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빌리지

마 전 사업 관계로 한남동 유엔빌리지를 방문한 김모 씨는 씁쓸한 경험을 했다. 차를 잠깐 골목에 주차하고 업무를 상의하고 나온 사이 김 씨의 차에 주차 위반 스티커가 붙어 있었던 것. 김 씨는 이후 구청에서 단속 경위를 듣고는 더욱 입맛이 썼다.“선생님! 다음부터 유엔빌리지에 오실 일이 있으면 절대로 아무 곳에나 주차하지 마세요. 집집마다 CCTV로 외부 상황을 24시간 감시하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수상한 사람이 자기 집이나 근처에 주차하면 곧바로 구청에 신고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강남대로 끝 한남대교에서 남산을 향해 북단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언덕에 있는 고급 주택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단지인 이곳은 유엔빌리지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옛 단국대 건너편 독서당 길을 따라 형성된 유엔빌리지는 특히 주한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주거지역이다. 그 이유는 보안이 철저하고 한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등 서울에서 보기 드문 쾌적한 주거 환경 때문이다.유엔빌리지의 철저한 보안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선 이 지역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유엔빌리지의 인기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제국에 주둔하던 일본인 장교들을 위한 숙소를 이곳에 지은 것이 초창기 유엔빌리지의 모습이었다. 광복 이후 1950년대 말 유엔빌리지는 국내에 거주하던 외국인 기술자들을 위한 숙소로 탈바꿈한다. 마땅한 지역을 물색하던 외국인들에게 이곳은 국내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고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유엔빌리지가 외국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곳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사실상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제3공화국 이후 유엔빌리지는 주한미군, 국내 고위 인사들의 자택, 각국 외교 관저들이 대거 들어선 주거지로 변신한다. 지금도 유엔빌리지 내에는 이탈리아 대사관, 슬로바키아 대사관 등 주요국 대사관저들이 들어서 있다.유엔빌리지는 국내 처음으로 조성된 게이트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비교적 덜하지만 초창기 유엔빌리지 정문은 주한미군이 통제를 맡아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됐었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단지여서 그런지 유엔빌리지는 출입구가 하나다. 주변 지역보다 지형이 높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출구가 없다. 단지 앞은 강변북로와 한강이다. 더군다나 유엔빌리지 내에는 각 가구마다 수십 개의 CCTV를 설치해 외부를 철저하게 감시한다. 한곳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는 등의 행동을 하다간 출동한 보안 요원에게 제지를 당하기 십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엔빌리지 내에서는 자체 관리인들이 수시로 단지를 순찰한다.주거 환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다. 언덕에 자리 잡은 유엔빌리지는 대부분의 건물이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립돼 있다. 그것도 경사도에 따라 건물이 순차적으로 들어서 있어 전면부에 위치한 주택들은 대부분 한강 조망이 가능하다. 한강 조망이 가능한 곳에 들어선 주택의 3.3㎡당 매매값은 3000만~3500만 원. 워낙 경관이 뛰어난 곳이라 매물이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거래되는 물량도 한 해 10여 건에 불과하다. 인근 옛 단국대 부지에 들어서는 고급 주택 분양가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매매값이 더 오를 가능성도 있다. 한강을 조망할 수 없는 곳은 3.3㎡당 매매값이 2000만~2500만 원선이나 매물이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또 강·남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남산과 가깝다는 점도 유엔빌리지의 인기를 부추기는 이유다.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은 성북동 이태원동 청담동 등 다른 고급 부촌과 비슷하다. 지역 내 공사 중인 건물 인부들을 제외하고는 단지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유엔빌리지만의 독특한 점은 정해진 지번 외에 자체적으로 통용되는 지번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 자택의 정식 지번은 11-300이지만 이곳에서는 유엔빌리지 6호로 통한다. 이렇게 각 집마다 별도로 지번을 구성해 운영 중인 곳은 국내에서 이태원동과 유엔빌리지 등 단 두 곳뿐이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민자치회 모임이 열리지만 대부분 가정부나 집사들이 대신 참석해 안건을 주고받는다고 한다.그렇다면 이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예전에는 정부 고위 인사나 주한 외교사절들이 모여 살았지만 세월이 지나 현재는 거주민들의 직업군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체적으로 주요 그룹 2, 3세나 외국계 기업 최고경영자(CEO), 연예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거주민들의 연령대도 30~50대가 주류를 이룬다.유엔빌리지는 풍수지리로 볼 때 ‘돈이 모이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제희 대동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은 “유엔빌리지 등 한남동에 부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유는 바로 한강 물과 관련이 있다. 멀리 태백산에서 발원해 흘러내려 온 한강은 중랑천을 지나 허리띠를 찬 모습의 금성수로 변해 한남동을 둥글게 감싸고 흐른다”며 “풍수에서 금성수는 물 중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부귀영화는 물론 자식이 충효현량하고 의로운 인물이 많이 태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고 이사장은 또 “풍수에서 물을 재물로 보는데, 먼 곳에서 굽이굽이 흘러와 혈장을 감싸 안고는 바로 꼬리를 감춰야 길상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남동은 멀리서 흘러온 물이 보광동 쪽에서 급히 사라지니, 집집마다 재물이 가득 쌓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집을 찾는 기업인들이 매물을 구할 때 풍수가를 대동하는 것은 유엔빌리지에선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것이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설명이다.현재 유엔빌리지에 사는 주요 기업인은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 정몽선 현대시멘트 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강영중 대교 회장,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 등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이 창업주가 아닌 2, 3세 기업인이라는 점이다. 그중에서 정몽구 회장은 자택(유엔빌리지 124호)을 중심으로 아들, 딸 등 일가가 모여 산다. 다른 현대가 형제들이 성북동에 모여 사는 것이나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이태원동에 일가를 이뤄놓고 사는 것과 대비된다. 특이한 것은 정 회장의 집은 한강 조망권이 형성돼 있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다. 박삼구 회장과 신동빈 부회장 등 다른 기업인들이 한강 조망이 가능한 곳에 자택을 마련해 놓은 것과 비교된다. 이에 대해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정 회장의 집터는 비록 한강이 보이지 않지만 남산을 중앙으로 놓고 볼 때 오른쪽 백호의 눈에 해당하는 명당”이라면서 “이 집을 산 이후 현대차 그룹이 다른 현대가 형제들의 기업에 비해 앞서 나갔다는 점에서 이 집에 대한 정 회장의 애착이 특히 각별하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또 유엔빌리지 81호에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집이 있는데 3300여㎡(옛 1000여 평)의 대저택으로 3.3㎡당 매매가가 3000만~4000만 원에 이른다. 유엔빌리지의 꼭대기에 있는 집으로 주말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통일교 신도들로 북적거린다. 이 밖에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의 자택(24호)도 유엔빌리지에 있는데 몇 해 전 이 주택은 김 전 회장 부인인 정희자 씨에서 둘째 아들인 김선협 씨로 명의가 변경됐다. 현지에서는 김 씨가 이 주택을 대대적으로 재건축해 고급주택으로 분양할 예정이라는 소문도 들린다. 이 밖에 외국계 금융사 CEO들과 탤런트 정준호 김래원 김상중 배종옥 노주현, 가수 겸 작곡가 주영훈 씨 등도 유엔빌리지 입주민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유엔빌리지가 부유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희소성과도 관계가 있다. 특수 목적으로 단지를 개발했기 때문에 범위가 제한적이며 지을 수 있는 주택도 한계가 있다. 현재 재건축 중인 유엔빌리지 D아파트만 해도 조합원분 38가구를 제외한 나머지 10가구를 일반 분양했는데 개시와 동시에 매물이 자취를 감췄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현재 신동아건설이 한강변 A아파트와 동시에 재건축하고 있으며 입주는 내년 10월께로 예상된다.지역 내 아파트로는 A, D아파트 외에도 775-2에 들어선 힐탑트레저와 B아파트로 불리는 효성빌리지, C아파트인 크로바 아파트가 전부다. 군인공제회가 창광기업으로부터 인수해 리모델링한 힐탑트레저는 지역 내 보기 드문 고층 아파트다. A, B동으로 구분돼 있는데 A동은 리모델링, B동은 신축했다는 점이 차이다. 두 개 동 모두 지난 2003년 7월에 분양했으며 이 중 284~360㎡(옛 86~109평)로 구성된 A동의 분양가는 10억~16억 원선이었다. B동은 416㎡(옛 126평) 단일 면적으로 13억~16억 원에 분양했다.유엔빌리지에서 가장 비싼 집은 한강변을 따라 위치한 빌라들로 거래되는 물건이 없어 정확한 가격을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대략 3.3㎡당 매매값이 3500만~4000만 원대일 것으로 추정한다. 지역 내 가장 비싼 빌라는 코번하우스와 헤렌하우스다. 그중 코번하우스는 올 4월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공동주택 공시지가 중 연립주택(빌라) 부문 3위에 랭크됐다. 건교부 자료에 따르면 코번하우스 393㎡(옛 119평)의 정부 공시가는 23억3600만 원. 실제 거래되는 값은 40억 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강변북로 바로 앞에 위치한 헤렌하우스도 지역 내에서 비싸게 거래되고 있는 고급 빌라 중 하나다. 옛 러시아공사관저에 건립된 이 집은 복층형 구조로 설계된 403㎡(옛 122평) 8가구와 단층형 413㎡(옛 125평) 8가구로 구성돼 있다. 대리석 느낌이 나는 외장재를 사용해 외관을 고대 그리스풍으로 지었으며 단지 내 정자, 조각상, 분수대 등을 설치해 이국적인 느낌이 나도록 했다. 이 밖에 건교부가 발표한 공동주택 공시지가 다세대주택(단독형 주택) 중 상위 10위권에 유엔빌리지 주택이 4개나 포함됐다. 이들 주택의 월 임대료는 1000만~1500만 원이다.고급 주택 단지답게 분양도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된다. 지역 내 현재 분양 중인 주택은 112호 일대에 들어서는 대림 루시드 하우스와 139호에 짓는 ‘더 하우스’, 힐탑트레저 앞 보미누아 등이다.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 자택을 재건축해 짓는 루시드는 516㎡(옛 156평) 6가구, 526㎡(옛 159평) 8가구, 579㎡(옛 175평) 1가구로 구성돼 있다. 시행을 맡은 대림 D&I는 이준용 회장의 차남인 이해승 씨가 대표로 있는 회사로 완공 후 이 회장 역시 이 집에 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시행사는 샘플하우스 방문 전에 방문자의 재산 내역까지 확인할 정도로 입주민 선별에 신경을 쓴다는 후문이다. 분양가는 40억~50억 원선으로 알려져 있다.한남동 774-2(139호)에 들어서는 더 하우스는 345㎡(옛 104평) 7가구로 구성된 고급 빌라로, 국내 시스템 창호의 선구자인 윈도우하우스 김천식 사장이 시행을 맡았다. 777-9 클라인하우스도 397㎡(옛 120평) 단일 평형으로 7가구를 분양하고 있다.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realsong@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