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부인’들의 잠 못 이루는 밤

본 도쿄 지유가오카에 사는 주부 마유미 유코(43) 씨는 요즘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11월 들어 급등하는 엔화 탓이다. 자고 일어나면 뉴욕 외환 시장에서 달러당 1~2엔씩 껑충껑충 뛰어 올라 있는 엔화 가치를 보면 심란하기만 하다.작년 말부터 여윳돈 1000만 엔(약 8000만 원)을 호주 달러 외화예금과 미국 채권 펀드에 각각 500만 엔씩 투자해 놓은 그녀는 엔화 가치가 오르면 그만큼 엔화 환산 이자 수입이 줄어든다. 가만히 앉아서 환차손을 본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해외 투자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엔화가 얼마나 더 오를지 몰라 외화예금 등에 넣어 놓은 돈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일본의 ‘와타나베 부인(해외 투자에 나선 일본의 가정주부를 통칭)’들이 고민에 빠져 있다. 이들은 그동안 해외 채권 펀드나 예금에 돈을 넣어 연 5~7%의 높은 이자는 물론 엔화 약세로 인한 환차익까지 톡톡히 즐겨왔다.실제 와타나베 부인을 비롯한 일본의 개인들은 연 0.5%도 되지 않는 일본 은행의 예금 금리에 지쳐 여유 자산을 금리가 높은 나라로 옮겨 놓은 상태다. 대표적인 곳이 연 8.25%의 은행 이자가 보장되는 뉴질랜드와 연 6.75% 금리의 호주다. 채권 수익률이 연 4.0~4.5%인 유럽과 미국에도 많이 투자했다. 개인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싼 엔화를 팔고 고수익 외화 자산에 투자하는 것)’인 셈이다. 그러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국제 금융시장이 소용돌이치면서 엔화가 강세로 전환돼 요즘은 거꾸로 환차손을 걱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개인 투자자들은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여부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해외 예금이나 펀드에 투자한 와타나베 부인들에게 최근의 가파른 엔고는 충격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다.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달러당 115~120엔 사이를 오가던 엔화 가치는 11월 초 달러당 110엔 선이 붕괴될 정도로 올라갔다(환율은 하락). ‘1달러=110엔’선이 무너진 것은 작년 5월 이후 18개월 만에 처음이다. 엔화는 올 들어서만 달러에 대해 7.7% 올랐다. 달러뿐만 아니라 유로와 호주 달러, 뉴질랜드 달러 등 대부분의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해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엔화 가치가 급등하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서브프라임 파문에 따른 미국의 경기 둔화 가능성으로 달러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 약세로 엔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또 하나는 국제 금융시장의 혼란으로 헤지 펀드 등이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을 청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엔화 자금을 달러 등으로 바꿔 해외 고수익(고위험) 자산에 투자했던 헤지 펀드들이 시장이 불안해지자 위험 자산에서 돈을 빼 안전 자산인 엔화로 되돌리고 있다. 이로 인해 시장에선 달러 매도-엔화 매입이 이어져 엔화 가치가 오르고 있다.와타나베 부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요인이다. 미국 달러 약세에 따른 상대적 반등은 엔화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통화도 똑같이 영향을 받는다. 미국 달러를 제외한 다른 나라 돈의 가치가 함께 오른다면 엔화만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 그러나 엔 캐리 자금 청산에 따른 엔화 가치 상승은 엔화에만 국한된 요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른 나라 통화는 조금 오르는데 엔화만 크게 오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엔 캐리 자금 청산은 서브프라임 쇼크로 글로벌 증시가 폭락한 게 도화선이 됐다. 세계 증시 폭락은 그동안 일본 밖의 고수익(고위험) 자산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엔 캐리 자금 청산을 부채질했다.다이와증권SMBC의 스에자와 히데노리 수석 투자 전략가는 “달러 약세로 엔화 값이 계속 오를 경우 ‘달러 매도·엔화 매입’이 가속화될 것”이라며 “이는 고수익 해외 자산에 투자됐던 엔 캐리 자금의 청산도 부추길 것”이라고 말했다. RBC캐피탈마켓의 수 트린 전략가도 “지금 투자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산은 안전한 엔화”라며 “위험 회피 심리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 엔 캐리 자금 청산이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세계 주요 금융사들은 앞으로 엔 캐리 자금 청산에 따라 엔화가 지속적인 강세를 보일 것으로 점치고 있다. 미국 씨티그룹은 엔화가 조만간 달러당 108엔까지 오를 것으로 예측했다. 도이체방크는 1년 내에 달러당 97.5엔까지 엔화 가치가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리먼브러더스의 짐 매코믹 분석가는 “글로벌 경제 둔화로 엔 캐리 자금이 청산되면서 엔화 가치는 당분간 계속 상승할 게 분명하다”며 “달러당 100엔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엔 캐리 청산의 영향이 엔화 급등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엔 캐리가 청산된다는 건 미국 유럽 등의 채권과 주식에 투자됐던 자금이 빠져 나와 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다. 이는 미국 유럽의 채권·주식 값 폭락은 물론 엔화 급등-달러 급락을 부를 게 뻔하다. 엔고 전환은 일본 수출 기업들의 수익성에 타격을 줘 도쿄 증시에서도 폭락 사태를 촉발할 수 있다.엔 캐리의 급격한 청산은 세계 경제에 서브프라임 쇼크보다 훨씬 강력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일본 정부는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을 현재 약 10조~20조 엔(80조~160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다.물론 엔 캐리 자금이 단기간에 대규모로 청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 엔 캐리의 핵심 요인인 일본과 다른 나라의 금리차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최근 잇따라 정책 금리를 내렸지만 연 4.5%로 일본(연 0.5%)보다 4%포인트나 높다. 환변동 리스크 프리미엄을 감안해도 미·일 간 금리차가 2.5%포인트까지 좁혀지지 않는 한 엔 캐리 트레이드는 지속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더구나 일본은행은 국제 금융시장 불안으로 연내엔 금리를 올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다이와증권SMBC 스에자와 투자전략가는 “일본은행은 서브프라임 문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내년 2~3월에나 금리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그때까지는 미·일 간 금리 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엔 캐리 트레이드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일본의 베이비붐 세대 등 개인 투자자들도 엔 캐리 자금 청산을 막는 요인이다. 단카이(團塊)로 불리는 일본의 베이비부머들이 정년퇴직을 하면서 향후 3년간 800만 명 이상이 퇴직금과 연금으로 약 50조 엔(약 400조 원)을 손에 쥐게 된다. 이들은 저금리의 일본 은행 예금보다는 투자신탁이나 외화채권 등에 투자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지금도 엔 캐리로 일본을 빠져나가는 돈의 약 75%는 개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헤지 펀드의 뭉칫돈이 아니다. 윤만하 한국은행 도쿄사무소장은 “단기적인 엔화 강세는 오히려 국내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개인들에게 또 다른 엔 캐리 트레이드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실제 지난 8월 외환시장이 출렁이며 엔화가 강세를 보일 때 와타나베 부인들은 오히려 상승한 엔화를 팔고 투자국의 통화를 사들이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엔화가 비쌀 때 팔면 더 많은 외화 자산에 투자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그러나 와타나베 부인들이 언제까지나 엔 캐리 자금을 청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도 없다. 헤지 펀드 등의 엔 캐리 청산이 가속화돼 엔화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면 와타나베 부인들도 환차손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해외 투자 자금 회수에 나서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많다. 와타나베 부인들이 움직이는 엔화 가치의 임계점은 각자 해외 예금이나 펀드에 투자한 시기와 현재의 수익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결국 엔화 가치의 상승 속도와 상승폭에 따라 와타나베 부인들이 해외 투자로부터 마음을 돌릴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란 얘기다. 와타나베 부인들의 변심 여부는 엔고 속도에 달린 셈이다.도쿄=차병석 한국경제신문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