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투자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산업이 다시 뜨고 있다. 인공지능(AI) 붐으로 인해 전력 수요가 높아지면서 전력 인프라, 에너지 관련주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다.

[커버스토리]
독일 라이프치히의 데이터센터 내부. 사진=연합DPA
독일 라이프치히의 데이터센터 내부. 사진=연합DPA
최근 AI 산업 발전의 가장 큰 변수는 ‘AI 칩’이 아니라 ‘에너지’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아지고 있다. 전 세계 전력 인프라가 AI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전력연구소(EPRI)는 오는 2030년 미국 데이터센터의 연간 전력 사용이 지난해에 비해 최대 166% 늘어난 403.9테라와트시(TWh)까지 증가할 수 있다고 봤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29% 증가한 196.3TWh까지는 연간 전력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모건스탠리도 오는 2027년에는 생성형 AI가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33%가 위치한 미국의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2022년 200TWh에서 2026년 260TWh로 증가할 전망이다. 미국 전체 전력 사용량의 약 6%에 해당하는 양이다.

여기에 AI 외에도 전기차 등 성장이 예상되는 미래 산업군이 대부분 많은 전력 사용량을 요구하고 있어, 향후 전력 수요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전망이다. 닐 칼튼 웰스파고 연구원은 “(미국 내) 전력 수요가 2030년까지 연평균 2.6%씩 늘어날 것”이라며 “2023년 4000TWh에서 2050년 7300TWh로 급증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전력이야”…AI 붐에 덩달아 뛰는 전통株
AI 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빅테크 업계 거물들도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데이터센터의 수익성을 결정하는 데 전기가 핵심 요소”라며 “AI가 소비하는 전력량이 엄청나다”고 지적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또한 “향후 AI의 성장은 전력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과 관련해 우려 섞인 전망을 내놓은 것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마찬가지다. 그는 “2025년이면 전력과 변압기 부족 현상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력 인프라 등 AI 확산에 '날개'

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전력 인프라 기업들은 날개를 단 모습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자자들의 관심권에서 밀려나 있던 이들이 AI 시대를 맞아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우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떠받치는 전력 설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초고압 변압기와 고압케이블을 포함한 전선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경우 노후화된 변압기의 교체가 시급한 상황이다. 지난해 10월 바이든 정부는 35억 달러 규모의 전력망 노후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2027~2028년까지 미국 내 변압기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문제는 전력이야”…AI 붐에 덩달아 뛰는 전통株
국내 기업 중에서는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을 전력 인프라 수혜주로 꼽을 수 있다. 두 기업의 주가는 올 들어 3~4배가량 상승했다. 지난해 말 주당 8만 원 초반대였던 HD현대일렉트릭 주가는 6월 22일 기준 31만7000원까지 뛰었고, LS일렉트릭은 같은 기간 7만 원 초반대에서 21만 원까지 올랐다.

과거에는 지멘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소수 글로벌 강자들이 전력 인프라 시장의 대부분을 독식했지만 최근 들어 이들만으로는 넘쳐나는 수요를 따라잡기 힘든 상황이 됐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우리나라의 변압기 수출액은 5억4482만 달러로 지난해에 비해 81.9% 급증했다. 같은 기간 전선 수출도 지난해보다 45.7% 늘어난 6억7571만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이상현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요 전력 설비의 수출 시장인 북미에서 AI와 데이터센터, 리쇼어링 등으로 전력 시장이 성장하고, 중동에서는 사우디 네옴 프로젝트의 재생에너지원 운영 목표로 인해 우호적인 수주가 전망된다”며 “호황 사이클이 이어지면서 신규 수주 증가세가 가속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전력이야”…AI 붐에 덩달아 뛰는 전통株
원자재 중에서는 구리가 중장기적인 수혜주로 꼽힌다. 전선의 주요 소재인 구리 역시 AI 열풍의 영향권에 있는 원자재다. 다만 최근에는 주요 원자재 생산 국가의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가격이 주춤하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상장지수펀드(ETF), 전선주 등을 통한 간접투자를 조언한다.

박광래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발전 설비와 송배전 시설에 구리가 투입되며 매년 100만 톤 이상의 신규 수요가 창출될 전망”이라며 “단기적으로는 공급 과잉 우려로 박스권 흐름이 나타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구리 가격 상승이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2000년 ‘닷컴 붐’ 당시 돈이 몰렸던 광통신망 시장도 AI 시대에 재평가될 산업 중 하나로 꼽힌다. AI 확산으로 더 많은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통신 인프라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나성두 SK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기존 데이터센터와 달리 AI 전용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경우 광통신망의 비중 약 5~8배 증가한다”며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의 광통신망 구축 비율이 매우 낮아 재정비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력난 우려 속 SMR·태양광 등 대안에 '주목'

AI발 전력난 우려가 커지면서 원자력 발전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에도 새로운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원전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고도 전기를 공급할 수있는 강력한 공급원이다. 그동안 방사성 폐기물 등 안전성 우려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 온 유럽 등 주요국들이 최근 전력 수요 이슈가 부각되면서 이를 정책 유턴에 나서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대형 원전보다 위험성이 낮은 소형모듈원전(SMR)이다. 대형 원전에 비해 건설 비용도 10% 수준으로 저렴하다. SMR 수혜주로는 국내 원자력 업종의 대장주인 두산에너빌리티가 꼽힌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최근 미국 최대 SMR 설계 업체인 뉴스케일파워가 짓는 370억 달러(약 50조 원) 규모 SMR 건설 프로젝트에 원자로, 증기발생기튜브 등 주 기기 납품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발전소 전력을 소비 지역으로 연결하는 고압 송전선. 사진=연합DPA
발전소 전력을 소비 지역으로 연결하는 고압 송전선. 사진=연합DPA
박세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장기적으로 SMR의 잠재력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SMR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무전원상실사고(SBO) 시에도 최소 72시간 동안 외부 지원 없이 원자로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고, 내진 설계가 가능해 안전성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원전과 함께 태양광도 새로운 전력원으로 주목받는다. 대표적인 기업은 미국 유틸리티 태양광 업체인 퍼스트솔라다. 퍼스트솔라의 주가는 올해 1월 초 146.30달러에서 6월 22일 258.87달러로 76.9%가 올랐다. USB, 골드만삭스 등이 주목하는 AI 시대 에너지 수혜주이기도 하다. 존 윈드햄 UBS 애널리스트는 “데이터센터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잠재적인 수요를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태양광 프로젝트는 오랜 기간 동안 수요가 공급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고 내다봤다.

정초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