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세계 경제는 2010년대에 비해 환경 면에서는 ‘뉴노멀’에서 ‘뉴 앱노멀’로, 위험관리 면에서는 ‘불확실성’에서 ‘초불확실성’으로 한 단계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뉴 앱노멀·초불확실성 시대가 무서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빅 체인지, 즉 큰 변화’가 일어나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까지도 위상을 갑작스럽게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모든 세계인이 고통을 겪는 지난 2년 동안 세계 경제 질서는 ‘속이 꽉 찬 버거(solid burger)’가 아니라 ‘속이 빈 버거(nothing burger)’라는 점이 확인됐다. 외형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주도해 온 국제기구와 국제규범이 남아 있더라도 실질적인 역할과 구속력은 더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을 채워줄 새로운 국제기구와 국제규범이 태동될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국제통화질서도 ‘시스템이 없는’ 지금의 체제가 더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러시아 등 사회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탈(脫)달러화 움직임이 빠르게 진전되는 가운데 유로화, 엔화 등 현존하는 통화가 달러화를 대체하기도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를 발행하는 것을 계기로 디지털 기축통화 자리를 놓고 미국과 중국 간 또 한 차례 환율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기가 발생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는 첫해부터 들이닥친 코로나19 사태로 2010년대보다 더 높아졌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중앙은행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비판을 들을 만큼 많이 풀린 돈으로 자산 거품이 심하게 끼얹는 데도 회수가 쉽지 않다. 초저금리로 부채도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종전과 다른 것은 중국과 미국의 금융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졌다는 점이 실제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차기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다음 세대’보다 ‘다음 선거’, ‘국민’보다 ‘자신의 자리’만을 생각하는 정치꾼(politician)이 정치가(statesman)보다 더 판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현대통화론자(MMT)의 주장처럼 돈을 더 풀고 빚을 더 내서 쓸 경우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대형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등과 같은 국제 경제기구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여건에서는 글로벌 초대형 위기로 발전될 수도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2020년대에 닥칠 것으로 예상했던 디스토피아 과제 가운데 가장 빨리 현실로 닥치고 있는 것이 ‘기후변화’다. 특히 2021년에는 ‘대(great)’가 붙어야 할 정도로 유난히 심했다. 북미 지역은 대폭염, 중남미 지역은 대가뭄, 아시아 지역은 대태풍, 유럽 지역은 대홍수, 아프리카 지역은 대사막화 등으로 전 세계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엄격히 따지면 코로나19 사태도 기후변화에 따른 디스토피아의 첫 사례로 분류된다.
기후변화는 세계 경제의 근본적인 틀(frame)을 흔들어 놓고 있다. 지금까지는 경제주체들이 지구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익을 추구하는 쪽에 초점을 맞춰 왔으나 그 과정에서 노출된 디스토피아가 이제는 인내할 수 있는 선을 넘음에 따라 지구를 보호하는 쪽으로 관심이 이동되고 있다. 기본 틀이 전환되는 과도기 단계에 있어서는 각종 병목(bottle neck)과 불일치(mismatch) 현상으로 새로운 현안들이 속속 대두되고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경기 침체에도 물가 상승
세계 경제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점이다. 원유, 희토류, 면화 등 국제 원자재뿐만 아니라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부품에 이르기까지 각국이 무기화할 조짐을 보임에 따라 ‘공급 쥐어짜기 충격(3S: Supply, Squeeze, Shock)’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나올 만큼 세계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 GVC)이 무너지고 공급난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경기가 침체되고 물가가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국민 경제 입장에서는 소득이 줄어드는 가운데 물가가 오름에 따라 경제고통지수가 급격히 높아지는 점이다. 지표경기와 체감경기가 더 빠르게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책 대응 면에서는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총수요를 늘리면 물가가 앙등하고 물가를 잡기 위해 총수요를 줄이면 경기가 더 침체되는 악순환 국면에 처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정책 수단을 다 소진한 여건에서는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처음 나타났었던 1980년대 초와 다른 것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콘택트화로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케이(K)’자형 양극화 구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빅테크’로 상징되는 디지털 콘택트 기업은 ‘횡재 효과’와 ‘상흔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나 소득 계층별로는 중산층이 무너져 중하위 계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최근 들어 ‘공유경제’ 논의가 급진전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콘택트 산업 발전으로 발생하는 ‘횡재 효과’와 ‘상흔 효과’는 자신의 능력과 결부되지 않은 면도 많아 경제 게임 결과를 인정하고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많다. 능력 이상 얻은 것은 거둬서 능력과 관계없이 피해를 입은 경제주체에게 배분해주는 과정에서 공유경제가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공유경제를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모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이 준(準)공공재 성격을 띠고 있어 ‘국가와 민간’, ‘계획과 시장’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간, 계획과 시장이 함께 풀어 가는 혼합경제 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도 ‘제3의 길’이 모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초불확실성의 시대, 한국 경제는
문제는 한국 경제다. 어떤 변화에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원더링(wandering)’, 즉 방황의 시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선책인 뉴 앱노멀·초불확실성 시대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빅 체인지를 주도하지 못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다가가 두드려야 차선책이라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미국과 중국 간 경제패권 다툼 과정에서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다. 투키디데스 함정은 신흥 강대국이 급부상하면서 기존 강대국이 느끼는 두려움으로 전쟁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을 말한다. 기원전 5세기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27년 동안 치렀던 펠로폰네스 전쟁을 다룬 투키디데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용어다. 2015년 9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이 언급한 이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은 이미 이 함정에 빠져 경제패권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시각도 많다. 도널드 트럼프 전 정부는 출범 초부터 추구했던 달러 약세에 맞서 시진핑 정부가 위안화 약세로 맞대응하는 과정에서 ‘환율전쟁’ 위기에 몰리다가 ‘관세전쟁’으로 한 단계 높아졌다. 미국 바이든 정부 들어서는 미래 기술 산업 주도권을 놓고 ‘첨단 기술 전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제3차 세계대전을 경고할 정도다.
한반도는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져 운명이 크게 엇갈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세기 이후 일본이 급부상함에 따라 당시 강대국이었던 중국(청·일 전쟁), 러시아(러·일 전쟁), 미국(태평양 전쟁)과 전쟁을 잇달아 치르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비극이 태어났다.
국제관계는 냉혹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에 미국, 중국, 북한이 전략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금보다 더 복잡한 ‘수(數)’ 싸움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중재자 역할’이다. 이 역할을 잘한다면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반면, 잘 수행하지 못한다면 의외로 큰 시련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졌다”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급변하는 세계 흐름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중간자 위치에 놓여 있는 한국 경제 입장에서는 특정 가치와 이념에만 편중된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차기 정부는 세계 속에 한국 경제가 가야 할 방향부터 잡아야 한다.
2022년 한국 경제의 방향을 결정할 또 하나의 변수가 ‘국가채무 논쟁’이다. 현 정부 들어 재정지출이 가뜩이나 많은 상황에서 차기 정부 들어 새로운 정책 추진 등에 따라 재정지출이 늘어날 경우 국가가 부도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 신흥국에서 이러한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특정 국가가 부도날 가능성은 국민소득 대비 국가채무 비율로 판정한다. 선진국은 100%, 신흥국은 70%를 넘지 않으면 재정이 건전한 국가로 분류된다. 최근 들어서는 같은 선진국과 신흥국에 속했다 하더라도 국가별로 차별화가 심해 판정 기준을 좀 더 세분화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국가채무는 소속기관과 부채의 성격에 따라 세 가지 개념으로 구분된다. 협의 개념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갖고 있는 현시적 채무다. 광의 개념은 협의 개념에다 공기업이 갖고 있는 현시적 채무가 더해진다. 최광의 개념은 광의 개념에다 준정부 기관까지 포함되고 모든 기관의 현시적 채무뿐만 아니라 묵시적 채무까지 포함된다.
세 가지 개념대로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을 따져보면 협의 개념으로는 45%, 광의 개념은 73%, 최광의 개념으로는 145% 내외로 추정된다. 선진국과 달리 한국의 경우 세 가지 개념별로 국가채무 비율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이 지나치게 많고 국가채무 관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속해 있는 신흥국의 위험 수준이 70%인 점을 감안하면 협의 개념을 적용하면 ‘재정 건전국’, 광의 개념으로는 ‘위험 경고국’, 최광위 개념으로는 ‘국가부도 우려국’으로 분류된다. 한국의 대외 위상이 선진국과 신흥국의 중간에 놓여 있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신흥국처럼 ‘국가채무 위험 수준 70% 룰’을 적용받아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도 있다.
국제적으로 재정 건전성 분류 기준은 ‘협의 개념’으로 삼는다. 우리 내부적으로 국가채무 논쟁이 불 때마다 ‘한국의 재정이 건전하다’는 국제 평가와 함께 수면 아래로 잠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세계 3대 평가사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과 전망을 유지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재정이 건전하다면 현대통화론자의 주장처럼 “빚을 내 더 써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부채의 화폐화’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근거이기도 하다. 국가채무는 평상시에는 협의 개념이 적용되다가 위급하면 최광의 개념이 부각될 때가 많다. 신정부에서는 이런 점을 중시해 부채 화폐화 논의와 국가채무 논쟁을 근본적으로 해소시켜야 한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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