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콘트라바쓰> 박상원 배우 인터뷰

평생 배우, 박상원이 모노드라마 연극 <콘트라바쓰>로 무대 위로 돌아왔다. 2020년 초연에 이어 다시 한 번 이 작품에 임하는 그의 단단한 각오와 바람, 그리고 연기를 향한 애정에 대해 두루두루 이야길 나눠봤다.
박상원 “40년 연기, 무대에 희망이 있으니까요”
‘덕업일치.’
인생의 마디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양자택일보다는 양자타협, 혹은 보완의 삶을 걸어가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자기가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직업으로 삼는 ‘덕업일치’의 삶을 많은 이들이 꿈꾸고 동경한다.

하지만 정작 덕업일치를 한다고 해도 모두가 행복하거나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흔히 사람들이 ‘원래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간직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실제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로 성공한 대가들의 삶은 대부분 그것을 이루기 위해 투자한 엄청난 시간과 열정, 그리고 혹독한 노력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40년 넘게 평생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박상원이 예나 지금이나 ‘덕업일치’의 삶이 가능했던 것도 그 세 가지 조건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듯 보였다. 연극 <콘트라바쓰>는 배우 박상원의 그 기나긴 인고의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응축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설 <향수>, <좀머씨 이야기>를 쓴 세계적인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 <콘트라바스>를 원작으로 한 1인극으로 거대한 오케스트라 안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콘트라베이스와 연주자의 삶에 빗대어 이 시대로부터 소외받는 모든 이들의 자화상을 그린다.

특히, 이 작품은 90분간 배우가 오롯이 혼자서 긴 대사는 물론, 무용과 악기 연주까지 소화해야 하는 만큼 배우의 역량이 절대적이다. 그 중압감을 이기고 2020년 초연에 이어 박상원은 다시 한 번 고독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무대에 섰다. 그가 말하는 작품의 참 의미와 매력, 그리고 배우로서의 ‘덕업일치’에 대해 들어봤다.
박상원 “40년 연기, 무대에 희망이 있으니까요”
우선 2020년 초연에 이어 올해 <콘트라바쓰>로 다시 돌아온 소외가 궁금합니다.
“음, 글쎄요. 왜 돌아왔을까? (웃음) 진짜 왜 돌아왔을까요? 사실 예상했던 것보다 재연이 빨리 돌아와서 좀 부담이 됐던 거 같아요. 단, 초연과 달리 변화해야겠다는 욕구가 컸고, 그만큼 채찍질도 많이 해서 공연 제작에 공을 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론 좋은 것 같아요.”

지난 시즌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주인공의 외모 설정도 변했고, 극이 좀 더 속도감도 붙은 거 같아요. 이번 시즌에 주안점을 둔 부분은.
“지난 시즌에서는 제가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거였다면 이번에는 관객들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끊임없이 상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편안하게 감상하시도록 초연보다 (대사를) 짧고, 간결하게 구성했어요. 여백만큼 관객의 상상이 더해져 자기만의 공감을 경험하시도록 배려했습니다.”

이 작품은 악기 연주, 연기, 무용 등 다양한 무대공연 요소가 묻어 있는 작품이에요. 혼자서 오롯이 해내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땀도 많이 흘리시더군요.
“연기자로서 내 몸에서 그렇게 다양하고 입체적인 기능들이 나온다는 게 우선은 감사한 일이죠. 다행이고, 행복했어요. 그리고 배우가 무대에서 땀이 난다는 것은 아마 이 세상에서 기분 좋은 땀이 아닐까 싶어요. 전 되레 무대에서 땀이 안 나면 오히려 짜증이 나요. (웃음) 카타르시스가 묻어나는 땀, 행복한 땀입니다.”
박상원 “40년 연기, 무대에 희망이 있으니까요”
혹독한 자기 관리가 뒷받침되셨을 것 같아요. 평소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가요. 암기 방법도 궁금합니다.
“사실 대사 암기는 노력이라는 표현보다는 배우에겐 일상적인 일이죠. 되레 저희가 이번 작품에서 정말 노력한 부분이라면, 대사 외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에 대한 것들이에요. 가령, 원작에서 남기거나 날려야 하는 대사를 선별하고, 의상과 무대 각도, 소품들을 결정하고 새로운 표현 방법을 위한 창조의 과정들이 진짜 힘들어요. 그런 것들에 비하면 배우가 대사를 외우는 건 정말 기본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지독하게 하면 할 수 있는 것이고요. 저 역시 지독하게 연습했어요.”

연습을 어느 정도 하셨어요.
“이번 시즌에는 두 달 정도 연습했어요. 첫 시즌 때 대본 한 권을 보름 내에 다 외웠어요. 매일마다 꼬박꼬박 2~3페이지씩 외웠죠. 2020년 8월 14일에 대본을 처음 받은 날, 동료들에게 ‘9월 1일부터 대본을 놓겠다’고 말하고 정확히 그 기간 내 외웠습니다.”
박상원 “40년 연기, 무대에 희망이 있으니까요”
작품은 거대한 오케스트라 안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의 삶을 통해 소외받는 이들의 자화상이 담겨 있는데, 공교롭게도 평생 주목받는 직업을 해오셨어요.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우린 누구나 다 본인이 자신을 돌아볼 때는 항상 루지(loosy)한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게도 당연히 있고요. 저는 항상 제 자신을 돌아볼 때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화려하게 메이크업을 마친 박상원의 모습은 기억하지 않는 편이에요. 되레 자다가 깨자마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얼굴을 가지고 배우 하겠나’ 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못하거나, 정말 별로일 때의 나를 기억하면서 ‘아, 이래선 안 되는데’라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편이에요.

오히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좀 편해진달까요. 예전부터 그랬어요. 과거 사람들이 저를 슈퍼스타라고 부를 때도 저는 늘 ‘아, 사람들이 이런 나를 좋아하는 만큼 더욱 정신차려야지’ 했어요. 이런 ‘위기의식’을 반려 감성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하죠. 그래선지 주인공의 감정을 이입하는 데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단, 초연에서는 최대한 박상원을 지우려고 노력했죠. 오케스트라 내 가장 끝줄의 남자를 표현하는데, 배우 박상원의 모습이 방해가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지난 시즌에는 수염이랑 머리도 기르고, 돋보기안경도 쓰면서 대중에게 각인된 박상원을 지우는 게 먼저였죠. 대신 이번 시즌에는 있는 그대로의 박상원으로 가기로 했어요. 지난번에는 좀 더 외형적으로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다면 이번에는 연극적이긴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핵심 가치, 본질에 더 가까워지도록 주력하기로 했어요. 기울어진 무대도 그런 노력 중 하나예요.”

주목받지 않기에 더욱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열정, 사랑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것 같아요. 본인 인생에서 콘트라베이스는 역시 연기일까요. 40년 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궁극의 원천이 궁금해요.
“아마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겠죠. 사실 우린 덕업일치를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죠. 사람들이 대학 때 선택한 전공을 죽을 때까지 업으로 삼지 못하고 이 일에서 저 일로 옮기는 이유는 대개 그곳에서 희망을 못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 내가 과연 이 일을 계속했을 때 내가 생각하는 가치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으로 희망을 잃고, 또 다른 희망을 찾아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죠. 저도 그렇고 작품 속 주인공도 각자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만족해서가 아니라 결국 그 희망이란 가치를 버리지 않았기에 이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제 인생에서 ‘세라’는 아마도 무대 위에서 계속 남아 관객들을 만나는 것일 겁니다. 오랫동안 건강하게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한 우물만 파는 거예요. 이 땅을 깊게 파면 언젠가 물이 있다는 희망, 세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늘 있으니까요.”
박상원 “40년 연기, 무대에 희망이 있으니까요”
볼거리들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 더 열광하는 세상이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연극을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즘 모든 게 디지털화되고 있죠. 그 과정들을 보면 상당히 인위적이에요. 물론, 이런 시대적 흐름은 거스를 순 없다고 봐요. 다만, 그렇기에 아날로그의 소중함은 역으로 더욱 소중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연극이 대표적이죠. 물론, 디지털 세상이 가속될수록 연극 내 무대미술, 장치 등이 디지털화되고 있지만, 그걸 제외하고 남고, 남고, 남는 과정에서 무대 위 서 있는 배우의 모습은 아마도 더욱 특화된 영역일 거라고 봐요. 세상의 이치는 사용자들의 니즈와 열망에 따라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거든요.”

연기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아쉬움이 남는 배역이나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요.
“세상에는 77억 개의 배역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특별히 특정 역할에 욕심을 갖지 않아요. 그저 그중 내가 가장 비슷하게 잘할 수 있는 거를 하자는 편이에요. 그나마 이제는 좀 인생을 살아낸 사람의 역할들을 더 해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반면 아쉬웠던 배역이 있을 순 있겠지만 저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워낙 결과에는 큰 관심을 두는 타입이 아니거든요. 저는 그저 과정에 충실해요. 제 안의 에너지를 과정에 다 쓰려고 하고, 대체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되레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면 똑같이 박상원으로서 열심히 연기했는데 상대적으로 평가가 덜 되거나 관심을 받지 못한 작품이나 배역에 더 애착이 가는 편이에요.”

극에서 좋아하는 장면이나 대사가 있다면요.
“작품에서 희망을 향해서 다가갈 때,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 빠르게,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그리고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vace: 아주 빠르고 힘차게)’라고 말해요. 이 대사가 저희가 결정한 희망으로 가는 자세이자 핵심 가치예요.”

마지막으로 팬들과 독자들에게 새해 덕담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새해에는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악조건들에 대해 가능하면 무게를 두지 마시고, 늘 뒷줄에 있는 나, 끝줄에 있는 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를 자꾸 인지하는 것보다 세라를 생각하며 희망을 꿈꾸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박상원 배우는…
1978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해 이듬해 연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대표작은 드라마 <인간시장>(1988, 장총찬 역), <여명의 눈동자>(1991, 장하림 역), <모래시계>(1995, 강우석 역) 등이 있으며,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2009~2013, 줄리안 마쉬 역)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대한민국 국가브랜드 홍보대사, 민선5기 서울시 홍보대사 등을 지냈고, 2009년에는 인천세계도시축전 명예 홍보대사도 역임했다. 1994년에는 탤런트 김혜자 씨와 함께 르완다어린이 후원활동을 벌였다. 현재 서울예대 교수로도 재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글 김수정 기자 사진 박앤남공연제작소·H&H PLAY 제공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