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상속은 사망자의 총체적인 재산이 승계되는 것이어서, 부동산이나 예금과 같은 적극재산은 물론이고 은행 채무나 임대차보증금 채무와 같은 소극재산도 함께 이어받게 된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부모가 진 빚은 갚지 않는다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산한 부모가 남긴 막대한 빚 때문에 남은 가족이 자신의 의지나 잘못 없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그 또한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무조건 상속을 받는 것이 강제된다면, 상속인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법은 상속인에게 상속재산의 당연 승계를 인정하면서도 상속을 포기할 자유 또한 부여하고 있다.
가령, 사망자의 재산을 일절 상속받지 않음으로써 상속인으로서의 지위 자체를 포기하는 ‘상속포기’와, 상속을 받기는 하되 사망자가 남겨준 적극재산의 한도 내에서만 그 빚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한정승인’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우선, 상속이 개시된 후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은 상속 개시, 즉 피상속인이 사망한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에만 가능하다.
상속포기의 조건
다음으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은 상속인이 내심 상속을 받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거나 다른 상속인이나 채권자들에게 그러한 생각을 표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가정법원에 그러한 의사(意思)를 담은 신고를 해서 가정법원으로부터 그 신고를 받아들이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상속인이 잘 몰라서 또는 실수로라도 상속재산을 분할하거나 매각, 소비하는 등의 방법으로 처분한 경우에는 상속을 조건 없이 승인(承認)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법정단순승인), 그때부터는 피상속인 사망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라고 하더라도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의 중대한 잘못 없이 신고 기간을 놓친 경우 등에는 예외적으로 구제해주는 특별한정승인과 같은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롭고 그 과정에 여러 어려움이 있으므로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상속이 개시되면 구청이나 주민센터, 온라인 정부24 등을 통해 신청할 수 있는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 등을 이용해 신속하게 상속재산과 채무를 파악하는 등 상속재산을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상속재산으로 추정되거나 의심되는 재산은 위와 같은 조사가 모두 끝나기 전에는 섣불리 분할이나 처분을 하지 말아야 하며, 유산의 승계 여부와 방법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는 것이 좋다.
상속포기는 이처럼 상속재산 중에 적극재산보다 소극재산이 많을 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적극재산이 더 많아서 상속을 받으면 분명 자신에게 이득이 됨에도 불구하고 상속을 포기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 그럴까.
먼저, 자기 자신의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상속인이 그 빚을 갚지 않으려고 상속을 포기하는 경우다. 상속인의 채권자 입장에서는, 빚을 갚지 않고 있는 채무자가 그 부모의 사망으로 상속을 앞두고 있다면 채권자는 머지않아 채무자가 상속받은 재산으로 채무를 변제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채무자인 상속인이 그러한 기대를 저버린 채 상속받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면 상속인의 채권자는 구제받을 길이 없을까.
자신이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피해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기 재산을 숨기거나 제3자에게 증여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재산을 감소시키는 것을 ‘사해행위(詐害行爲)’라고 하고, 이러한 채무자의 재산 감소 행위를 채권자가 취소하고 그 재산을 채무자의 재산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권리가 ‘채권자취소권’이다. 상속인에 대하여 받을 돈이 있는 채권자로서는 채무자의 상속포기가 사해행위에 해당하므로 취소하고 상속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당한 상속분을 상속받게 한 후 그 재산으로부터 자신의 채권을 변제받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상속의 포기는 사해행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상속의 포기가 비록 포기한 사람의 재산 상황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상속을 포기한 사람은 처음부터 상속인이 아니었던 것으로 취급될 뿐 아니라 상속포기는 재산적인 고려 외에도 피상속인 또는 후순위 상속인 등 다른 가족이나 친척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고려한 결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속인의 채권자 입장에서는 상속의 포기가 그의 기대를 저버리는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속인의 재산이 현재의 상태보다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해행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상속인이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속포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공동상속인들 사이에 상속재산 분할의 한 방법으로 상속포기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속포기로 인해 다른 상속인의 상속 순위나 공동상속인의 상속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세대를 건너뛴 상속과 상속포기
관련하여 상속포기와 상속 순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상속인이 되는 순서는 법률에서 정하고 있는데, 자기보다 앞선 순위의 상속인이 있으면 후순위의 상속인은 상속을 받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고, 같은 순위에 있는 상속인이 여러 명이면 함께 상속인이 된다. 피상속인의 자식 또는 손자손녀 등의 직계비속이 1순위 상속인이 되고, 그러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피상속인의 부모 또는 조부모, 외조부모 등의 직계존속이 2순위 상속인이 된다. 자식이나 부모 등이 없을 때에는 피상속인의 형제자매가 3순위 상속인이 되고, 그마저도 없으면 삼촌, 고모, 이모, 외삼촌, 사촌 형제 등이 4순위로 상속인이 된다.
피상속인의 배우자는 피상속인에게 1순위 직계비속이 있는 경우는 그들과 함께, 피상속인에게 직계비속은 없고 2순위 직계존속이 있는 경우에는 그들과 동(同) 순위로 상속인이 되는데, 이마저도 없으면 배우자 혼자 상속인이 된다(형제자매나 3촌·4촌 등 3·4순위 상속인은 배우자보다 무조건 후순위 상속인이 된다). 예를 들어 피상속인에게 딸과 손자, 손녀, 아내, 부모가 있으면 2순위인 부모를 제외하고 1순위 중 최근친(最近親)인 딸과 아내가 함께 상속인이 되고, 사망한 사람이 미혼으로 부모만 있는 경우에는 1순위 상속인이 없으므로 2순위인 부모가 함께 상속인이 되며, 사망한 사람에게 남편과 남동생이 있는 경우에는 배우자인 남편이 혼자 상속하게 된다.
만일 앞선 순위의 상속인들이 모두 상속포기를 하면, 원칙적으로 다음 순위의 상속인이 상속을 받게 되며, 앞선 순위의 여러 상속인들 중 일부만이 상속을 포기했다면 포기한 상속인의 상속분은 앞선 순위의 나머지 상속인들에게 그들 각자의 상속분의 비율로 나뉘어 귀속된다. 따라서 상속포기는 상속 순위나 공동상속인의 상속분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은 피상속인의 배우자를 제외한 혈족(血族)들 사이에서만 상속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정확하게 지켜지는데, 배우자와 혈족이 함께 상속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예를 들어, 피상속인에게 배우자와 자녀들 및 손자녀들이 있는데 자녀들이 모두 상속포기를 하면 배우자가 단독으로 상속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손자녀들과 배우자가 공동으로 상속하게 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자녀들이 모두 상속포기를 하면 배우자와 손자녀들이 공동상속인이 된다고 판결했다가, 2023년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견해를 변경했다. 즉,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는 손자녀까지 내려가 공동상속인이 되지 않고 배우자가 단독으로 상속한다고 판결했다.
한편 세금을 줄여보기 위해 피상속인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모두 상속포기를 해서 손자녀에게 상속이 되게 하면 상속세는 어떻게 될까. 보통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에게 바로 상속이 이루어지거나 유증(유언으로 하는 증여)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러한 상속이 아버지가 할아버지 사망 전에 사망하거나 상속 결격이 돼 일어나는 대습상속(代襲相續)이 아닌 한, 보통의 상속세 산출세액에 30% 내지 40% 정도의 가산 금액을 상속세로 정하게 된다. 따라서 상속포기라는 방법으로 세대를 건너뛴 상속이 이루어졌다면, 상속세 등을 두 번 내지는 않지만 할증과세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김성우 법무법인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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