다. 고금당 앞마당에서 덕휘루를 바라보면 요사의 추녀와 앞마당, 그리고 누마루가 민가나 서원의 마당을 보는 듯 차분한 분위기다. 언제 보아도 편안하다. 대웅전과 요사, 그리고 화엄강당이 비록 분리돼 자리하고 있지만 처마 깊숙이 추녀가 물고 들어와 공간을 아늑하게 한다. 이는 당시 안동 사대부의 미감이 이곳 사찰까지 고스란히 영향력을 미친 까닭이다.이러한 사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덕휘루는 만세루(萬歲樓)라고도 하는데 이는 유교 성리학에서 쓰이는 용어인 ‘덕이 빛나는 누각’이라는 점에서 당시에 유교와 불교가 얼마나 가깝게 영역을 공유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유교의 영향은 대웅전에 툇마루를 달아 사대부가의 안채를 보는 듯하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에는 겨자난간을 두어 사랑채 난간을 연상하게 하며 절 전체가 마치 큰집의 풍모를 보는 듯 따뜻함이 배어 있다. 그뿐만 아니다. 봉정사의 부속 암자인 영산암은 완전히 사대부집의 ‘ㅁ’자 구조를 갖추고 있어 양반가의 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대웅전에서 화엄강당의 좁은 통로를 끼고 바라보면 국보 15호 극락전 맞배집 측면의 결구가 현대미술을 보는 듯 단조로우면서도 선적으로 잘 보인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건물로, 배흘림기둥과 단정한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극락전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중수됐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이다. 1376년에 고쳐 지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앞서 있고 공포와 결구 처리 방식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고려 초 고구려계 건축의 여운을 짐작할 수도 있다. 집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측면에 드러난 기둥과 부재들이 보이는 모습에서 어느 건물 못지않게 웅장하면서도 강한 남성적인 인상을 준다. 이는 고구려계 북방 건물에서 보이는 양식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무인들의 미감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시대가 이런 굳세고 강한 미감을 원했기 때문에 빚어진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극락전은 조선 초기 유교의 영향 아래 지어진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대웅전과 좋은 비교가 된다.봉정사 극락전은 보수한 지 얼마 안 돼 단청도 어설프고, 마치 요즈음 새로 지은 건물같이 생소하고 풋내 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건물 전면 입구는 판문을 두고 건물 안으로 햇빛을 들이는 광창을 좌우로 내고 내부 바닥은 고식의 네모반듯하게 구운 전돌을 깔아 고려시대 건축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건물의 바닥 넓이와 기둥 높이 그리고 전면에서 보이는 지붕의 폭과의 비례는 기막히게 잘 맞아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어 건물이 작지만 아름답다.극락전은 앞마당 작은 3층 석탑과도 잘 어울린다. 정면에서 극락전을 바라보면 좌우로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두고 가운데 3층석탑을 두어 대웅전 영역과는 또 다른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다. 3층석탑이 극락전 중심축에 위치하지 않고 왼쪽으로 약간 비켜 위치한 것도 ‘비대칭의 대칭’인 한국의 미다.영산암은 봉정사 동쪽 계곡 언덕 위에 사대부 집처럼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다. 영산암에 오르는 석축 옆으로 느티나무 고목이 암자의 세월을 말없이 보여준다. 영산암은 가까이서도 아름답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더 아름다운, 그림 같은 절집이다. 영산암 입구엔 우화루(雨花樓)라고 쓰인 초서 현판이 있다. 유려한 글씨도 아름답지만 뜻도 아름다워 ‘꽃비가 내리는 집’이라고 하였으니 ‘우화루’하고 소리 내어 읽어 보아도 발음이 좋고 생각만 해도 봄날 산 벚꽃 만개하고 꽃비 내려 바람에 꽃잎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풍경이 눈에 선연히 그려진다. 우화루는 응진전을 두고 좌우로 요사를 두었는데, 건물이 마치 사대부 통말집을 보듯 사방이 건물로 둘러져 있고 남쪽 터진 풍경을 바라보도록 문간채에 누마루를 두어 서정적 공간을 연출했다. 한겨울 추위를 제외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이 누마루에 오르면 산사의 정취가 오롯하게 가슴에 들어오니 풍류와 시심이 절로 나고 속진의 찌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리게 한다. 참으로 누각의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건물이다.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찍은 주무대가 바로 봉정사 영산암이다. 영화의 내용은 세상과 고립된 어느 외딴 산사에 세 스님이 함께 수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입적을 앞둔 노스님 혜곡과 사바세계에 두고 온 눈먼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운 가운데 도를 깨치고자 하는 젊은 스님 기봉, 그리고 고아로 태어나 암자에서 자란 동자승 혜진 세 사람이 주인공으로 어린 혜진이 어느 날 짝이 있는 새 한 마리를 죽인다. 삶과 죽음이라는 세상 이치에 직면하고 죄와 공포라는 삶의 근원적 고뇌로 마음 아파한다. 그 후 노스님이 입적하시자 거기서 깨달음을 얻은 두 스님은 각자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한다. 무명의 주인공과 조연들의 과묵한 연기와 선문답이 오가는 이 영화는 서러울 정도로 절제되고 승화된 영상으로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나는 오래도록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영상의 아름다움에 영화 전체가 한 컷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퇴락한 산사(그곳이 영산암!)에서 말없이 움직이는 주인공들의 발걸음과 굴뚝에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의 여운, 쏟아지는 햇살과 투명한 눈빛, 어눌한 듯하지만 냉철한 언어…. 기억을 되짚을수록 마음이 아득해 진다.영산암에서 내려와 덕휘루 누마루에 올라 잠시 세상사로 가쁜 마음을 식힌다. 늙은 감나무에 드문드문 매달린 홍시가 팍팍한 겨울 서정을 달랜다. 지난 봄 꽃비가 내리고 따뜻한 봄바람이 불 때 하회 병산서원 만대루에 올랐다. 만대루의 텅 빈 공간과 함께하는 낙동강에 봄 풍경이 아름다웠다. 강물이 불어 오르고 병산의 절벽 아래 진달래가 꽃망울을 피우는 봄 정취에 마음이 풋풋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때의 느낌을 비록 계절은 다르지만 지금도 이곳 덕휘루 누마루에서 새 봄을 생각하며 느껴본다. 멀리 겨울산이 연이어 남으로 내달리고 봉긋한 안산이 다정스럽다. 조선 오백년 안동 유생들의 풍류와 사대부가에서 보이는 한옥의 멋스러움이 이곳 봉정사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둥만으로 지붕을 받들고 있어 멀리서 보면 한옥의 골조미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봉정사의 누각이 병산서원 만대루와 꼭 닮았다. 병산서원에서 보았던, 사심 없이 비어 있는 듯 단정하고 절제된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이곳 봉정사에서도 여실히 보인다. 이는 종교의 영역을 떠나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 즉 산간의 좁은 터에 바닥을 넓히고 지어진 누마루가 툭 터진 풍광과 마주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인간의 본성을 자연과 가까워지려 했던 마음은 승속(僧俗)이 같았기 때문이다. 섣달의 따뜻한 저녁 해가 천천히 진다. 어둠이 내리면 다시 새날이 밝을 것이다. 새해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저서 <한국의 美 산책>.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