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흐름에 따라 고령자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재산 승계 수단이 필요하다는 취지하에 우리나라 ‘신탁법’이 2012년 개정되면서 신탁이 상속의 대체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유언대용신탁을 명문화했다.
유언대용신탁을 도입함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신탁을 통해 생전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후 상속 및 자산관리 수단으로 신탁이 각광받게 되면서, 여러 금융기관에서 다양한 신탁 상품을 내놓고 수탁 잔고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고령화 시대를 맞이해 상속 및 자산관리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 가치가 높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유언대용신탁이란 위탁자인 피상속인이 생전에 수탁자와의 신탁 계약을 체결해 미리 정한 대로 재산을 관리하다가 자신이 사망한 때에 수익자에게 신탁 이익을 취득하게 하는 형태의 신탁이다. 신탁을 하게 되면 재산은 수탁자에게 이전된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신탁이란 내 재산을 다른 사람(수탁자) 명의로 맡긴 다음 그 다른 사람(수탁자)이 나와 미리 정한 대로 재산을 처분·관리해주는 것이고, 신탁 중 유언대용신탁은 내가 살아 있을 동안뿐만 아니라 사망한 후의 재산 관리 및 처분도 정하는 것이다. 유언대용신탁은 사후의 관리, 처분까지 맡길 수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유언대용신탁과 유언과의 차이
유언대용신탁 외에 유언으로 재산 상속을 미리 정하는 것도 가능하며, 신탁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유언이 대표적인 재산 승계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유언과 유언대용신탁을 비교해보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방식상의 차이가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계약이므로 양 당사자 간 합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유언은 민법상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 5가지의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유언자의 진의와 상관없이 형식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무조건 무효가 된다. 방식 면에서 유언이 더 엄격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할 수 있는 재산 승계 방법에 차이가 있다. 유언으로 정할 수 있는 사항은 법으로 한정돼 있다. 친생부인(민법 제850조), 인지(민법 제859조), 미성년후견인의 지정과 미성년후견감독인의 지정(민법 제931조 제1항·제940조의2), 유증(민법 제1074조), 재단법인 설립을 위한 재산출연행위(민법 제47조 제2항), 상속재산의 분할 방법의 지정 또는 위탁 및 분할의 금지(민법 제1012조), 유언집행자의 지정 또는 위탁(민법 제1093조), 신탁의 설정(법 제3조 제1항 제2호) 등이 있는데, 이러한 법정 유언 사항 이외의 내용은 유언으로 남기더라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 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신탁재산이 농지여서 ‘농지법’상 수탁기관인 금융기관이 이를 취득할 수 없는 경우처럼 강행법규에 위반한 게 아니라면, 자유롭게 어떻게 재산을 승계시킬 것인지 정할 수 있다.
아울러 재산을 승계받는 절차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유언의 경우에는 유언집행자를 정하면 그 유언집행자가 유언을 집행하고, 유언집행자가 없는 경우에는 상속인이 유언집행자가 된다. 따라서 유언집행자로 지정된 자가 유언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거나, 상속인들이 유언 집행을 반대하는 경우 유언에 따른 재산을 이전받기 위해 유언집행자 또는 상속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언대용신탁에서는 재산을 맡은 수탁자(주로 금융기관)가 신탁 계약에 정한 대로 재산을 관리하거나 이전해주게 되므로 훨씬 신속하게 재산을 이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유언과 비교해봤을 때 유언대용신탁은 자유로운 재산 관리, 처분이 가능하고 재산 이전도 더 신속하게 진행된다는 면에서 상당히 강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상속재산 유언대용신탁을 통한 자산관리 유형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속 및 생전 자산관리 수단으로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사례로 설명해보자.
#1. 남편 김갑동은 자기 명의로 상가 1채와 아파트 1채,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은 매일 찾아와 사업자금을 해달라고 조르면서 부모를 괴롭히고 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해 가족들의 폭군으로 군림했다. 김갑동은 자신이 사망하면 마음 약한 아내 이을녀가 아들의 등쌀에 상속재산을 제대로 분배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내에게 재산을 증여해도 망나니 같은 아들이 빼앗아 갈 게 걱정이다.
깁갑동은 자기 재산을 신탁한 후 생전에는 남편과 아내가 재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사용하다가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와 아들, 딸이 법정상속분에 따라 수익을 사용하고 아내가 사망했을 때 남은 재산을 아들에게 이전하도록 해 두었다. 김갑동이 사망하더라도 아내 몫의 상속재산을 넘볼 수 없게 된 것이다.
#2. 아내 이을녀는 치매다. 남편 김갑동은 정신은 멀쩡하지만 거동이 불편하다. 상주 간병인을 두고 아내와 집에서 지내고 있다. 남편에게는 월세가 나오는 부동산과 현금이 있어서 부부가 생활하는 데는 당장 지장이 없다. 하지만 남편이 만약 아내보다 먼저 죽거나 남편마저 아프게 된다면 아내의 간병비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부에게 자녀 1명 있지만 사이도 나쁘고 사업 실패를 거듭하며 돈이나 달라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남편 김갑동은 자기 재산을 신탁해서 남편 생전에는 남편이 그 월세 수익을 사용하다가,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사망하면 아내가 생존할 때까지는 아내가 월세 수익을 사용하도록 하고, 아내마저 사망하면 자녀에게 이전하도록 했다. 남편이 먼저 사망하면 치매인 아내가 월세를 수령해도 관리할 능력이 없으므로 아내가 들어갈 요양병원에 바로 요양비와 간병인 비용을 지급하도록 특약도 체결했다.
#3. 아내 이을녀는 남편이 죽고 혼자 살고 있다. 건물 1채와 현금을 소유하고 있어 사는 데 별 지장은 없다. 자녀들은 전부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 해외에 살고 있는데 앞으로도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예정이고, 모두 성공해서 어머니 재산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그냥 알아서 다 쓰시라는 입장이다. 이을녀는 자신이 사망한 후 해외에 있는 자녀들이 한국으로 들어와서 상속 절차를 밟는 게 너무 힘들까 봐 걱정이다.
이을녀는 자신의 건물과 현금을 신탁 회사에 맡긴 후 생전에는 자신이 월세 수입 및 현금을 사용하고 자신이 사망한 후에는 부동산을 처분한 후 그 처분대금과 현금에서 상속세 등을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자녀들의 해외 계좌로 이체하는 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자녀들이 한국에 오지 않더라도 상속재산을 편하게 정리하도록 준비해 둔 것이다.
김갑동에게는 뇌성마비가 있는 아들이 있는데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동이 어려워서 직장을 다니며 생계를 유지할 만한 수입을 얻기는 어렵다. 김갑동은 자신이 사망한 후 아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스럽다.
#4. 김갑동은 아들을 위해 월세가 나오는 건물 1채를 신탁해서 김갑동이 생전에는 월세를 받고 자신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이 월세 수입을 받도록 했다. 장애인을 위한 신탁은 5억 원을 한도로 비과세를 적용받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세금도 절감할 수 있었다.
#5. 김갑동은 부친이 사망하면서 형제 5명과 함께 10층 건물 1채를 공동으로 상속받았다. 해당 부동산은 안정적인 수입이 발생했지만, 형제들 중 2명은 해외에 있고 다들 직장이 있어서 건물 관리가 쉽지 않았다. 김갑동이 형제들 대표로 임대차 계약 체결 등 관리를 해보려고 했지만 해외에 있는 상속인들과 매번 연락하기도 힘들었다.
김갑동의 형제들은 신탁 회사와 부동산 관리 및 처분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김갑동 형제들이 모두 동의하는 매수자가 나오면 이를 매각하되 그때까지는 신탁 회사에서 이를 관리하면서 임대수익을 형제들에게 분배해주기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갑동 형제들은 편하게 임대 수입을 수령했고 약 5년 뒤 부동산 시가가 오르자 적당한 매수자를 찾아 건물을 매각하고 대금을 나눠 가질 수 있었다. 주식신탁을 활용한 가업승계 문제
이들 사례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탁을 통해서 자유로운 자산 승계가 가능하고 이는 고령화 시대에 반드시 필요하다. 사례에서는 개인만 설명했는데 기업에서도 자산 승계가 문제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임직원들의 생계와도 연결돼 있기에 어떻게 보면 사회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특히 기업은 창업자가 고령으로 치매에 걸린다면 주식의결권 행사가 바로 문제가 된다. 창업자가 치매에 걸려 성년후견이 개시되면, 성년후견인이 창업자의 주식의결권을 대신 행사하게 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성년후견인이 행사하게 된다. 성년후견인은 전문가인 변호사이거나, 창업자의 가족 중 하나가 될 것인데 주식의결권을 적절하게 행사할 정도로 회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창업자가 미리 주식을 신탁해 두고 자신이 의사능력을 상실했을 때는 의결권을 누가 행사하고, 사후에도 주식을 어떻게 분배할지 미리 자유롭게 정해 둘 수 있다면 회사 경영에도 매우 이익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당연히 주식에 대해서도 신탁을 활용해 가업승계가 자유롭게 가능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행법에 의할 때는 주식신탁을 통한 가업승계는 쉽지 않다.
첫 번째로 세금과 관련해 가업상속공제를 받기 위해서는 피상속인을 포함한 최대주주 등은 비상장법인은 지분 40%, 상장법인은 30%를 10년 이상 계속 보유해야 하는데, 수탁자인 신탁 회사 명의로 주식신탁을 한 기간도 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두 번째로 유언대용신탁에서 수탁자는 금융 회사가 대부분인데, 금융 회사가 신탁의 형태로 기업 지분을 20% 이상 소유하는 경우에는 금융위원회의 별도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다만, 최근 금융위가 질의 회신을 통해 유언대용신탁과 같은 관리형 신탁은 자산 운용에 대한 재량이 없고 신탁에 정한 바에 따라 재산을 관리하는 자에 불과하므로 이러한 승인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이러한 요건이 완화된 것으로 볼 여지는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유언대용신탁으로 주식을 신탁하면, 주식을 신탁받은 신탁 회사는 동일 법인이 발행한 주식 총수의 15%를 초과하는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주식신탁을 하면 발행주식 총수 15%까지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식신탁을 가업승계에 활용하려는 사람들은 과반수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신탁 후에도 생전에는 자신이 주식의결권을 행사하고 사후에 주식을 상속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15% 의결권 제한이 있으면 주식신탁을 활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행히 2022년 금융위에서 고령화 시대 수요가 큰 유형의 신탁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관계 기관과 긴밀히 협의하며 제도를 정비하겠다고 하면서 의결권 행사 제한 규정 등 가업승계신탁 활용을 저해하는 제도적 요인을 발굴·정비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으므로 법령이 정비돼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주식신탁을 통한 가업승계도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이가 들면 정신과 신체 건강이 모두 약해지므로 재산을 관리하기 어렵고, 승계도 쉽지 않다. 한국은 이미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고 그로 인한 재산 관리와 승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에 신탁은 살아 있을 때는 유용한 자산관리 수단으로, 사망했을 때는 편리한 상속 승계 수단으로 활용도가 높다. 그러나 유언대용신탁은 신탁 회사, 법무, 회계, 세금 등 전문 인력이 제공할 수밖에 없어 상당한 수수료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므로, 고령자가 치매나 거동 불편을 대비하거나 장애인신탁 등 고령화에 대비하는 신탁들은 세제 혜택을 늘려 신탁을 더욱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유언대용신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령화 시대를 대비할 수 있는 자산관리 및 승계 수단으로 신탁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법령 및 세제 정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글 양소라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