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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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머니 기고=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 어린 시절의 첫사랑에게는 오직 순정을 다하는 주인공이 있고, 그녀 또는 그에게는 반드시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서브 캐릭터가 존재한다. 멀쩡하게 걷고 있던 주인공이 미끄러지거나 발부리에 뭔가 걸려 45도 각도로 넘어질 때 기막힌 타이밍으로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운명의 주인공이다.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주인공은 돈과 명예를 마다하고 자기만의 길을 선택하며, 모두에게 까칠하더라도 내 여자에게만은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고 다정하다. 적어도 여자 주인공이 자판기 쪽으로 걸어갈 때 우연히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의 버튼을 누를 수 있어야 남자 주인공으로서 자격이 있다. 그래서 주인공의 조력자들은 이들의 이 미션 임파서블을 최대한 돕고자 노력한다.

K-드라마 마니아인 감독이 만든 한·미·중 합작 웹드라마는 이렇게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들을 마치 슈퍼 히어로의 초능력처럼 이용한다. K-드라마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웬만한 클리셰를 다 망라할 뿐 아니라 매우 창조적으로 활용함으로써, K-드라마의 일반 시청자들을 놀라고도 부끄럽게 만들었던 작품 <드라마월드(Dramaworld)>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 K-드라마를 오마주하는 또 한 편의 드라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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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주고 싶게 사랑스러운 <엑스오, 키티>
미국 포틀랜드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자꾸만 끊어지는 와이파이를 찾아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녀가 있다. 모두가 자기 짝과 달콤한 사랑의 유희를 즐기는 시간, 8000km나 떨어져 있어서 16시간 시차를 가진 곳에 있는 펜팔 남친을 가진 덕에 수영장 한가운데 떠 있는 튜브를 타거나 수면양말을 신는 양자택일을 피할 수 없는 가엾은 하이틴.

그러나 신세 한탄만 하는 건 캔디형 주인공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어릴 적 여읜 어머니가 다녔고, 지금은 사랑하는 남자친구 ‘대’가 다니고 있는 한국서울국제학교(Korean Independent School of Seoul·KISS)로 유학을 결심한다.

뚝뚝 끊기는 영상통화밖에 못할 장거리 연애 따위는 발길로 뻥 차주고 스스로의 운명 정도는 개척할 수 있어야 주인공이지. 기다려, 엄마의 소녀시대! 기다려, 대! 기다려, 내 첫 키스! 기다려, KISS!(하필 학교 이름도 KISS다.) 메시지마다 포옹과 키스를 날리는 사랑스러운 키티의 이야기, <엑스오, 키티>는 안아주고 싶게 사랑스러운 드라마다. 드라마의 제목인 <엑스오, 키티>에서 엑스오(XO)는 포옹과 키스를 날린다는 뜻으로 편지 끝에 자주 쓰는 약어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자막에서는 ‘사랑을 담아’로 번역하고 있다.

<엑스오, 키티>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제니 한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트릴로지의 스핀오프 시리즈다. 연애소설에 통달했으면서도 짝사랑만 하는 둘째 언니를 대신해 부치지 못한 연애편지들을 몽땅 부쳐 버린 막내동생, 그 당돌한 중매쟁이 꼬마 아가씨 키티가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인 것이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단계에서 주인공을 백인으로 바꾸자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던 작가의 고집이 반영된 전작만큼이나, 이 드라마에는 한국의 전통문화 및 대중문화에 대한 애착이 적나라하게 반영돼 있다.

카메라는 인트로부터 서울의 풍경을 샅샅이 훑어 가면서 도시 한가운데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확인시켜준다. 어머니를 여읜 대와 가족들이 추석날 아침 차례를 준비하는 장면이나 학교 축제에서 부채춤을 추거나 택견 공연을 펼치는 장면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드라마들보다 더 적나라하고 열성적으로 우리의 전통을 과시한다.

틱톡에서 유행하는 춤이나 저글링이 아니라 품위 있는 ‘전통 한국 예술 공연’을 펼쳐야 기말고사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선생님의 제안은 그래서 더 신선하다. 그 선생님이 학교 근처에 있는 한옥 사택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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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청춘의 로맨스와
빠지지 않는 출생의 비밀

물론 포옹과 키스로 마무리되는 이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로맨스 드라마를 미심쩍게 만드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아무리 주인공의 연적이라 해도 청소년인 서브 캐릭터가 쇼핑을 가서 보란 듯이 갑질을 하는 장면이나 ‘국제학교’라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포옹과 키스를 비롯해 교정 곳곳에서 벌어지는 애정 행각은 “여기가 한국인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발각되면 매장”인 행위는 미성년자의 음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자기 앞가림하기도 급급하면서 남의 일에만 독보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주인공의 과도한 오지랖은 다소 때 지난 드라마투르기같이 보이기도 하고, 한국의 청춘 드라마 주인공을 닮았다기보다는 서구 로맨스 전형인 제인 오스틴의 <엠마>나 그를 원작으로 삼았던 <클루리스>(1995년) 같은 미국의 하이틴 로맨스물을 떠오르게 만든다.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일까지 자기 일처럼 여기는 열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시청자의 냉정한 눈으로 보기에 키티의 행동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민폐’로 여겨질 수 있다. 같은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라도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처럼 자신의 감정에 둔감하고 표현에 서투른 주인공이 K-드라마에서는 좀 더 쉽게 공감을 얻을 것처럼 보인다. 때맞춰 나오는 음악들은 따로 번역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덕분에 얼음도 없이 식어서 김빠진 콜라처럼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형적인 미국 하이틴 로맨스의 베이스에 K-드라마라는 토핑을 ‘따따블’로 잔뜩 얹은 이 드라마를 보며 불안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어디선가 몇 번은 본 것처럼 낯익은, 너무도 낯익은 클리셰들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초반 K-드라마가 대만, 중국,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각 지역에서 ‘한류’ 몰이를 할 무렵에도 ‘한국의 멜로드라마에 꼭 있는 4가지’ 같은 기사가 화제가 되곤 했었다. 돈 많고 다정다감한 남자 주인공, 형편이 어렵지만 청순가련형의 미인인 여자 주인공, 모든 갈등을 한 방에 해결하는 마스터키인 불치병 그리고 출생의 비밀. 시대가 흐르면서 캐릭터의 전형적인 성격도 바뀌고, 의학의 발전과 더 무시무시한 장애물(분단·저주·요괴·사이코패스·연쇄살인범 등)의 등장에 따라 불치병은 사라졌지만, 출생의 비밀은 <엑스오, 키티>에까지 유전자의 기억처럼 확고부동하게 남아 있다.

태평양을 날아서 찾아온 첫사랑과의 첫 키스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난 뒤, 키티는 다락방의 궤짝 속에서 찾아낸 엄마의 소녀시대와 아버지가 다를지도 모르는 형제 또는 자매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알고 보니 내 오빠가 아니라 남의 오빠(정확하게는 연적의 오빠)였던 과학 선생님은 신데렐라의 요정 대모님처럼 알게 모르게 키티의 한국 생활을 돕고, 가족들은 아무도 모르는 엄마의 비밀(아빠가 엄마가 첫사랑이 아니라는)을 알게 된 키티는 자기만의 비밀을 성장의 징표로 삼지만, 난데없는 출생의 비밀이 꼭 필요했을까 피어오르는 의심은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꺼지지 않는다.

K-드라마의 클리셰가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던 <드라마월드>를 보면서 놀라고도 부끄러웠던 기억은 이렇게 안아주고 싶게 사랑스러운 <엑스오, 키티>에서도 다시금 두 볼을 화끈하게 만든다. ‘아직도 외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이런 모습인가’ 싶은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진다. 타인의 눈에 비친 이런 모습의 ‘한국’은 왜 놀랍고 부끄러운가. 얼핏 보기에도 구태의연한 클리셰가 너무 버젓이 우리를 대변하고 있어서? 좀 더 참신하고 창의적인 ‘우리’의 독창성을 보여주지 못해서? 1인치의 장벽을 넘어서게 만든 <기생충>, 세계를 초토화시킨 <오징어게임>, 시크하기 짝이 없는 K-할매 배우 윤여정이 있는 나라의 콘텐츠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해서? 자랑거리인 K-드라마가 결국은 속 빈 강정 같은 클리셰 범벅이라는 점이 떳떳하지 못한 걸까.
K-드라마월드는 확장 중
클리셰는 장르의 힘이다
클리셰는 너무 남용된 나머지 새로움과 본래의 의도를 잃어버리고 진부해진 표현이나 개념, 상황, 기법, 묘사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는 서사나 진부한 연출도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에 창조적인 작업에서는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낯설게 하기’가 문학과 예술의 전제로 인식되는 관점에서는 분명 그렇다. 대개의 경우 패러디를 통해 희화화되거나 풍자되는 것이 아닌 이상 클리셰는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 절하된다.

그러나 장르의 관점에서 보건대, 사실 클리셰는 하나의 장르가 형성되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애초에 왜 클리셰라는 것이 생기는가. ‘남용’, 즉 넘칠 만큼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처럼 대중의 인기에 의해 지속가능성이 결정되는 문화 콘텐츠의 경우, 이미 성공이 보장된 패턴은 언제나 벤치마킹의 대상이 된다. 실패하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위험을 피하느라 성공 요소들을 모방하고, 그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을 정도로 덧붙이거나 빼거나 비틀면서 엇비슷한 콘텐츠들이 쌓여 가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통의 요소들이 추출되고 기본적인 컨벤션이 형성되며 경계가 분명해지고 범위가 확장된다. 하나의 장르가 너무 공고해져서 너 나 없이 그 컨벤션을 따라가기 시작하면서 신선함을 잃어버리고, 생명력이 마모된 서사나 연출, 표현, 개념, 상황, 기법, 묘사 등은 마침내 ‘클리셰’라고 불린다.

너무 흔해져서 더 이상 매력이 없는 클리셰들로 가득한 장르는 서서히 시들고, 반짝반짝 빛나는 새로움으로 가득 찬 낯선 장르들이 피어나거나, 과거의 장르들끼리 교차하거나 병합하면서 또 다른 장르를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그 안에서 꺼져 가는 불씨인 줄만 알았던 이쪽 장르의 클리셰가 저쪽 장르의 참신한 관습으로 별다르게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기억이 유전자를 통해 전해진다면, 장르의 기억은 클리셰를 통해 유전된다. 우리의 두 볼을 발갛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부끄러운 클리셰의 기억은 어찌 보면 놀랍게도 K-드라마월드가 확장하고 있다는 비할 바 없이 확실한 증거다.

글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