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박근형 배우 인터뷰

한경 머니가 18주년을 맞이한 올해, 배우 인생 60번째 생일을 맞이한 대배우 박근형(83)을 만났다. 아직도 좋은 작품 앞에서는 한없이 가슴이 떨리고, 국내 공연예술 관련 애정 어린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천상배우 박근형의 연기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연극 무대는 배우의 예술, 충전과 자기계발의 공간이죠"
사진 (유)쇼앤텔플레이·(주)와이엠스토리 제공

그야말로 진짜와 진짜가 만났다. 올해로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은 배우 박근형이 배우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겐 꿈의 무대로 손꼽히는 아서 밀러의 고전 명작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 도전한다. 5월 21일부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펼쳐지는 이 작품은 대공황이란 급격한 변화 속에서 30년간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평범한 가장 윌리 로먼의 이야기를 다룬다.

미국 중산층 윌리가 직업을 잃고 혼란을 겪으며 무너져 가는 모습과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의 심리를 다루며 자본주의의 잔인함을 고발하고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개인의 인간성 회복을 호소한다.

작품은 국내에서도 여러 버전으로 각색돼 무대화됐다.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신유청은 원작이 가진 밀도감을 유지하면서도 동시대성을 강조한다.

이번 연극에서 주인공 ‘윌리 로만’ 역을 맡은 박근형은 2016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아버지> 이후 7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그에게 연극은 연기 인생의 뿌리이자, 예술가로서 배우가 성장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였다. 연극을 통해 관객은 ‘정화’를, 자신은 ‘충전’을 한다고도 말했다. 과연, 대배우가 그려내는 세기의 명작은 관객들에게 어떠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할까. 유난히 날이 좋았던 5월 15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박근형의 이야기를 담아봤다.

배우 인생 60년을 맞이한 올해 7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오신 소회가 궁금합니다.
“연기를 갓 시작했을 때는 아서 밀러를 몰랐어요. 그러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처음 마주한 것이 1960년대 초반 명동 예술극장(옛 국립극장) 주변에서였죠. 동인제 극단에 다니면서 돈을 모아 연극을 봤던 시절인데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꼭 한번 ‘윌리’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는(당시 20대 초반) 그 역할을 표현하기에 너무 젊었어요. 동인제 극단이 무대에 올리기엔 스케일이 커서 엄두도 못냈고요. 늘 동경했던 작품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고 제게 기회가 주어져서 책을 다시 읽어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죠. 동시에 ‘과연 내가 이걸 해낼 수 있나’ 싶었어요. 단지 스토리텔링을 전달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내적인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걱정이 들더군요. 연극 외에도 제가 다른 일정들에 바쁘고, 신유청 연출과 전통극의 장르를 구축하는 방법을 두고 설전도 있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부분을 많이 참고, 따라주셔서 공연까지 이끌게 됐네요.”

내면 연기를 고민하신다고 하셨는데 주안점을 둔 부분은요.
“작품 속 윌리의 생각은 3가지로 구성되죠. 망상과 현실 그리고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그어주지 않으면 (관객들이) 연극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경우가 생겨요. 가령, 망상에 빠졌을 때는 혼자 얘기하듯 중얼거리거나, 젊은 시절 가족과 화목했던 시절로 돌아갔을 때는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구현하는 등 구별 지어 표현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연극 무대는 배우의 예술, 충전과 자기계발의 공간이죠"
사진 (유)쇼앤텔플레이·(주)와이엠스토리 제공

평소 체력관리도 궁금해요.
“1980년대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을 매일 해 왔습니다. 늘 걷고, 스트레칭하는 편이에요. 골프도 즐기고요. 아마 그런 것들이 밑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인데 맵고, 짠 건 피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물도 많이 마시고요. 그래서인지 지쳐서 쓰러지거나 한 적은 없어요. 다만, 종종 제 욕심에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주사를 한두 번 맞은 적은 있지만요. 무엇보다 이 일이 재미있으니까 하죠. 그렇지 않으면 어려웠을 겁니다.”

60년 배우 인생에서도 유독 연극 사랑이 눈에 띄십니다. 연극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무대 연기는 결국 배우의 예술이죠. 그래서 떠날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 연극은 다른 미디어 매체들에 비해 배우들이 자신의 생각을 얼마든지 충분히 펼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무대가 자꾸 오고 싶죠.”

최근 박해수, 손석구 등 드라마나 영화에서 큰 사랑을 받는 배우들이 무대로 돌아오기도 하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들은 그걸 충전이라고 해요. 혹은 자기계발이라고도 하고요. 배우를 하다 보면 역할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뚫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어요. 일정한 이론이나 훈련도 없고요. 결국, 돌아올 곳은 무대죠. 무대로 와서 40~80일을 함께 연습하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면서 진짜 이야기를 꺼내야 해요. 제가 매번 회장 역할만 해선 발전이 있겠어요. 연극을 통해서 새로운 걸 다시 해봐야 해요. 그 과정에서 배우로서 자기 충전(발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볼 것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관객이 연극을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극이 지닌 정화의 힘이 큰 것 같아요. (관객들이) 생활에서 연극에 몰입하는 시간은 아주 짧지만, 몰입하는 동안은 자신의 생활은 다 잊어버리죠. 연극이 끝나고 오는 정화의 시간에 자신의 삶과 비교하며 정신적인 생각을 바꿔주는 것이 크다고 봐요. 그 힘으로 연극이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우나 연출이나 정확한 메시지를 연극에 담아야 한다고 봐요. 단순히 보여주기식 연극은 하지 말아야 하죠.”

이 작품이 오랜 기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어요. 왜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자신이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얘기 못해요.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도 내 가정사를 다 얘기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런 (말하지 못했지만) 경험들이 다 담겨 있어요. 무엇보다 작품 속 시대상이 제가 젊었을 때 겪었던 사회 모습과 비슷한 점이 많죠. 이제 막 산업사회가 발전하면서 물자가 넘쳐나던 시기에 소모되는 인간들, 빈부의 격차, 가부장적인 대가족 제도하에서 붕괴되는 가족 등 제가 젊었을 때 절실하게 느꼈던 것들이 있어서 더 와닿는 것 같습니다.”

작품만큼 배우님도 롱런하셨는데 비결이 뭘까요.
“노력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무대 배우는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저도 예술가거든요. 그래서 연기를 할 때마다 늘 심도 있게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오롯이 내 생각을 집어넣어서 표현하려고 해요. 그것이 보시는 분들도 맞다고 생각하시니까 지금껏 저에게 사랑을 주신 것 같아요. 가만히 있어서는 절대로 배우가 될 수 없어요. 늘 공부하고,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연극 무대는 배우의 예술, 충전과 자기계발의 공간이죠"
작품을 고르시는 기준이 있다면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사람이죠. 저는 사람을 표현하는 작품이면 뭐든지 해요. 어떠한 인물이 환경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반응하게 되는 인간성에 주안점을 두죠.”

우리나라 공연 시장의 외연이 커졌지만, 연극계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습니다.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K-드라마, K-팝을 내세우며 우리 것이 세계적이라고 하는데 그 밑바탕은 탄탄하지 않아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젊은이들 한 달에 28만 원 받으면서 네다섯 개 직업을 뛰고 있다고 해요. 솔직히 제가 배고프던 시절에는 현실을 잘 몰랐어요.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치부했죠. 그런데 지금 제가 어른이 돼서 보니 이런 현실이 너무 분한 거예요. 배우 출신 문화부 장관이 2명이나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나오지 않았나요. 저는 문화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봐요. 상금도 많이 내걸고, 희곡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국립극단은 단기 비정규직이 아니라 예전처럼 60여 명씩 뽑아 밑거름을 만들어야죠. 연극계에 나오는 수많은 청년의 갈 길을 넓혀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