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카 수집가 백중길 금호클래식카 회장
올드카를 모으는 끝판왕이 나타났다. 백중길 금호클래식카 회장의 얘기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그의 수집은 반세기가 가까운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어느덧 모은 차량 대수만 해도 600여 대. 그동안 수해와 관리의 어려움으로 수백 대를 버리고도 남은 수다. 경기도 여주의 금호클래식카에서 올드카 컬렉터 백 회장을 만나봤다.“이건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백중길 금호클래식카 회장은 자신을 “올드카에 미쳤다”고 말했다.
“100~200대까지는 그렇게 미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200대가 넘어가니 그때부터 미치기 시작하는 거야. 어느 정도였냐면 집에 비가 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고칠 돈이 없었어요. 집 고칠 돈 있으면 차를 샀죠.”
그는 전국의 정비공장을 수소문해 자동차를 구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오래된 차를 구한다며 돌아다니니 어느새 정비 업계에서는 그가 올드카 수집가로 이름이 났다.
처음에는 그의 이런 수집벽에 대해 아내와 가족들도 만류했다. 하지만 그의 컬렉션들을 하나 둘 모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의 아내도 이제 그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국내에서 제일가는 올드카 수집가라고 인정해주게 된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차를 많이 모으게 됐을까. 원래 자동차부품업을 하던 그는 자신이 정비하던 차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을 깨닫게 됐다. 차가 많은 시기도 아니었던 당시 시발차가, 포니가 도로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갔던 것이다.
“차가 낡고 노후해지면서, 또 새로운 차들이 나오면서 차들이 폐차되고 버려지는 거예요. 누군가는 이것들을 모으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차는 결국 우리나라 산업의 역사이기 때문이죠. 처음에 포니 시리즈를 모으고, 시발차를 모았어요. 미군들이 타다가 버린 것들을 주워다가 정비하고 복원해 다시 굴러가게 한 것이죠. 드럼통을 펴서 바닥을 대고, 일본에서 수입된 철판으로 차 지붕을 만드는 식이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라고 꼽히는 시발차는 1955년 미군의 지프차를 불하받아 개조해 판매한 것이다. 시발차는 인천 부평에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공장이 들어서고 자취를 감췄다. 이후 포니는 한참 뒤 현대에서 내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이다. 주요 부품과 기술은 외국 것이지만 설계와 디자인은 독자적으로 했다는 측면에서 최초의 국산차로 꼽힌다.
국산차를 위주로 모으던 그는 기술력이 약했던 국산차는 4~5년만 지나도 문짝이 떨어지거나 칠이 벗겨지는 등 수집하고 관리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벤츠와 포드 등 수입자동차를 위주로 사들였다. 그러던 그가 다시 국산차를 위주로 수집한 데에는 그만의 수집 원칙 때문이었다.
“해외 자동차는 수집하는 데 큰 의미가 없게 느껴졌어요.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타고 굴렸던 차들을 수집하는 게 역사적으로도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우리 자동차를 수집하고, 복원과 정비에 더욱 공을 들이게 됐어요.”
자동차를 복원하는 것은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일단 부품이 없는 것들이 많아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많은 거죠. 다행히 해외 시장에는 클래식카가 활성화돼 있어 해외에서 부품을 조달해 쓸 때가 많습니다. 그마저도 없는 거라면 부품을 새롭게 만들거나 차를 개조해 부품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죠. 이러다 보니 차 수리에 따르는 비용이 차값만큼 들 때가 많아요. 그럼에도 제가 수집한 차들은 원칙적으로 모두 다 운행이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모두 운행이 가능하도록 관리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그는 한 가지 제안을 받게 된다. 홍콩의 한 영화사로부터 올드카 한 대를 판매해달라는 것이었다. 꽤 좋은 가격을 받고 자동차를 매매했지만 이후 차량 매매는 다시 하지 않았다. 모은 수집품을 쉬이 팔지 않겠다는 수집가의 철학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국내의 한 방송사로부터 시대극에 쓰일 차를 대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혹여 애지중지 관리해 온 차들이 망가질까 봐 고사했다. 하지만 방송국 역시 끈질겼다. 그를 방송국에 초청해 견학시켜주고, 우리나라 드라마도 제대로 된 고증으로 그 시대의 자동차가 방송돼야 하지 않겠냐고 그를 설득했다.
고민 끝에 그는 그가 가진 자동차 몇 대를 처음으로 드라마 촬영에 대여해줬다. 받은 대여비보다 정비 등 작업에 들어간 돈이 더욱 많았다. 자동차 한 대를 빌려줘도 운행할 사람, 정비할 사람 등 일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송에 시대에 맞는 자동차가 나오니 그의 마음도 흡족했다.
그 이후 그가 수집한 자동차에 대한 대여 문의는 쇄도했다. 방송국, 영화 할 것 없이 그의 자동차를 빌려달라는 것었다. 그는 이 일이 숙명과도 같게 느껴졌다. <제5공화국>을 비롯해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야인시대> 등의 시대극 드라마에, <살인의 추억>,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택시운전사> 등 굵직한 영화에 그의 자동차가 쓰였다. 그의 자동차가 없었다면 촬영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 그는 아예 지금의 여주 부지에 촬영을 위한 세트장을 지었다. 관리가 까다로운 자동차를 장거리로 실어나르기보다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최근에는 영화 <택시운전사>에 제 수집품인 브리사 택시가 쓰였어요. 바로 이게 송강호 씨가 직접 몰던 택시죠.”
향수를 자아내는 초록색 브리사 택시는 외형은 물론 내부까지 완벽하게 복원돼 있었다. 당시의 요금과 화폐가치에 따른 미터기 요금표며, 커다랗고 가는 자동차 핸들, 각진 실내장식 등. 그는 자신이 수집해 복원한 차들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볼 때 남다른 뿌듯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그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은 우리나라 자동차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다.
100여 년 전, 처음으로 시발차와 같이 양철을 두드려 만든 조악한 자동차나 생산하던 것에서 또 그마저도 우리 기술이 아닌 일본의 기술을 들여와 제작했던 것에서 우리나라 기업이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전 전쟁을 3번이나 경험한 사람이에요.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6·25(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 파병까지요. 철판을 두드려 만든 차를 타던 것에서 이제는 우리의 기술이 세계적으로도 앞서나가는 것을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포니는 백 회장이 모은 자동차 중에서도 특히 의미가 깊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차보다는 뒤처졌지만 시발차는 엄밀히 말해 중고차를 개조한 것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기술과 디자인으로 생산된 차가 바로 포니이기 때문이다. 포니는 시리즈별로 모두 가지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였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자 그는 “포니에서 찍자”고 제안했다.
“일본에서 수입해 오기만 했던 우리나라 자동차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게 바로 포니에서부터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니 포니는 제게 남다른 자동차일 수밖에 없죠.” 다음은 백 회장과의 일문일답.
600대나 수집한 덕후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자동차는 무엇입니까.
“수집가로서 그냥 무턱대고 자동차를 모으지는 않아요. 포니 시리즈를 모은 것처럼 역사성이 있는 자동차를 수집한다든가, 누가 탔던 자동차인지 등 스토리가 있는 것들을 위주로 모으죠. 그런 이야기를 담은 차 중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이 탄 최초의 리무진인 캐딜락리무진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탔던 자동차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68년 캐딜락리무진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때 탔던 차입니다. 이 차를 갖기 위한 과정도 쉽지 않았어요. 외무부를 통해서 차량들이 불하받았는데 자동차를 수집하는 데에 따른 세금도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어요. 저는 국회에서 차가 나올 때는 세금 문제 때문에 못 샀다가 다른 분이 결국 세금 때문에 되파시는 것을 구한 거죠. 수집에는 운도 따라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 밖에 윤보선 대통령이 탄 차나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던 차도 다 소중한 제 수집품들이죠.”
문화재에 등록된 수집품도 있으시다고요.
“국내 최초인 1975년산 포니1, 기아자동차의 삼륜용달차, 1930년대 소방차, 신진자동차의 경차인 퍼블릭카 이렇게 4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총 7대가 등록문화재로 선정됐는데 그중 제 차가 4대 선정됐어요. 욕심 같아서는 더 많은 차들이 선정되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죠. 모두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는 제품들입니다. 그중 기아자동차의 삼륜용달차는 현재 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죠.”
자동차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오랜 꿈이라고 하셨는데요.
“아무래도 역사성이 있는 우리 자동차를 이렇게 창고에만 박아두기 아깝잖아요. 박물관에 전시해서 근·현대의 산업 유물을 보면서 학생들은 학습자료로 쓸 수 있고, 기성세대들은 향수를 일으킬 수 있거든요. 우리나라가 단시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을 체감할 수 있는 지표가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이 팔라고 해도 판매하지 않고 모은 거예요. 원래 이 여주 부지가 자동차 박물관을 위해 사들인 땅이었어요. 박물관 건립을 위해서 미국 디트로이트에 갔을 때 포드박물관을 2번이나 보고 왔거든요. 거기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어요. 부지도 더욱 넓어야 하고요. 분명 개인이 할 일은 아니지만 생전에 이 꿈은 꼭 이루고 싶습니다.”
글 문혜원 객원기자 | 사진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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