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의 온기> 윤고은 작가

수많은 변수와 오류로 가득 찬 게 삶이라지만, 그 빈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산문집 <빈틈의 온기>에도 사랑스러운 빈틈이 가득하다. 그 유쾌하면서도 엉뚱한 실수담을 읽다 보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다. 그녀가 보여주는 빈틈은 어느새 마음을 데워주는 덤덤한 위로가 된다.
윤고은 “가끔 자신의 빈틈을 끌어안아 보세요”
윤고은 작가는 <1인용 식탁>,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밤의 여행자들> 등 기발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최근 영미권 국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데 이어, 얼마 전에는 영국추리작가협회(CWA) ‘대거상(Gold Dagger Awards)’ 번역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 윤 작가가 산문집 <빈틈의 온기>을 출간했다. 데뷔 18년 만의 첫 산문집이다. 라디오 프로그램 <윤고은의 EBS 북카페> DJ로 활동하며 하루 4시간씩 반복했던 지하철 출퇴근 경험이 좋은 재료가 됐다. 그녀가 생각하는 일상 속 빈틈은 어떤 의미일까. 윤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산문집 <빈틈의 온기>가 얼마 전 출간됐습니다. 우선 출간 소감 부탁드립니다.
사실 산문집을 쓰는 동안 굉장히 고민스러웠어요. 나의 소소한 일상을 과연 책으로 낼 가치가 있는지, 공명할 부분이 있는 건지 고민스러운 마음에 주저가 됐죠. 소설을 쓸 때는 전혀 하지 않았던 고민들을 하게 되더라고요. 10년 후에 이 책을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검열하게 된 것도 있고요. 아무래도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내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이다 보니 이 책이 제 손을 떠나기 전까지는 쑥스럽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책을 내고 나니 최대한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요. 이 산문집을 읽은 분들께 넉살 좋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을 느끼고 있죠.

등단 이후 18년만의 첫 산문집인데, 소설이 아닌 산문집을 내기로 결정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라디오 DJ를 하며 3~4시간의 출퇴근을 하게 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됐어요. 지하철을 타며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한 것들이 모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라디오를 하니 사람이 굉장히 수다스러워지는 거예요. 입이 트였다고 해야 할까요. 일상적인 내용도 쓸 수 있도록 라디오가 예열을 해줬던 것 같아요. 아마 라디오가 아니었으면 지금 산문집을 내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요.

라디오를 통해 어떤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래 라디오 듣는 걸 좋아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세계를 정반대 방향에서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궁금했던 세계를 그 내부에서 보는 경험이 재미있었어요. 제일 많이 얻은 건 ‘꾸준함’ 같아요. 성실은 저와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늘 게으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며 살았는데, 라디오 때문에 1년 반에서 2년 가까이 짧지 않은 거리를 출퇴근하게 됐죠.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출퇴근 시간이 긴 라디오 DJ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동차도 아닌 지하철로, 하필 코로나 시대에 말이죠. 저는 이 시간이 재미있는 실험처럼 느껴져요. 제 인생에서 이런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윤고은 “가끔 자신의 빈틈을 끌어안아 보세요”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소설 쓸 때는 어차피 허구이기 때문에 약간 취한 듯이 쓰기도 하거든요. 마치 가상세계의 안내자 혹은 제작자가 된 느낌이에요. 제가 만드는 이야기지만 끝이 어떨지를 예상할 수 없어서 저 또한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쓰죠. 반면 에세이는 ‘어떤 부분을 어떻게 떼어서 책 속 페이지로 넣을까’라는 고민은 있지만, 일단은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차이점이 있는 것 같아요.

에세이의 소재는 어떻게 떠올리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일기를 쓰진 않아요. 다만 일상에서 뭔가 ‘반짝’하는 신호를 주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매일 메모해요.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신호를 받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제가 어디에 꽂히는지는 알 것 같아요. 약간 이질적이고,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이 재밌죠. 특히 저는 ‘말’에 굉장히 많은 자극을 받아요. 누군가 실제로 한 말인데 그 내용을 그대로 작품에 쓰게 되면 소설이라고 해도 허락은 받고요. 에세이에도 허락받아 넣은 내용이 있어요.

에세이 내용 중 “오류와 실수, 착오와 오작동이 내포한 우연성이 나를 설레게 하고 그 헛발질을 기록하게 한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패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은 크지 않은 편이신가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겁이 엄청 많거든요. 굉장히 낙천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지만, 그런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닌 거죠.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을 할 때는 굉장히 과감한 점도 있는데, 또 엄청나게 안전주의자이기도 해요.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 같아요.

사실 말씀하신 그 문장은 끝까지 뺄까 말까 고민하다가 넣었어요. 마치 교훈을 주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제가 굉장히 믿는 말이기도 해요. 실수나 오류 같은 것들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에요. 의도치 않게 헤매거나 착각하는 것은 굳이 가볼 필요가 없었던 자리잖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기억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사랑스럽게 느껴지죠.

가끔은 내 빈틈을 스스로 끌어안고, 관대하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때는 빈틈이라고 믿었던 게 결국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죠. 결과적으로 ‘내가 그때 그 빈틈이 없었으면 지금의 이 삶을, 이 행복한 오후를 느끼지 못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거든요.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을 잘하지 못했어도 완전히 백해무익한 것은 아닌 것처럼요.

<빈틈의 온기>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빈틈을 무조건 실수라고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지하철 열차 칸과 칸 사이에 연결되는 구간이 있잖아요. ‘내 삶이 왜 안풀릴까’라는 생각이 들 때, 열차 다음 칸으로 건너가는 그 연결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어요. 인생이 빽빽하게 연결된 시간들로만 이뤄진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삶을 조금은 즐길 수 있는 마음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망하는 기쁨’도 있잖아요. 만약 자주 망한다면 내 열차 모양은 연결구간이 좀 많다고 생각하고요. 자조적인 농담이지만 내 삶을 그렇게 생각해보면 재밌어지는 것 같아요.
윤고은 “가끔 자신의 빈틈을 끌어안아 보세요”
평소 작가님의 창작 루틴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평소에 메모를 굉장히 자주 해요. 라디오 DJ를 할 때 노래가 나가는 동안 영감이 떠오르면 갑자기 소설 줄거리를 쓰기도 하고요. 이런 것들은 훈련이 된 것 같아요. 누군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일상에서 벌어지는 자극들이 꼭 지금 쓰는 소설이 아니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휴대전화로 기록해요. 글은 집이나 카페에서 써요.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집에서 주로 쓰는데, 서쪽 창문으로 해가 지는 그 시간대가 너무 좋아서 제 방에서 작업하는 걸 좋아해요. 소설은 라디오 때문에 주로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 작업하고요.

영국추리작가협회 ‘대거상’ 숏리스트에 <밤의 여행자들>이 올랐다는 반가운 소식도 접했습니다.
네, <밤의 여행자들>이 대거상 번역서 부문 최종 여섯 작품 중 하나로 올라가게 됐어요. 7월 1일에 줌(Zoom) 온라인 시상식으로 최종 결과가 발표되는데요. 현지 출판사에서 저도 참석해달라고 하는데, 문제는 시상식 시간이 한국 시간으로 새벽 3시 30분이더라고요. 그래서 한밤중에 줌을 켜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웃음) 최종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영국 출판사와 관계자들은 너무 좋아하죠. 저로서는 뜻밖의 일이거든요. 마치 ‘덤’ 같은 일이죠. 대거상의 리스트를 쭉 보니까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도 많이 타셨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추리문학을 많이 읽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밤의 여행자들>이 제가 예측하지 못했던 범죄 스릴러물로 해석됐다는 것도 재밌더라고요.

최근 영미권에서 윤 작가님 작품이 많이 거론되는데, 작품의 어떤 점이 이런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좋아하는 방식은 블랙유머인데요. 씁쓸한 상황을 풍자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농담이라고 하기엔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는 거죠. 무게감 있는 이야기를 툭툭 던지는 화법이 아마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아닐까 생각해요.

또 <밤의 여행자들>은 지난해 여름에 번역 출간됐는데요. 공교롭게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에 처음 맞이하는 여름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다른 방식으로 보내야 했고요. 그 시기에 재난 여행지로 여행을 가는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느껴진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19 시대에 독자 입장에서 소설과 공명하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20대 초에 등단해 긴 시간 동안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번아웃이나 창작의 고갈을 느낀 적은 없으신가요.
사실 저는 아직 정체기가 온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스물네 살에 등단을 하긴 했지만, 이후 4년 동안은 지역신문 기자, 과외 등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면서 글을 못 썼어요. 그때는 안 쓴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못 쓴 거죠. 그러다 글을 쓸 때의 모습이 가장 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 번 글을 써봤던 사람은 글을 써야만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결핍이 있거든요. 내 세계를 만들고 싶은 결핍. 결국 1년 정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난 뒤 낸 책이 <무중력증후군>(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었어요.

‘글을 쓰지 않을 때의 내가 어떨까’라는 것을 이미 체감해버렸기 때문에 첫 책을 낸 이후 14년간은 흥미가 떨어지는 순간을 겪지 못했어요. 소설을 쓰기 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은 있지만, 소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의심 없이 존재했던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하든 돌아와서 쉴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소설이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 형식을 빌어서 말하는 게 제일 재밌고요.

향후 작품 계획도 궁금한데요.
두 달 후에 <도서관 런웨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나와요. 결혼이 보험 제도의 영역에 들어가는 이야기인데요. 지금은 결혼이 선택이잖아요. 자신의 삶에 결혼이 있을지 없을지 본인도 잘 모르는 거고요. 그래서 결혼보험 상품에 가입하면 결혼했을 때 보장되는 영역이 있고, 상품 가입 기간 동안 결혼을 1회도 안 한다면 만기환급금을 받을 수 있다는 설정이죠. 만기 20년이거든요.(웃음) 제가 요즘 머리가 좀 아파요. 경제 프로그램 DJ에게 자문을 받을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글 정초원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