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진 작가, <관리자들>

2016년 장편소설 <누운배>로 등단한 이혁진 작가는 계급사회와 그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인물의 다층적 욕망을 그려냈다. <관리자들> 역시 이해관계가 얽힌 부도덕함에 대해
각각의 선택을 한 이들의 모습을 그리며, ‘책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관리자들, 이혁진 지음, 민음사, 2021년 9월
'관리자들, 이혁진 지음, 민음사, 2021년 9월
배운 것을 활용하며 살고 싶다. 학교에서 배운 것, 공부하면서 익힌 것들을 삶에 그대로 적용해 우아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내 삶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흘러간다. 그야말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 돼버렸다. 이럴 때 나에게 하소연하던 고객이 생각난다. 이사 때문에 폴딩박스를 구매한 고객이었는데, 고객 정보를 확인하기도 전에 “내가 박스와 뚜껑을 구분도 못하는 바보로 보여요? 당장 내일이 이사인데 뚜껑만 보내면 어쩌란 말이에요! 누가 이 가격에 뚜껑만 보내냐고요”라며 화를 냈다. 알고 보니 고객 실수로 뚜껑만 구매한 게 맞았고, 나는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나서까지 이 사람에게 영혼 없이 “네”라고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리자 통화로 넘어가긴 했지만, 나도 언젠가는 저 민원인처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왜 비싼 돈 주고 학교에 다녔을까 생각한다. 학교 다닐 땐 대학을 가기 위해서, 대학에서는 제 역할을 다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모든 것은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좋은 결과가 아니더라도 나름 열심히 했다. 언젠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사회는 학교처럼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성과가 바로 나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더 좋은 성과를 내려고 하는 찰나에는 일이 어그러지기도 한다. 가끔 사회는 잘 해보려는 사람에게는 가혹한 공간이다.

<관리자들> 속 인물 선길이 그랬다. 선길은 20년간 회계팀장으로 지내다가 소아암을 발견한 아들을 지키려 고군분투한다. 하나뿐인 아이를 지키려다 잘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를 선택하고, 경력직으로도 어딘가에 소속될 수 없어 도로 옆의 터를 매립하는 건설 현장으로 간다. 유난히 현장에 적응하지 못한 선길은 모두가 퇴근한 시각 멧돼지를 잡기 위해 출근한다. 아이의 수술이 잘 끝나고, 멧돼지 일도 해결되고, 현장에서도 선길의 이미지가 개선되자 사고가 났다. 이 사고는 현장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럭저럭 굴러가던 현장의 온갖 병폐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그 모든 책임이 선길에게 향한다.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46~47쪽)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할 사람은 인부가 아니라 관리자였다. 다음 공사가 있어야 인부들도 살 수 있고, 인부들의 가족, 자신들의 가족까지 살 수 있었다. 어차피 선길은 그곳에 없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현장소장은 일머리는 없어도 계산이 빠른 사람이고, 사람을 적당히 부릴 줄 알았다. 약간의 돈을 쥐어주고, 관청에는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도 소장은 “이게 또 제 실수, 아니 잘못이에요. 반장까지 시켜주겠다고 했더니 기고만장해졌던 겁니다. 싫다는 사람들까지 자기 이제 반장될 거니까 와서 같이 마시자, 마셔라, 그렇게 된 거더라고요, 글쎄. 제가 다 잘못한 겁니다. 현장소장이면 사람 보는 눈부터 있어야 하는 건데, 나이도 먹고 이 현장, 저 현장 다 굴러봐서 알 만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 발등을 제가 찍었습니다. 제가 그랬어요.”(121쪽)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소장의 말과 행동들은 선길은 구제불능 인간으로 만들었고, 사고는 흔하고 뻔한 게 됐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마저 이것이 최선이라며 합리화했다. 그렇게 선길은 ‘개죽음’(106쪽)이 됐다.

“인생이란 단지 비용의 문제였다. 전기비, 수도비부터 세금, 교육비, 생활비까지 온갖 비용이 들어갔고 더 많은 비용이 들수록 더 가치 있고 한번 살아볼 만한 인생처럼 보이니까. 그러니 모두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이 청구하는 비용에,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는 노예운반선에.”(125쪽)

작가 이혁진은 2016년 장편소설 <누운배>로 21회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후속작 <사랑의 이해>까지 회사로 대표되는 계급사회와 그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다층적 욕망을 그려냈다. 이번 작품 <관리자들> 역시 공사장 속에서, 대등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이해관계에 얽혀 부도덕함을 목격하고도 각자의 위치에서 선택을 한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안도를 하기도,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작가는 이들을 통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묻는다. 무조건 약자의 편에 서라고 하지도 않는다. 허울 좋은 거짓말에 속는 반장들과 그들의 지휘에 따라가는 사람들. ‘비겁하다’고 해도, 쉽게 진실의 편에 서기 어려운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21세기 인재상에는 ‘인성’이 포함돼 있다. 이를 위해서는 바른 가치관이 형성돼야 하는데, 바른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거짓말부터 배운다. 그 거짓말은 누구에게 배운 걸까? ‘책임은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것’,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도 별 타격 없는 기업들을 보면서 2022년은 ‘책임’이란 단어를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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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서윤 독서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