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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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둔촌주공아파트 공사 중단 사태는 이제껏 없었던 신선한 충격으로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다. 둔촌주공 사태는 공사비 인상과 공사 중단, 조합원 분양가 상승 등 사업 기간 장기화로 인해 조합원들의 피해는 물론, 조합과 시공사 간 갈등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으로도 기억된다

이같은 사례는 조합 방식의 부동산 정비사업에 대한 고질적 문제가 드러난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합 방식의 정비사업은 정비계획 수립, 건축 설계 등 초기 인허가 관련 모든 비용을 직접 조달해야 한다. 착공과 조합원 이주 등 사업 절차가 후반부로 갈수록 사업비 부담은 더욱 커져 원활한 자금조달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정비사업 초기 단계에서부터 시공사로부터 사업 자금을 대여하거나 대출보증을 받아 사업을 빠르게 추진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사실상 시공사가 대주단 역할을 함으로써 조합은 가격 협상력과 사업의 주도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존재한다.

자금력이 취약한 조합일수록 시공사와의 유착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조합 방식의 정비사업에 있어 다수의 시공 계약은 ‘분양불 공사비 지급 조건’(분양자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받아 준공까지 공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분양 리스크와 조합의 낮은 신용도 등 정성적 위험요인이 공사비에 포함되기 때문에 사업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공사비의 적정 여부에 대한 검증도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설계 변경, 물가 상승 등의 이유로 공사비 상향 조정 시 시공사와 조합의 갈등이 고조되는데, 조합의 전문성 부족으로 인상 비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한국부동산원의 공사비 실무 검증 제도가 존재하지만 인허가 기관 민원 제기, 행정소송 등 사업 기간 지연과 비용 발생이 불가피해 결국 사업 기간이 지연되면서 발생한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들의 몫이 된다.

신탁사, 자금력과 전문성 갖춰… 신속한 정비사업 견인 장점

고질적인 문제를 지닌 정비사업에 드디어 변화의 바람이 부는 걸까. 부동산 경기가 꺾이고 정비사업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신탁 방식의 정비사업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신탁 방식의 정비사업이란 소유자(위탁자)와 신탁자(수탁자) 간 신임 관계를 바탕으로 신탁사로 하여금 수익자(소유자 또는 소유자가 지정한 제3자)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그 재산의 관리·처분·운용·개발 행위가 가능하도록 만든 법률제도다.

2016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정법) 개정을 통해 신탁사가 사업시행자로 참여하는 것이 허용됐으나 제도적 미비, 대중성 부족 등의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여의도 공작·한양아파트, 목동 14단지, 동작구 상도 14구역 등 16개 이상의 서울 주요 정비사업구역이 신탁사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는 등 신탁 방식의 정비사업을 선호하고 있다.

분양 시장 침체와 건설 원가 상승,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금리 인상 등 악재 속에서 조합은 신탁 방식을 통해 사업비 조달에 대한 부담을 경감할 수 있다. 신탁사가 시행자로 참여해 사업비용 조달부터 분양까지 일련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신탁사의 신탁계정을 통해 직접 사업비 투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탁사의 자체적인 신용 보강을 통해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 또는 금융기관으로부터 저리 사업비 대출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사업비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다. 조합이 신탁사를 통해 정비사업의 주도권을 갖고, 시공사에 대한 협상력 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공사로부터 사업비 대여가 불필요해 신탁사의 자금력만으로 조합의 정성적 리스크가 경감된다.

이를 통해 기성불 방식(건축 공정률에 따라 공사비를 지급하는 방식)의 도급계약 체결이 가능해 분양불 방식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공사비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사업구역 내 소유자들은 정비사업 절차 시 발생하는 비용적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빠르게 해결할 수 있어 사업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또한 신탁사의 전문성을 통해 정비사업의 지연 요소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정비사업 절차상 초기 단계인 조합 설립 인가(신탁사업대행자 방식)나 정비구역 지정(신탁사업시행자 방식) 이후부터 시공 조건, 정비계획에 따른 건축 설계 및 비용 내역 등 사전에 시공사와 구체적인 협의를 통해 잦은 설계 변경을 예방할 수 있다. 향후엔 시공사의 공사비 인상 요구 시 이에 대한 빠른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딘 정비사업, '신탁 방식 재건축'이 해법 될까
신탁 방식 정비사업의 체크포인트는

신탁 방식의 정비사업을 진행하고자 한다면 사업자 지정을 위한 소유자 동의 요건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신탁사업자 방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최소 토지 등 소유자로부터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사업 토지면적의 3분의 1 이상 토지 신탁이 사전에 이뤄져야 한다.

친숙하지 않은 토지 신탁에 대한 거부감과 향후 개발 이익의 1~4%를 수수료로 신탁사에 지급해야 하는 등 동의를 받는 과정에서 주민 반대로 사업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토지 등 소유자들의 동의율 확보가 관건이다. 최근 신탁업자가 정비사업을 시행할 경우 주민·신탁업자 간 공정한 계약 체결을 위해 표준계약서 및 시행 규정을 마련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신탁 수수료 조정 가능 여부, 계약 해지 요건, 신탁사에 정보공개 청구 등 모호했던 시행 지침이 구체화된다면 동의율 확보가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 신탁 방식 정비사업의 성공 사례도 필요하다.

신탁사를 통해 절감할 수 있었던 사업비용 내 신탁 보수가 책정되고, 조합 방식보다 적은 사업비로 성황리에 사업을 마친 성공 사례가 나온다면 과다한 신탁 수수료에 대한 불신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신탁 방식 정비사업에 대한 편견도 해소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신탁사가 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요 현안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할지 여부다. 신탁추진위원회 등 주민 구성 대표 기구를 설치해야 하고, 구체적인 운영 지침을 명시한 규정을 인허가 기관에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신탁사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은 불가능하다.

시공사 선정 등 주요 안건도 마찬가지다. 도정법 및 업무 지침에 따라 타 정비사업장처럼 정부 입찰 시스템을 통해 입찰을 받은 후 주민 회의 투표로 결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신탁 방식 정비사업에 지나친 오해도 있다. 이 같은 오해로 현재 신탁 방식 정비사업장의 비중은 전체 사업장의 4%에 불과하다.
더딘 정비사업, '신탁 방식 재건축'이 해법 될까
‘신탁 방식 재건축’ 활성화 탄력 붙나

현 정부가 2022년 발표한 8·16 부동산 공급대책을 살펴보면 서울 등 주요 지역 내 정비사업을 통해 공급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50만 호 공급 계획 목표 물량 중 30% 이상이 정비사업을 통해 공급하는 것으로 계획돼 있다.

이러한 기조로 인해 서울 신속통합기획, 모아타운, 노후 신도시 특별법 등 구도심 개발 활성화 목적 정비사업 관련 정책이 연달아 시행되고 있다. 또한 속도감 있는 정비사업이 가능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속도감 있는 정비사업을 위해 정부가 선택한 대표적인 수단은 신탁사다. 8·16 대책 언급을 시작으로 꾸준히 신탁 방식 정비사업을 권장하고 있다. 신탁 활성화를 목적으로 최근 법안 신설·개정을 통해 신탁사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해주고 있는 것이다.

민간(신탁사)의 자본력을 활용해 정비사업 속도를 제고하고, 공공 주택 및 장기임대주택 등 규모의 공급을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가 신탁사이기 때문이다. 이번 도정법 개정을 통해 소유자 동의율을 충족했다면, 신탁사가 입안권자에게 정비구역 지정 제안이 가능해진다.

또한 신탁사 제안을 통한 정비구역 지정 시 동시에 사업시행자로 지정돼 정비계획과 사업시행계획을 통합 처리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소유자(주민) 주도의 정비사업에서 전문성을 갖춘 신탁사 주도하의 정비사업으로 점차 변모하고 있다.

향후 신탁 방식으로 정비사업을 진행할 경우 정비계획 수립부터 사업시행 인가까지 사업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게 돼 신탁사가 활동 중이거나 참여 예정인 지역의 경우 사업 속도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역세권 개발사업이 진행되는 곳에서 신탁 방식 정비사업이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도정법 개정으로 노후도 요건을 갖춘 역세권 정비구역일 경우 종상향을 통한 법적 상한 용적률 적용이 가능해진다.

이는 이미 진행 중인 사업구역도 적용될 수 있다. 이로써 서울시에 국한돼 진행됐던 역세권 활성화 사업이 향후 전국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용적률 완화 특례를 통해 사업성이 담보되고, 서울 역세권 시프트 추진 지역 내 다수의 참여 경험이 있는 신탁사 입장에서 신사업 교섭을 목적으로 역세권 정비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책적 후광을 등에 업고 업그레이드된 신탁 방식 정비사업의 제도적 강점과, 신탁사 고유의 전문성, 자금력, 관리 능력이 결합된다면 향후 정비사업의 대세는 신탁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정비사업의 발목을 잡았던 공사 부실, 건설 경기 침체 등의 이슈가 난무한 현시대에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볼 만하다.


글 남혁우 우리은행 자산관리컨설팅센터 부동산자문팀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