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 자뻑, 또라이…’ 쉰일곱이란 나이가 의심될 정도로 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은 젊었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 요즘 20∼30대가 즐겨 사용하는 은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외모도 마찬가지다. 얼굴만 보면 40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의 ‘동안’이었다. 패션도 캐주얼했다. 넥타이 없는 흰색 남방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김 사장은 한눈에 봐도 ‘멋쟁이’였다. 젊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을 묻자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 외엔 특별히 없다’며 빙그레 웃는다.김 사장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산업 디자이너들에겐 ‘꿈’이자 ‘영웅’이다.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인사. ‘히트 상품 제조기’로 불릴 정도로 성공한 제품이 많다. 레인콤의 MP3 플레이어 ‘아이리버’를 비롯해 삼성전자의 휴대폰 ‘애니콜(가로본능)’, 아모레퍼시픽의 ‘슬라이딩 콤팩트’ 등은 시장 흐름을 단번에 바꿔놓았다.김 사장의 머리는 지금도 엉뚱하고 재미있는 상상으로 꽉 차있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와의 인터뷰는 다소 엉뚱하게도 양말 이야기로 시작됐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오늘 아침에도 옷을 입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양말 패션이 너무 지루한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남성 패션에서 양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큰 데 지금까지 나온 양말 디자인은 너무 부족하다”며 “이 분야에서도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묘한 암시로 느껴졌다.김형철 MONEY 발행인(한국경제매거진 사장)과 서울 논현동 이노디자인 사무실에서 이뤄진 인터뷰는 2시간 넘게 진행됐다. 경쟁자나 동업자 관계 등 다소 자극적인 질문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웃음과 유머가 넘쳤다. 인터뷰 끝자락에선 “하마터면 김형철 사장님의 약 올리기 작전에 말려들어 핵심 기밀인 다음 상품을 공개할 뻔했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여러 포즈를 요구하는 사진기자의 요구에 “전 웃지 않으면 인상이 강해 보여 영 꽝이다”며 “웃는 표정으로 찍어 달라”고 익살을 부렸다.“꾸밈이 없어 자연스럽고 군더더기가 없어 심플하면서도 새로운 것이라고 할까요. 자연스러우면서도 새롭다는 게 언뜻 충돌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통통 튈 정도로 기존 디자인과 다른 건 아니지만, 은은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 좋은 디자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자연스러운 특별함’에 애착이 많이 가는 것 같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상당히 어려운 개념이죠?”“특별히 안 하는 게 비결입니다.(웃음) 특별히 연구하려고 마음을 먹거나 콘셉트를 내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나도 모르게 디테일에 빠지면서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최근 도쿄 아키하바라에 출장 갔을 때도 쇼핑센터에서 너무 오랜 시간 각종 제품을 관찰하다 아내에게 적지 않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먼저 택시 타고 호텔로 돌아가겠다고 했겠어요.(웃음) 어느 때는 무작정 릴랙스하다가도 어떤 땐 발끈하고, 마냥 일에 매달리는 게 비결 아닌 비결이겠죠.”“그때그때 다르긴 하지만, 조용한 곳에서나 시끄러운 곳에서나 가능합니다. 시끄러운 아키하바라에서도 집중하다 보면 주위 소리가 안 들립니다. 예를 들면 시계 속에 돌아가는 태엽이 너무 예쁜 것 같아 하나하나 만지다 보면 시간 지나가는 줄 모르는 스타일이죠. 리서치를 위한 리서치를 하기보다는 실생활에서 문득 문득 영감을 얻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를테면 펜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젓가락 같은 기다란 것만 보면 모두 펜처럼 보이곤 합니다. 이럴 때면 어렴풋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모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재빠르게 스케치를 잡아서 디자인을 하는 거죠.”“일본 휴대폰의 경우 컬러 패턴이 굉장히 다양해진 것 같습니다. 예상은 한 거죠. 나도 고객에게 실제 그런 제안을 누누이 해 왔으니까요. 디자인의 역할이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과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지금까지의 디자인은 대량생산의 틀에 박힌 탓에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수공예처럼 한 사람을 위한 제품을 만들자는 건 아니지만 디자인 개발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제품을 마지막에 구입하는 한 사람의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수백만 개의 컬러와 각양각색의 디자인 제품 시대가 도래한 거죠. 이번 일본 출장에서 얻은 건 이런 디자인의 트렌드를 나만 느낀 게 아니란 사실을 절감했다는 것입니다.”“글쎄요. 디자인이라는 건 늘 부족한 것 아닌가요. 한국은 물론 일본, 미국 등에서도 아직 최고의 디자인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재밌는 거죠. 다만 한국 제품에 국한해 얘기한다면 전체적으로 다양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의 메이커가 멀티플한 디자인을 하기 힘들다는 면과 기업 나름의 정체성을 살린 디자인을 못하고 있는 실정을 얘기하는 겁니다. 너무 유행을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지 않느냐는 거죠. A사가 하면 B사도 따라가는 식으로 말입니다. 소비자들의 다양성을 생산자들이 100% 파악하고 있는지 의심이 듭니다.”“저는 직원들과 회의할 때 이런 얘기를 자주 합니다. 대다수가 만족하는 디자인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요. 그러다 보면 오히려 시간만 끌고, 특색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통상적인 디자인과 다른 디자인도 분명 팔린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촌스럽게 생각하는 디자인을 보고 ‘바로 이거야’라고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단 말이죠. 세상에는 수많은 취향과 기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들이 꼭 명심해야 할 부분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그걸 필요로 하는 수요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그 시장을 만드는 게 디자인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고요. 이렇듯 기존 제품에 대해서도 모델을 더욱 다양화해야 하는 시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디자인은 ‘셰어링(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나만 간직하는 게 아니라 남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포함됩니다. 나의 아이디어로 생산자가 돈을 벌 수 있고 소비자들은 생활이 더욱 윤택해진다면 즐거운 일이죠.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내 아이디어로 즐거워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디자인이란 게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사람을 이해해야 성공하는 디자인이 나온다는 것도 이런 맥락인 것이죠. 디자인은 기술도 상술도 아니고 인술입니다.”“그렇죠. 디자인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하듯이 하는 것이니까요. 디자인은 바로 사랑인 거죠. 이런 얘기하면 누군가 옆에서 꼭 ‘할렐루야’ 그러더라고요.” (웃음)“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라고 기억합니다. 친구 집에 여럿이 놀러갔다 우연히 친구 형 방 책장에 꽂혀있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라는 잡지를 보게 됐습니다. 신기한 모양의 조명기기, 가구 등 수많은 생활용품이 담겨 있는 그 책을 보고 막연히 ‘그래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내가 할 일이야’라고 생각했던 거죠. 놀다말고 2층에 혼자 올라가 친구 형 방으로 들어간 것이나 그 수많은 책 속에서 굳이 그 책을 집어든 것을 돌이켜보면 디자인이 제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유학을 다녀와 창업한 것입니다. 창업한 뒤 ‘무모한 경험’을 하면서 많은 걸 배웠는데 지나고 보니 이런 경험이 저에겐 중요한 계기가 되더군요. 이를테면 고객으로부터 의뢰받은 디자인을 만들고,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 브랜드와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는 애착, 집착이 점점 커지더군요. 지난달 ‘이노디지털’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만만치 않았습니다.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다 미술대학을 간다니까 많은 부분에서 부딪쳐야 했었죠(김 사장은 경기고를 나왔다). 반대가 거셌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이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자 결국엔 도와주시더군요. 그땐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갑니다. 나도 우리 아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게 되면서 기쁘고 고맙더군요. 뭔가 하고 싶은 걸 안다는 건 축복인 것 같습니다.”“험난했던 게 사실입니다. 공대에 들어가면 대기업에 들어가 취직이 보장되고 의대나 법대에 가면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처럼 검증된 길을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벤치마킹 대상이 없었다는 게 가장 힘든 점이었습니다. 지금은 언론에서 인터뷰도 하고 하지만 그 당시는 디자인한다고 떠들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했지만 그만큼 고생도 많이 했죠. 직장을 찾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요.”“미국에 유학을 간 뒤 불과 5년 만에 교수가 됐습니다. 처음엔 영어를 못해서 실수도 엄청 많이 한 유학생이 그런 자리까지 간 걸 생각하면 실력보다는 운명론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첫 직장을 얻은 것도 그랬죠. 영주권도 없는 유학생이 직장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포트폴리오를 들고 인터뷰를 하러 갔지만 번번이 떨어졌었죠. 그래도 하면 되겠거니 하고 계속 기업들을 찾아갔고 15번째 만에 취직했습니다. ‘멜볼트어소시에이트’라는 디자인 회사였는데 고객 중엔 TV 제조업체인 제니스사도 있는 등 시카고에서 가장 큰 회사였습니다. 그것도 돌이켜보면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운이 좋아서입니다. 제가 직접 회사를 경영해 보니 사람을 뽑는 건 능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아쉬우니까 뽑게 되더라고요.” (웃음)“그때만 해도 다니는 직장의 기준은 ‘Bigger is better(클수록 좋다)’였습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하등 회사를 나갈 이유가 없었죠. 그런데 6개월 다니니까 슬슬 짜증이 나더군요. 디자인실에 100여 명의 디자이너가 앉아 있다 보니 신입사원에게 주어지는 일은 고작 TV 화면을 그리라는 식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TV 화면에 무슨 디자인이 필요하겠어요. 그때 ‘여긴 아니다’라는 생각에 무조건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날 눈여겨보고 있던 선배 한 분이 중소 디자인 회사에 추천해 주더군요.”“아뇨. 옮긴 직장에서는 디자이너가 10여 명에 불과해 프로젝트를 맡기면 디자인 전반을 다뤄야 했으니 전 직장보다는 성취도가 높았습니다. 스피커도 만들고 의료 장비도 디자인 하고 수많은 기구와 장비를 디자인하면서 많은 걸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1년 반 정도 하니까 내심 ‘이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다음부턴 뭘 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됐죠. 그래서 제 직장생활은 1년 반이 고작입니다. 지금은 나라도 그런 사람은 절대 뽑지 않을 거예요.” (웃음)“디자인 관련 뉴스레터에서 일리노이대학이 조교수를 찾는다는 광고를 봤죠. 일리노이대학은 산업 디자인 분야에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곳입니다. 그런 명문학교에 영주권도 없고 경력이 2년도 안 되는 내가 신청하면 100% 안될 것이 당연했죠.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학교에 이력서를 보냈는데 인터뷰를 하고 나를 뽑더군요. 이런 걸 보면 전부 운명인 것 같습니다. 그 시점에 왜 내가 뉴스레터를 봤는지. 눈에 필요할 때 딱딱 나타났으니까요.”“얼마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특강을 했는데 내가 그 무대에 오른 게 두 번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 록 페스티벌에 참여해 그 자리에 올랐던 건데요. 그때 ‘다이아몬드 포’라는 록그룹을 만들고 전자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었습니다. 1960년대 비틀스의 ‘아이 소 허 스탠딩 데어(I saw her standing there)’라는 노래를 부르던 친구가 한참 후 유학 다녀온 뒤 양복을 입고 이렇게 디자인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게 DNA인지 뭔지 몰라도 뭔가를 창조하고 즐기는 측면에서 음악과 디자인이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는 결국 하나라는 얘기죠.”“잘 보셨습니다.(웃음) 내 아내가 나보고 딱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항상 디자인만 생각하고 산다고요. 나를 표현하는 디자인 삼행시도 지어주더군요. 들어보실래요. 디-디자인은, 자-자기 자신의, 인-인생의 설계.” (웃음)“또라이가 돼야 합니다.(웃음) 또라이란 무엇인가에 푹 빠져있는 열정적인 전문가를 말하는 거죠. 일을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진짜 좋아서 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디자인의 경우 자기가 상상하는 걸 실물로 만들어 보는 일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친구들은 항상 스마일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1번지는 진짜 열정적인 전문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친구들은 우리 회사에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하고 출퇴근이 필요 없는…. 유비쿼터스 디자이너라고 부르면 될까요.”“우선 실존해 있는 인물을 언급하기 전에 각 분야에 누가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디자인 분야에선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 제품 주기가 아무리 빨라도 그 주기를 낚아챌 수 있고 ‘A’부터 ‘Z’까지 폭넓게 볼 수 있는 사람, 상상력이 엄청나 자신의 상상을 빨리 시각화할 수 있는 사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 사람의 스케치와 그림을 직접 봤는데 상상부터 그림까지 실현하는 걸 보면 근처도 따라갈 순 없지만 나의 드림 모델로 여기고 있죠.”“(머뭇거리다) 미국 창고에 실패 상품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여행용 가방인데요. 15년 전에 만든 건데 지금 출시됐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창조자의 딜레마’라는 게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경험을 통해 선택에 신중해지고 절제의 필요성을 깨닫지만 초년병 때는 상당히 모험을 많이 합니다. 디자이너들의 직업병이기도 한데요. 불편한 걸 도저히 못 참고 본인이 직접 다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일종의 자뻑인데…(웃음) 어느 날 보니까 양복을 구기지 않고 넣고 다닐만한 여행 가방이 없더군요. 그래서 삼각형 모양으로 바퀴가 달려 평소엔 굴리며 운반하다가 들어 올리면 일자로 접히는 가멘트 백을 만들었는데 당시 만들 때만 해도 무조건 잘 팔릴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내가 갖고 있는 돈을 직접 투자했죠. 5000개를 만들었는데 3000개 정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특허 전문 변호사 친구가 있는데, 발명가들이 항상 저지르는 실수가 (눈앞에 보이는 신호등이) 노란불, 빨간불인데 파란불이라며 직진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가방 비즈니스라는 게 대량생산을 위한 시설 투자비, 광고에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 등을 고려해 엄청난 자본을 사전에 끌어당겨야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내질렀던 거죠. 미국 항공사인 UA사에 비싼 광고비를 내고 기내에 판매하기도 했지만 준비 부족으로 결국 생산을 중단해야 했죠. 완전 실패라기보다는 벌어들인데 비해 고생이 상대적으로 엄청났다고 표현하고 싶네요. 하지만 이런 실패를 통해 디자인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는 제조, 유통, 마케팅, 수출, 수입 등 전 생산 프로세스를 완전 터득할 수 있었으니 값진 경험이라고 자위해 봅니다.”“글쎄요. 저는 지금까지 성공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업가에게 성공의 잣대는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제대로 자금을 펀딩(조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끊임없이 올인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한 것이죠. 이번 제품 출시를 두고 주위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여태 경험을 통해 배운 게 ‘what to do, what not to do(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입니다. 마케팅과 유통을 맡는 이노맨이라는 별도 자회사를 세운 것도 이런 경험 덕분이죠. 이노디자인은 앞으로도 디자인만 할 테고 나의 역할도 최고경영자(CEO)이자 창립자에 국한될 것입니다.”“우리 회사 방침이 주요 고객이 하는 상품은 자체 브랜드로 생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객이 하지 않는 새로운 분야도 상상 외로 상당히 넓습니다. 게다가 디자이너로서 고객에게 성공하는 디자인을 주기 위해선 브랜드 경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둘을 띄어 놓고 보면 안 되는 거죠.”“그 상황은 이미 이노맨을 만들기 한참 전이죠. 레인콤이 자체적으로 디자인을 한 것은 한참 전입니다(‘상황’이 처음에는 불편한 관계를 언급하는 것 같다가 나중에는 레인콤과 외주 디자인 계약이 끝나는 것을 지칭하는 뉘앙스로 바뀌었다). 우리가 해주지 않은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이노가 디자인을 해주지 않아 회사가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선택은 그쪽에서 한 것이라는 이야기죠. (다소 뜸을 들이다) 요즘 경향을 보면 불행히도 디자인에 대해 조금 경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쉬운 부분이죠.”“일단, 나는 송충이가 아니거든요.(웃음) (다음 말을 꺼내기까지 다소 민망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 대기업들은 더 다양한 디자인을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의 차별화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말이죠. 디자인의 필요성은 중소 벤처기업, 중견기업 등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모델은 전문성 있는 일류회사들과의 협업입니다. 정보기술(IT) 관련 기술을 이노가 전부 개발하는 게 아니라 이노는 디자인과 브랜드를 제공하는 것이죠.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것은 시장이 넓고 취향이 다양하고 계속 다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격한 디자인을 찾아내려면 몇 개 대기업으로는 부족하죠. 그래서 조그만 디자인 회사가 많이 필요한 겁니다.”“개인적으로는 미래 경영의 키워드는 ‘Collaboration(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영에서도 릴레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강자 4명이 모여서 최고가 돼야지 ‘We can do it all, the bigger is the better(우리가 모든 걸 할 수 있다, 클수록 좋다)라는 개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미래 시장의 소비자 취향은 급변하기 때문에 빨리 움직이는 회사가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도 제조 기업, 공장 기업으로 거듭나는 게 아니라 디자인을 코어 자산으로 하는 전문 기업으로 키우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노’라는 브랜드를 키우고 그 브랜드를 통해 우리의 가치를 평가받고 싶은 거죠. 물론 이건 짧은 게임은 절대 아닙니다.”“이노디자인은 시각적으로 심플하면서도 쌈빡하고 새로운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면 상품화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이를 ‘이노틱’이라고 부르는데 명품 브랜드처럼 모양이 확연히 다르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이노틱’한 조건을 만족하는 범위 내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MP3, 블루투스 등 제품을 계속 출시할 겁니다. 한 해에 20여 개의 모델을 낸다는 게 목표고요. 출시되는 제품들은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유럽 등에도 나오게 될 것입니다.”“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CEO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은 CEO는 카리스마가 있고 직원들을 제대로 통솔할 줄 아는 이른바 잭 웰치 같은 스타일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CEO의 역할도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밸류 크리에이션(가치 창조)을 할 수 있는 창조적인 CEO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같은 가치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 또 브랜드 디자인 등을 어떻게 힘 있게 시장에 개척해 나갈지 아는 사람이 이 시대에 맞는 CEO라는 이야기입니다.”“(웃으면서) 그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어 당황스럽네요. 그러고 보니 나보다 더 훌륭하게 이런 역할을 수행할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영입해야겠네요.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창업자의 역할과 개인적으로 다빈치와 같은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삶의 목표는 계속 가져갈 것입니다.”김영세이노디자인 대표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미국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학과 학사 및 석사미국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1986년 미국 이노디자인 설립(실리콘밸리)1997년 서울 이노디자인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