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플러스/ 트레블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괴롭히게 된다.” 최근 읽은 글 중에서 유독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문구다. “외로움을 이겨내야만 비로소 고독을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말도 가슴에 와 박혔다. 혼자만의 여행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해봐야 한다. 새로운 해를 맞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말이 실감 난다. 더 늦기 전에, 제발 그만 괴롭히라는 말을 듣기 전에 외롭지 않도록 연습을 해야겠다.
가끔은 혼자 떠나도 괜찮아
폭설 예보
눈 소식이다. 충청도, 전라도 해안과 일부 내륙지방에 폭설이 온단다. 며칠 전 기사를 떠올렸다. 보령과 원산도 사이에 해저터널이 완공됐다는 내용이다. 이미 원산도와 안면도를 잇는 다리가 놓여 있으니 매력적인 여행 코스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차 트렁크에는 텐트와 매트, 침낭, 간단한 취사도구가 실려 있다. 생존을 위한 장비는 결코 아니다. 좀 더 신선하고 자유로울 기회가 찾아왔을 때 능동적으로 즐기기 위해 마련한 소박한 준비물이다. 운전할 때는 음악을 듣는다. 유튜브뮤직 알고리즘이 취향에 맞는 음악을 선곡해준다. 처음 듣는 노래도 이따금 섞이지만, 귀를 쫑긋 세우며 끝까지 듣든지 아니면 패스하든지 내 맘에 달렸다.

맘껏 따라 부르고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덧 안면도로 들어섰다. 참으로 낯익은 이름이다. 첫 번째 가족여행 이후 10번도 더 왔을 것이다. 예전에는 안면도가 목적지이고 끝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시크하게 지나쳐 간다.
가끔은 혼자 떠나도 괜찮아
아직은 섬이다
2019년 12월 안면도와의 사이에 ‘원산안면대교’(1.75km)가 놓이면서 원산도는 배를 타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섬 아닌 섬이 됐다. 목 좋은 곳에는 대형 카페와 펜션이 생겨나고 리조트도 건설 중이다. 한가롭던 원산도, 오봉산, 사창해수욕장에 캠핑장과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면서 주말이면 인파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2021년 12월 보령과 원산도를 잇는 총 길이 6927m, 세계에서 다섯 번째, 국내에서는 최장의 보령 해저터널이 개통됐으니, 섬은 이미 유명 관광지의 반열에 오른 듯하다. 원산도해수욕장을 찾았다. 깨끗하게 단장된 모습이 좋았다. 평일이고 추운 날이었지만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원산도해수욕장은 백사장의 규모가 월등히 크고 송림이 울창해 오래전부터 섬의 대표 휴양지로 사랑받아 왔다.

최근 주차장이 정비되더니 먹거리 포장마차가 들어서고 특산물시장도 열린다. 섬에서 하루를 머문다면 추천하고 싶은 곳은 오히려 오봉산해수욕장이다. 섬의 서쪽 끝에 있는 해변은 오봉산을 비롯, 안산과 증봉산으로 둘러싸여 매우 아늑하다. 주변에 펜션을 비롯해 민박과 상가 촌이 있으며 백사장이 상가 앞까지 이어질 정도로 모래가 풍부하고 바다 풍광 또한 뛰어나다.

섬이 육지와 연결되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여행자는 그런 환경에 맞춰 슬기롭게 여행하면 된다. 섬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 정서마저 한꺼번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섬을 지켜온 주민들의 일상, 물이 빠지면 끝없이 드러나는 청정 갯벌, 그리고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 여전히 섬이라 부르게 되는 귀한 자산이 남아 있다.

해저터널을 통과해서 보령으로 빠져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예상되는 폭설에 맞서느냐, 아니면 피해 가느냐 하는 선택의 순간이다. 차를 세우고 날씨 애플리케이션을 살폈다. 서천은 많은 눈이 내릴 것으로 예상되는 비교적 가까운 지역이다. 일단 대천항 수산물시장에 가서 요즘 한창인 새조개를 1kg 샀다. kg당 2만 원이다. 서비스로 가리비와 백합도 몇 알 얻었다. 그리고 마트에 들러 정종을 한 병 샀다.
가끔은 혼자 떠나도 괜찮아
설경과 새조개 샤브샤브
예상대로 희리산자연휴양림 야영장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지만 산중이라 바람은 잔잔했다.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티피텐트의 문을 열어놓고 침낭에 들어가 누었다. 체온이 침낭 안을 파고들자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스라이 날리는 눈의 궤적을 따라가다 스르륵 잠이 들었는지도. 달곰한 낮잠에 피곤함이 물러갔다.

이제 슬슬 요리를 만들어볼 차례다. 솜씨가 없을 땐 최대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끝내야 한다. 코펠에 물을 붓고 가리비와 백합을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육수에 짭조름한 맛이 들었을 때 일단 코펠을 내리고 정종을 데웠다. 그리고 다시 끓는 육수에 새조개를 한 점씩 투하하기 시작했다. 일명 새조개 샤브샤브, 뜨거운 정종으로 입안을 헹구고 새조개의 찰진 식감과 달큼한 맛을 영접하니 듣는 이가 없는데도 탄성이 절로 났다. 설경과 어우러진 진미, 탁월한 선택이었다.

취기가 오르면 감성이 돋고 다시 외로워진다.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카카오톡 창도 확인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도 해보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만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지나친 음주는 금물이다. 그래서 정종의 마개를 닫았다.
가끔은 혼자 떠나도 괜찮아
피톤치드 뿜뿜 희리산자연휴양림
1998년 개장한 희리산자연휴양림은 서천 장구만 해안에서 4km 떨어진 희리산 서쪽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숲 전체가 천연 해송으로 뒤덮여 있어 산림욕장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서천특화시장, 비인해수욕장, 마량포구 등 서천 명소들과 거리가 멀지 않아 여행의 베이스캠프로도 그만이다.

휴양림은 캠핑으로도 좋지만, 숙소에서의 하루도 특별하다. 각각 독립된 숲속의 집은 소나무, 잣나무, 낙엽송, 삼나무, 해송, 층층나무, 참나무 등 단일 수종으로 내부를 장식한 국내 유일의 시설로 나무가 가진 고유 향을 만끽할 수 있다.

휴양림에서 등산로를 이용해 희리산 정상을 찍고 돌아오는 데 약 3시간이 걸린다. 높이 329m의 낮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서해안에서 군산까지 시야가 뻗어난다.

휴양림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왔다. 고맙게도 취사장에 더운물이 나왔다. 설거지 하고 돌아오려는데 샤워장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벗고 씻고 다시 입는 과정이 귀찮게 느껴졌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세면도구를 챙겼다.
가끔은 혼자 떠나도 괜찮아
2인분 같은 해물칼국수가 8000원
일찌감치 일어나 텐트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기온이 떨어져 추위가 느껴졌다. 날씨가 개더니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배가 고팠지만, 야영장에서 아침까지 챙겨 먹으면 너무 지체될 것 같아 장비를 걷어 차에 넣고 휴양림을 빠져나왔다.

인터넷에 소개된 맛집 정보를 신뢰하는 편은 아니다. 간혹 실패도 하지만 경험과 감에 의존하면 스릴과 재미가 있다. 휴양림에서 비인해수욕장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비인해수욕장은 서천을 대표하는 휴양명소다. 오래전 여름 물 빠진 갯벌에서 맛을 잡았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서천 갯벌은 고창갯벌, 신안갯벌, 보성∽순천갯벌과 함께 ‘한국의 갯벌’이란 이름으로 2021년 여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기대했던 대로 비인해수욕장에는 해물칼국수를 하는 식당이 몇 곳 있었다. 칼국수를 즐겨 먹지는 않지만 모처럼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이 간절해졌다.

“혼자여?” 주인 할머니의 표정이 심드렁하다.

“네, 혼잔데요. 해물칼국수 주세요.”

대답이 없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혼자 여행하고 밥 먹기가 왜 이리 어려운 거야?’ 혼자서 구시렁대던 그 순간, 면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물이 수북이 쌓인 커다란 사발과 4분의 1포기쯤 되는 김장김치가 나왔다.


‘2인분인가?’

면발은 거칠었지만, 국물은 얼큰 시원했고 굴, 홍합, 새우, 바지락을 쏙쏙 다듬어 먹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바닷가 김치의 진수를 맛볼 수 있어 뿌듯했다. 배가 그득해진 대신 칼국수 사발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조심스레 다가가 “얼마예요?” 물었더니, “8000원” 역시 퉁명스럽다.

비로소 웃음이 났다. 그리고 무장해제 된 마음으로 한마디 남겼다.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식당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주인 할머니의 웃음을 봤다.
가끔은 혼자 떠나도 괜찮아
가끔은 혼자서
새조개를 혼자 먹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좋은 곳에 가거나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외로워지는 것이 조금은 속상하다. 색을 바꾼 하늘이 홍원항에 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봄에는 자연산 광어축제, 가을에는 전어축제가 열리는 이곳은 서천의 대표적 먹거리 명소다. 항구와 나란히 늘어선 가게에 앞에는 곰치, 아구, 갑오징어, 석화, 새조개, 백합, 소라, 가리비 등 각종 해산물이 놓였다.

바닷바람을 타고 날리는 눈보라에 상인들의 마음이 급해진 듯 가격도 내려가고 덤도 많아졌다. 새조개를 3kg 샀다. kg당 2만5000원이었지만 씨알도 굵고 무게도 넉넉하게 달아줘서 만족했다. 새조개는 전국 어디서나 공통으로 손질해준다.

마량리 동백숲은 홍원항에서 불과 3.km 정도 떨어져 있다. 수령 500년 된 동백나무 80여 그루가 군락을 이뤄 천연기념물(169호)로 지정돼 있다. 설경에 속에 피어난 빨간 동백꽃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동백숲을 걷고 내려와 이웃한 마량포구로 향했다.

평일 혼자 하는 여행은 때때로 쓸쓸하지만, 개척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익숙해지면 보람도 있고 내공도 생겨난다. 마량포구는 동백숲과 인접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 전래지이며, 일몰은 물론 일출까지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색다른 명소다.

하얀 세상 속, 독야청청 서 있는 노랑등대를 끝으로 여정을 마무리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겨울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어서 나름 행복했다. 지나고 나면 하얗게 떠오를 추억 하나를 만든 셈이다. 총총히 돌아가는 길, 식구들에게 새조개 먹일 생각을 하니 괜스레 흐뭇하다.

‘가끔은 혼자 떠나보는 것도 괜찮잖아?’



글·사진 김민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