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지갑
[한경 머니 기고 = 일꾼B]명품의 진가는 세월이 담보한다. 시간이 흘러도 질리지 않는 디자인과 견고한 품질,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명성이 그 가치를 잇는다. 일꾼의 물건에도 명품의 삼박자가 필요할 때가 종종 있는데 지갑이 대표적이다. 왜일까.

편집자 주 : 일이 우리를 지배하던 신입 시절을 벗어나 ‘일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길 즈음에야 ‘일템’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한다. 저서 <일꾼의 말>의 두 작가 일꾼A(필명)와 일꾼B(필명)가 일꾼 생활을 더 영리하고 슬기롭게 만들어 주는 물건을 소개한다.
일꾼의 물건 지갑, 첫인상을 좌우한다
그 흔한 명품백 하나가 없다. 옷이나 가방을 고르는 기준이 가심비보다 가성비에 가까우니 당연한 결과다. 지난해 초부터 1년 가까이 출퇴근길 내 몸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가방은 브랜드 없는 5000원짜리 에코백이다. 가방을 살 때 가격을 제외하고 고려하는 요소가 딱 두 가지인데, 이 가방은 허들을 모두 통과한 몇 안 되는 잇템이다.

업무에 필요한 노트북과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이 넉넉히 들어가는 수납공간에 내 어깨를 조금이라도 덜 뻐근하게 할 가벼운 무게를 가진 가방. 그러니 고작 휴대전화 하나 겨우 들어갈 크기이면서 한 달 치 월급을 훌쩍 넘기는 명품백은 늘 이해불가의 영역에 놓여 있었다. 일을 하면서 혹은 사적인 모임에서 명품 매장을 들르기 위해 해외여행을 갈 정도로 명품에 진심인 이들을 종종 만난다.

명품에 진심인 한 지인이 버킨백을 사기 위해 에르메스 매장을 찾았는데 결국 가방을 손에 넣지 못해 속상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일이 있었다. 그 말끝에 내가 고르고 고른 나름의 위로는 이랬다. “다른 매장을 찾아보시라”고. 에르메스 버킨백은 매장에 물량이 있어도 아무나 살 수 없는 가방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누적 구입금액을 쌓고, 초대를 받고, 매장 판매원과 친분까지 쌓아야 한다나 뭐라나. 공급도 있고 수요도 있는데 사고파는 자연스러운 시장의 원리가 비껴가는, 정말 ‘노(No)’ 이해의 영역이 명품 시장이었다.

그런 내가 2020년 8월, 기어이 명품에 발을 들였다. 나의 첫 번째 명품은 이응과 리을이 두 번씩이나 들어가 그 이름조차 유쾌하고 생기발랄한 ‘생로랑의 블랙 마틀라세 스몰 모노그램 엔벨로프 지갑’. 지나치리만치 긴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지갑은 100% 소가죽에 4개의 카드 슬롯과 1개의 오픈 수납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가격은 50만 원대로 기억한다. 이 고상한 지갑 가격의 앞자리 수에 놀랐던 탓인지 뒷자리 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고작 지갑이긴 하지만, 가성비를 뒤로 하고 명품 시장으로 급격하게 노선을 선회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일꾼으로서의 내 첫인상을 위해서. 기자, 제휴 담당자, 사업기획자 등 미팅이 많은 일을 해왔다. 다양한 유형의 일꾼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일꾼의 첫인상에 ‘템빨’이란 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몽블랑 만년필로 내 의견을 기록하는 일꾼에게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이패드로 디자인 시안을 보여준 일꾼에게는 더 신뢰가 갔다. 또 메종키츠네 카디건을 입은 일꾼은 트렌드에 민첩하게 대응할 것 같은 이상한 프로페셔널함이 느껴졌다. 아직 물정 모르는 일꾼이라서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 그냥 나는 그렇다.

일꾼에게 첫인상은 곧 경쟁력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첫인상의 템빨은 명함지갑이었다. 명함은 일꾼과 일꾼이 처음 만날 때 인사와 함께 건네는 자기소개다. 상대방 일꾼이 명함을 꺼내길 기다리거나 꺼낸 명함을 받아들면서 자연스럽게 일꾼의 손에 들린 명함지갑에 눈길이 향했다. 참 다양한 부류의 일꾼들이 있었는데, 최악의 첫인상은 가방 앞주머니와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주는 일꾼이었다. 그런 일꾼과 명함을 교환할 때는 미팅 이후 내 명함이 어떻게 굴러다닐지 눈에 뻔히 보였다.

내 명함을 가방 속이나 주머니에 넣은 일꾼 열의 아홉에게서는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반대로 깨끗한 브랜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준 일꾼들은 그만큼 자기소개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명함을 그 지갑에 보관하고 있다는 점도 뭔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준 일꾼은 이름이 지갑과 함께 기억돼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꼭 명품이 아니어도 그랬다. 프라이탁 명함지갑을 든 이들은 트렌디하고 친환경을 실천하는 이미지로 각인됐고, 도트윈 명함지갑을 가진 일꾼에게는 사회 소수자에게 관심을 갖는 따뜻한 이미지가 남았다. 템빨의 힘이 나의 일잘러 여정을 돕는다고 믿는 자본주의 키즈는 그래서 브랜드, 그중에서도 명품 지갑을 구입했다. 생로랑의 저 요란스럽게 긴 이름의 지갑을 선택하기까지는 일주일여의 시간이 걸렸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명함지갑 #지갑추천’ 등으로 검색과 서핑을 거듭하며 찾아낸 쇼핑 후보군은 샤넬의 보이 플랩과 구찌 마몬트, 그리고 생로랑의 저 긴 이름을 가진 지갑이었다. 장바구니에 담길 지갑을 찾는 일은 간단했다. 내가 아는 브랜드의 것 중 깔끔한 가죽의 까만색 지갑. 일꾼으로서의 내 첫인상이 단정하고 지적이게 보이길 바라기 때문에 지향하는 디자인은 확고했다.

이 지갑들을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돌아오는 주말 아웃렛과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후보군들의 실물을 눈으로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봤다. 명품 지갑, 실용성에 자신감↑ 단정하게 보이고 싶지만 극심한 귀차니즘을 갖고 있는 내게는 카드와 명함을 따로 정리할 필요 없이 한꺼번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수납공간이 절실했다. 또 명함지갑을 가방 속에 마음 편히 던져 넣을 수 있는 가죽의 견고함과 촌스럽게 강조되지는 않지만 상대방 일꾼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명이나 심볼이 들어간 지갑, 그리고 가격. 수납공간이 부족했던 구찌 마몬트가 가장 먼저 탈락했다.

샤넬은 지갑 한가운데에 위치한 영롱한 금장이 끝까지 마음을 애태웠지만, 결국 40만 원가량의 가격 차가 생로랑으로 등을 떠밀었다. 6개월간의 사용 후기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합리적인 소비였다. 일꾼의 첫인상 템빨로 시작된 가심비 소비였지만 샤넬과의 가격 차 등을 고려한 나름의 가성비 요소도 추가됐고, 무엇보다 일꾼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감도 생겼다. 지갑 안쪽 4개의 카드 슬롯에 주민등록증과 카드를 수납하고, 가운데 널찍한 오픈 공간에 명함을 가득 넣는다. 앞 열에는 내 명함을 배치하고, 뒷 열에는 그날 만난 일꾼의 명함을 보관한다. 스크래치에 강한 캐비아 가죽이어서 마음 편하게 가방 속에 던져 넣고 다닌다. 일꾼을 처음 만날 때 똑딱 소리를 내며 ‘YSL’ 금장이 빛나는 생로랑 지갑을 열고 깨끗하게 보관된 명함을 전달한다.

일꾼에게 받은 명함은 미팅이 끝난 후 일어서기 전에 지갑 안에 넣는다. 그리고 또다시 똑딱. 지갑이 열리고 닫히는 똑딱 소리를 배경으로 상대방 일꾼에게 눈을 맞추고 마음속으로 이야기한다. ‘저를 다시 찾아주세요.’ 일꾼의 일도 결국 사람 간의 일이기에 일꾼이 처음 만나 느낀 인상은 일을 하면서 줄곧 영향을 미친다. 일단 형성된 인상은 바꾸기도 참 쉽지 않다. 이렇게 보면 일꾼의 첫인상에 영향을 미치는 명함 교환 타임에 템빨의 힘을 얻는 것도 자본주의 일꾼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비닐봉지에 싸인 것보다 예쁜 상자에 담긴 물건이 더 있어 보이는 것처럼 브랜드 명함지갑은 내 명함을 더 가치 있게 만드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번에는 샤넬 지갑에 도전해봐야겠다. 역시 가보지 않고는 논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씀에는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