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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삶의 4가지 유형, 당신의 선택은
[한경 머니 기고=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정년을 향해 달려간다. 퇴직까지 남은 시간이 줄어들면서 직장인들은 초조해진다. 별다른 대책 없이 시한폭탄이 폭발할 시간만 기다리는 꼴이다. 영화를 보면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히어로가 등장해 시한장치를 해제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대다수 직장인은 별다른 준비 없이 퇴직을 맞는다.

퇴직 후에는 어떤 삶이 기다릴까. 퇴직을 하면 시간부자가 된다. 그래서 현역 시절 여유가 없어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우고 싶었던 것도 배우고, 옛 친구도 만나고, 멀리 여행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정년퇴직자들 중에서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법이 정한 정년에는 도달했지만, 신체는 계속 일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일할 의지가 있고 능력이 되더라도 원하는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정년퇴직을 앞둔 사람들은 퇴임식을 생전에 치르는 장례식과 같다고 한다. 생전 장례식이라는 말은 일본 소설가 우치다테 마키코가 <끝난 사람>이라는 소설에서 한 말이다. 아직 기운이 팔팔한 사람을 회사에서 내보내며 왁자한 이별 의식을 치르고 것이 죽은 사람에게 치르는 장례식과 다를 바 없다고 본 것이다.

소설에서 타시로 소스케는 은행에서 일하다가 자회사로 밀려난다. 그리고 얼마 후 정년을 맞는다. 동료들은 퇴임식에서 소스케에게 정년을 축하하는 인사를 건네지만, 속으로는 소스케를 더는 재기할 수 없는 ‘끝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데 소스케의 삶은 정년과 함께 끝나고, 이후 삶은 덤에 불과한 걸까.

은퇴 이후 삶을 흔히 ‘여생(餘生)’이라고 한다. 여생이라면 남은 인생이란 뜻이다. 그런데 산 사람에게 ‘남은 인생’이라는 말을 써도 될까. 여든이든 아흔이든,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살아 있으면 그냥 ‘인생’이라고 할 것이지 남은 인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은퇴 후 삶을 ‘여생’이라 하는 것은 일과 삶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일이 없는 삶은 의미 없고, 일을 잃으면 삶도 의미를 잃는다. 그래서 은퇴 후 삶을 인생이 아니라 여생이라 부르는 것이다. 은퇴 후에도 인생을 살려면 계속 일을 해야 한다.
은퇴 후 삶의 4가지 유형, 당신의 선택은
‘은퇴를 했는데 일을 한다?’ 더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은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과 은퇴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일을 하지만,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돈만은 아니다. 일터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즐거움도 찾는다. 그리고 일이 있어 하루를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일을 하는 게 꼭 돈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렇게 일의 의미를 확대하면 은퇴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은퇴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돈을 벌려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지, 은퇴한 다음에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 이처럼 사람마다 돈과 일, 은퇴에 대한 생각이 다른데, 크게 4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

TYPE 1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넉넉하게 돈도 번다
첫째 타입은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을 버는 사람이다. 남들은 돈을 벌려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 아니면 돈을 써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하면서 돈도 넉넉하게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면, 이를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은퇴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필요한 생활비를 벌 수 있다면 애써 은퇴 준비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직장인이라면 정년을 피해 갈 수 없다. 좋아하는 일이라도 때가 되면 그만둬야 하기 때문에, 그전에 필요한 은퇴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정년이 없는 개인사업자라고 안심할 수 없다. 기술 발달과 경쟁자 출현으로 일을 그만둬야 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아프거나 다쳐서 일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다. 질병과 사고는 치료비의 발생과 함께 소득의 단절을 가져온다. 문제는 질병이나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되는지, 언제 발생할지, 치료비는 얼마나 들고 소득은 또 얼마나 감소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업 회계에서는 손실이 발생하는 시기, 규모, 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려울 때 ‘우발부채’로 인식한다. 아직 채무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장래에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하면 채무로 확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과 사고도 발생 시기와 손실 규모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발부채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질병과 사고로 발생하는 우발채무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의료비와 치료 기간 동안 필요한 생활비를 별도로 떼어 두면 된다. 그런데 자산 운용 측면에서 보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하려고 거액을 묶어 두는 게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치료비와 소득 단절에 대비할 만한 자금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발부채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우발자산을 준비해야 한다. 우발자산은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제적 효익이 드러나는 자산이다. 질병과 사고에 대응하는 우발자산으로는 보험이 있다. 실손의료보험을 가입해 두면 치료비를 실비로 보장받을 수 있다. 그리고 정액보험에 가입하면 질병과 사고가 발생했을 때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다. 이것으로 치료받는 동안 일을 못해 줄어든 소득을 보전할 수 있다.
은퇴 후 삶의 4가지 유형, 당신의 선택은
TYPE 2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고 돈을 번다
하고 싶은 일도 하고 돈도 벌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일자리가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해서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려면 내키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 어찌해야 할까. 둘째 타입에 해당하는 사람은 일단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뤄 둔다. 그리고 돈을 벌 수 있다면 내키지 않는 일도 당장은 마다하지 않는다.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지금 버는 돈 중에 일부는 저축한다. 그리고 돈이 모이면 지금 하는 일에서 은퇴한 후 하고 싶은 일을 하러 떠난다. 이들에게 은퇴는 희망의 이벤트다.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은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지금처럼 저축하면 언제쯤 은퇴할 수 있는지, 은퇴를 앞당기려면 저축을 얼마나 늘려야 하는지 묻는다.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파이어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파이어(FIRE)는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로,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조기에 은퇴하려는 이들을 파이어족이라 부른다. 조기에 은퇴해서 생계와는 무관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조기 은퇴의 꿈을 이루려면 저축을 늘리거나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둘 다 만만치 않다. 저축을 늘리려면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소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짧은 기간이라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은퇴자금을 모으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얼마나 오랫동안 저당 잡혀야 하는 걸까. 저축액을 크게 늘리지 못하면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공짜 점심은 없다. 높은 수익의 이면엔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
은퇴 후 삶의 4가지 유형, 당신의 선택은
TYPE 3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생활비는 다른 일을 해서 번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늘어나면서 둘째 타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곤란하게 됐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은퇴 기간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예정된 나이에 은퇴하려면 예전보다 더 많이 저축해야 한다. 아니면 은퇴를 뒤로 미뤄야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뒤로 미룰 수는 없다. 너무 나이 들어 은퇴하면 돈은 있더라도 체력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셋째 타입에 해당하는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당장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충분한 생활비를 벌 수 없다면, 부족한 생활비는 다른 일을 해서 벌면 된다. 최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엔(N)잡러’의 등장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엔잡러는 하나의 일자리에서 충분한 생활비를 벌지 못해서 여러 개의 일을 한다.

그렇다고 엔잡러가 모두 셋째 타입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엔잡러 중에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중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많은 일을 할 뿐이다.

엔잡러 중에 셋째 타입에 해당하는 이들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지만 그 일만 해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다른 일도 한다. 언젠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견 소설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소설을 쓰는 일이 가장 즐겁고, 평생 소설을 쓰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소설만 써서는 생활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봤다.

정말 소설만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걸까. 소설책 1권에 1만5000원 정도 한다. 통상 소설가는 책 1권이 팔리면 책값의 10%를 인쇄로 받는다. 소설책이 1만 권 이상 팔리면 1500만 원을 버는 셈이다. 소설가가 한 해 장편소설을 1권 이상 쓰기 힘들고, 한 해 1만 권 이상 팔리는 소설책도 많지 않다. 그래서 소설가는 좋아하는 소설만 쓰고 살 수는 없다. 좋아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에세이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튜브 활동도 한다. 소설가가 ‘본캐’라면 수필가, 화가, 방송인, 유튜버는 ‘부캐’인 셈이다. 다양한 ‘부캐’들이 활동을 해서 번 소득으로 ‘본캐’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면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 타입은 워라밸, 즉 일(work)과 삶(life)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삶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말한다면, 일은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을 말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이 중요하지만, 이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방해 받기는 싫다. 반대로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려면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소득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워라밸이 중요하다.

셋째 타입에 해당하는 이들은 은퇴 시기를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후 준비가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도 한다고 하지만, 한번에 여러 일을 한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그러다 건강을 잃으면 ‘본캐’와 ‘부캐’가 모두 제 역할을 다할 수 없다.
은퇴 후 삶의 4가지 유형, 당신의 선택은
TYPE 4 하고 싶은 일을 잊고, 그저 일만 한다
앞서 말한 3가지 타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에 반해 넷째 타입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른다. 애당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면, 바쁜 일상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이다.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고, 돈을 많이 벌려고 더 많이 일한다.

그러다 불현듯 정년을 맞아 퇴직한다. 이제 누구도 당신에게 생산적인 일을 기대하지 않고, 일에 대한 책임도 없다. 물론 소득도 사라진다. 이제 일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수명 연장으로 인해 그런 삶이 상당 기간 지속될지도 모른다. 일 없이 오래 사는 ‘무업장수(無業長壽)’를 하는 것이다. 넷째 타입에 해당하는 이들에게 은퇴 준비는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꼭 돈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즐거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돈과 일, 은퇴 준비와 관련해서 4가지 삶의 스타일을 살펴봤다. 당신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어떻게 은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의 답은 어떻게 일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서 찾을 수 있다.

글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