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에 대한 우려는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각종 위기로 점철됐던 2010년대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채 또 다른 10년을 맞이한 미완성에 따른 후폭풍이다. 다른 하나는 그 어느 10년보다 ‘혼돈 속에 대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앞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놓지 못한 것에 따른 우려가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 경제는 환경 면에서는 ‘뉴노멀’에서 ‘뉴 앱노멀’로, 위험관리 면에서는 ‘불확실성’에서 ‘초불확실성’으로 한 단계 더 악화되고 있다. 뉴 앱노멀·초불확실성 시대가 무서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빅 체인지, 즉 큰 변화’가 일어나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까지도 위상을 갑작스럽게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철에 닥친 이상기후로 세계 경제 질서는 ‘속이 꽉 찬 버거(solid burger)’가 아니라 ‘속이 빈 버거(nothing burger)’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외형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주도해 온 국제기구와 국제규범이 남아 있더라도 실질적인 역할과 구속력은 더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을 채워줄 새로운 국제기구와 국제규범이 태동될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상기후 대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제 통화 질서도 ‘시스템이 없는’ 체제가 더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탈(脫)달러화 움직임이 더 빠르게 진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국이 갑작스럽게 닥친 최대 현안인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국통화를 인위적으로 절상시키는 과정에서 종전과 다른 형태의 환율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금융위기가 발생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는 코로나19 사태와 올해 여름철에 들이닥친 이상기후로 2010년대보다 더 높아졌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중앙은행의 역할이 포기됐다는 비판을 들을 만큼 많이 풀린 돈으로 자산 거품이 심하게 끼었는데도 회수가 쉽지 않다. 초저금리로 부채도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문제는 ‘다음 세대’보다 ‘다음 선거’, ‘국민’보다 ‘자신의 자리’만을 생각하는 정치꾼(politician)이 정치가(statesman)보다 판침에 따라 현대통화론자(MMT)의 주장처럼 돈을 더 풀고 빚을 더 내서 쓸 경우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대형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이다. 국제경제기구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여건에서는 글로벌 초대형 위기로 발전될 수도 있다.
벌써부터 누니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앞으로 세계 경제에 ‘SF 복합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SF 복합위기란 198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과 2008년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한꺼번에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발생했던 모든 형태의 위기가 복합된 초대형 위기다. 이상기후, 세계 경제 근본적인 틀을 흔들어
세계경제포럼(WEF)이 2020년대에 닥칠 것으로 예상했던 디스토피아 과제 가운데 가장 빨리 현실로 닥치고 있는 것이 ‘이상기후’다. 올해 여름철에는 ‘대(great)’가 붙어야 할 정도로 유난히 심하다. 북미 지역은 대폭염, 중남미 지역은 대가뭄, 아시아 지역은 대태풍, 유럽 지역은 대홍수, 아프리카 지역은 대사막화 등으로 전 세계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상기후는 세계 경제의 근본적인 틀(frame)을 흔들어 놓고 있다. 지금까지는 경제주체들이 지구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익을 추구하는 유토피아 목표에 초점을 맞춰 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노출된 디스토피아가 이제는 인내할 수 있는 선을 넘음에 따라 지구를 보호하는 쪽으로 관심이 이동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기본 틀이 전환되는 과도기에 일어나는 각종 병목(bottle neck)과 불일치(mismatch) 현상이 새로운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또 다른 세계 경제 현안이다.
경기 측면에서 디스토피아가 가장 우려되는 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로 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국제 원자재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 부품에 이르기까지 각국이 무기화할 조짐을 보임에 따라 ‘공급 쥐어짜기 충격(Supply·Squeeze·Shock, 3S)’이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글로벌가치사슬(GVC)이 무너지고 공급난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인구절벽’ 우려다. “세계 인구는 20세기 이후 120년 동안 지속돼 온 팽창시대가 마무리되고 감소 국면에 접어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인구구조 변화가 앞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는 인구절벽 보고서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세계 인구절벽 우려에 중심에 서 있는 국가는 중국과 한국이다. 1년 전 “중국 인구가 감소됐다”는 파이낸셜타임스(FT)의 보도를 계기로 제기됐던 중국의 인구절벽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됐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인구도 인구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인구가 절대적으로 감소하면 스태그플레이션이 더 심화되는 것은 볼 보듯 뻔한 사실이다. 인구절벽의 덫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 세계 인구 증가 시기에 누적돼 왔던 디스토피아 문제가 한꺼번에 노출되는 악순환 국면에 빠질 우려도 세계 경제 앞날을 더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국민 경제 입장에서는 소득이 줄어드는 속에 물가가 오름에 따라 경제고통지수가 급격히 높아지는 점이다. 정책 대응 면에서는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총수요를 늘리면 물가가 앙등하고 물가를 잡기 위해 총수요를 줄이면 경기가 더 침체되는 악순환 국면에 처한다.
2차 오일쇼크 이후 들이닥친 1980년대 초반의 스태그플레이션은 세율 감면 등을 통해 공급 능력을 확대하는 ‘레이거노믹스’로 경기를 부양하고 물가도 잡을 수 있었다.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근거가 됐던 래퍼 곡선(Laffer’s curve)은 당시 주류 경제학이었던 케인즈언의 총수요 이론으로 보면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4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이번에는 각국이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빠르게 정착되고 있는 디지털 콘택트 산업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다. 1990년대 후반 클린턴 정부 시절 신경제 신화에서 입증됐듯이 네트워크만 깔면 갈수록 공급 능력이 확대되는 이른바 ‘수확 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디지털 콘택트 산업이 발전되면 고성장하더라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골디락스 국면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 콘택트 산업이 발전하면 두 가지 새로운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을 넘보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테크래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테크래시(techlash)란 ‘기술(technology)’과 ‘반발(backlash)’의 합성어로 각국 정부와 빅테크 기업 간에 힘을 겨루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쌍방향 의미의 용어다.
또 다른 하나는 디지털 콘택트 기업이 시장을 독점할 경우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국민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케이(K)’자형 양극화 구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빅테크’로 상징되는 디지털 콘택트 기업은 발전 정도에 따라 ‘횡재효과’와 ‘상흔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나 소득 계층별로는 중산층이 무너져 중하위 계층이 두터워진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이드 섀플리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명예교수와 앨빈 로스 미국 하버드비즈니스스쿨(HBS) 교수의 공색적 게임이론이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공생적 게임이론을 경영에 접목시키는 일환으로 BOP(Bottom Of Pyramid), 즉 빈곤층 대상 비즈니스를 새로운 사업모델로 주목하고 있다.
수익과 빈곤층 자립 기반을 조성하는 동시에 목표로 하는 BOP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동반자 관계 설정, 각종 기부 등을 통해 중소기업과 저소득층과 함께 가는 제3의 길인 ‘임팩트 경영’에도 주력하고 있다. ‘임팩트, 즉 empact’란 감정이입을 뜻하는 ‘empathy’와 사회적 연대를 나타나는 ‘pact’가 결합된 용어로 사회적 연대 경영을 말한다.
디지털 콘택트 산업과 빈곤층 비즈니스(BOP business)뿐만 아니라 새롭게 떠오르는 알파 라이징 산업(α-rising industry), 해빙에 따른 북극과 그린란드에서 시작되는 신천지 산업(new frontier industry), 대중화 단계에 들어가는 우주항공 산업(off the earth industry) 등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제3섹터’가 부상하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경제정책 운영과 관련해 공생적 게임이론이 ‘공유경제’ 논의로 급진전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콘택트 산업 발전으로 발생하는 ‘횡재효과’와 ‘상흔효과’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자신의 능력과 결부되지 않은 면도 많아 경제 게임 결과를 인정하고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이 많다. 능력 이상 얻은 것은 거둬서 능력과 관계없이 피해를 입은 경제주체에게 배분해주는 과정에서 공유경제가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공유경제를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 모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와 이상기후로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이 준(準)공공재 성격을 띠고 있어 ‘국가와 민간’, ‘계획과 시장’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간, 계획과 시장이 함께 풀어가는 혼합경제 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도 ‘제3의 길’이 모색될 것으로 예상된다.
글 한상춘 한경미디어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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