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시 지친 날, 누군가가 건네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은 마음에 큰 위로를 준다. 나의 지친 마음을 ‘공감’해주는 누군가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혼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윽한 커피의 향 때문일까. 아니면 특유의 맛에서 여유를 주는 것일까.
커피 한 잔, 그 소소한 여유
지난겨울,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도전했었다. “젊게 산다”는 병원 후배들의 말에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한파가 내린 어느 날에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계속 마시다 보니 그 ‘알싸한’ 시원함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는 것이, 요즘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일상이 됐다.
간혹 “커피의 맛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향을 좋아하세요”라고 묻곤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듯 당황하는 표정과 마주하게 된다. 필자도 지난해에 알게 됐는데, 나는 커피의 맛보다는 향을 더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그냥 내 취향이다. 내 취향을 잘 아는 것도, 타인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 이상 중요하다. 내가 나를 위로하고 행복하게 하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정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잘 아는 것 같지만, 막연한 상식으로 내 마음을 추정하다 보니 실제와는 다를 경우가 많다. ‘마인드 케어’는 내 마음과의 소통이다. 소통을 잘하려면 나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가야 한다.
갑자기 커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위해 커피를 마시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차(茶)가 더 좋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물을 마시면서 힐링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후각의 심리학
코로나19 감염으로 ‘후각 기능 이상’을 경험한 사람이 상당하다. 대체로 1~2주면 회복하지만, 상당 기간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코로나19 완치 후 후각은 돌아왔는데 매캐한 냄새가 올라온다는 경우가 한 예다. 맛을 느끼는 데 있어 미각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후각이다. 입에 넣기 전 코에서 음식의 향을 맡을 뿐 아니라 입에서 씹어 넘길 때 구강에서 느껴지는 향이 우리가 맛을 느끼는 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후각에 문제가 생기면 식도락(食道樂)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이유다.
후각은 정서적 기억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실제 전쟁 트라우마 연구에 따르면 전쟁 기억과 연관된 디젤유의 냄새가 다른 화학물질의 향보다 두려움과 연관된 뇌 영역의 혈류 증가와 부정적 감정을 더 증가시켰다는 결과가 존재한다.
이처럼 과거 어느 기억에 남은 향으로 괴롭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흥미로운 것은 특정 냄새 때문에 과거의 불편한 기억이 떠오르는 경우, 커피 원두 향처럼 현재로 돌아오게 해주는 냄새가 도움을 준다는 주장이 있다. 다시 말해 냄새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고, 반대로 트라우마의 기억 스위치를 끄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우리가 치열한 오전 업무 후, 점심시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스트레스의 기억을 커피 향으로 완화시키려는 자연스럽게 습득된 힐링 활동인 셈이다. 커피에 향이 없다면 이렇게 우리가 열심히 마실까 싶다.
후각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게 하는 ‘내비게이션’ 기능에도 영향을 준다. 시각 정보뿐 아니라 그 장소의 냄새를 함께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는 후각 기능과 공간 기억력이 뇌 안에서 연결된 탓인데, 진화적 관점에서 추론해보면 후각이 시각이나 청각보다 더 먼 곳의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비게이션’이 없던 아주 오래전, 우리는 지금 가는 방향이 사막인지 해안가인지 판단하기 위해 후각의 도움을 빌렸다. 바다가 보이지 않고, 파도 소리도 없지만 그 전에 바다의 짠 냄새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막을 피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기에 후각은 중요한 길 찾기 정보였고 그만큼 후각이 여러 냄새를 구별할 수 있게 발달하고 지정학적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과 단단히 신경망으로 묶였다는 주장이다.
커피 한 잔, 그 소소한 여유
소탈해야 성공한다
‘꿈이 커야 성공한다’라는 ‘공식’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요즘에는 부쩍 피로감으로 다가온다. ‘허슬 문화(hustle culture)’는 개인 생활보다 업무를 중시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일컫는다. 하지만 요즘에는 허슬 문화와 대비되는 조용한 ‘사직’이 관심을 끌고 있다. 번아웃 시기에 개인의 마음 건강과 삶의 웰빙에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된다.
오늘만큼은 ‘소탈해야 성공한다’고 말하고 싶다. 작은 것에도 즐거움과 감사함이 느껴질 때 찾아오는 긍정에너지는 창의와 긍정, 공감 등으로 전환된다. 일을 잘하기 위해 잘 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과 삶, 모두가 독립적인 중요한 인생의 콘텐츠이면서 긍정 에너지로 상호작용한다.
요즘 들어 객관적인 상황에 비해 주관적인 행복감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는 호소를 자주 듣는다. 번아웃이 찾아오면 행복의 역치값이 올라갈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과거에 기분 좋게 느껴졌던 것들에 무관심해지는데, 의외로 봄이 오고 있는 줄 몰랐다는 이들도 많다. 마음이 지쳐 행복의 역치값이 올라가서일 수 있다. 봄이 찾아옴이 느껴지고 따스한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진다면 내 마음이 유연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야말로 봄내음이 가득하다. 올봄에는 ‘향기 혹은 냄새로 기억하는 추억 만들기’를 권유하고 싶다. 바다나 강의 냄새일 수도 있고, 나무나 모래의 냄새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집에서 가까운 카페에서 느껴지는 커피 향일 수도 있다. 후각으로 느껴지는 기억의 행복을 강화하려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도 좋다. 우리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연결’을 원하기 때문이다. 봄의 향기와 따뜻한 사람과의 연결을 커피 향에 잘 담아 기억에 저장한다면,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 행복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 봄이 지나도, 그때는 그 사람이 옆에 없을지라도.



글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