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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끓는 지구, 사피엔스와 공존의 가치[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간혹 시간 날 때 동영상으로 진화생물학자들의 동영상 강의를 듣곤 합니다. 듣고 있으면 잠시 악다구니 쓰듯 사는 현실에서 벗어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시간 앞에서 나는, 인간은 어떻게 지금에 다다랐는지를 생각합니다. ‘마지막 네안데르탈인은 자신의 죽음이 종의 멸종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같은 얘기를 들으면 삶 앞에 겸손해지기도 합니다.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에 사는 동물 중 가장 막둥이입니다. 탄생한 지는 대략 20만 년쯤이고 5만~6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공존의 기술은 배우지 못한 듯합니다. 이후 사피엔스를 제외한 다른 호모 종들은 모조리 멸절시킨 후 1만여 년 전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앉습니다.1만 년.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기간입니다. 길어 보이지만 공룡이 지배한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룡은 멸종하기 전까지 1억4000만 년간 지구를 지배했습니다. 사피엔스가 지배한 기간은 점 하나도 찍기 힘들 겁니다.하지만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 시간에는 미스 매치가 있었습니다. 공룡은 하루아침에 멸종하지 않았습니다. 수십만 년 걸렸습니다. 새로운 지배자가 될 포유류는 진화할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이후 사자가 생태계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데도 수백만 년이 걸렸습니다. 자연이 준 이 시간 동안 영양 같은 동물들은 쉽게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도록 더 빨리 달리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공진화의 과정이었습니다.사피엔스는 달랐습니다. 순식간에 지배자가 됐고 이로 인해 다른 동물들이 진화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지배한 1만 년 사

    2023.08.14 10:02:10

    끓는 지구, 사피엔스와 공존의 가치[EDITOR's LETTER]
  • 상온 초전도체, 이 낯선 용어에 우리는 왜 흥분할까[EDITOR's LETTER]

    [EDITOR's LETTER]“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이지 않다.”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에 새삼 공감이 가는 시간입니다. 연구실에서 무언가 개발에 성공하면 환호가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결과물이 연구실을 빠져나오는 순간 인간과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킵니다. 돈과 권력 등의 요소가 뒤섞이며 기술은 순수성을 상실합니다.곧 개봉될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 일생만 봐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 아인슈타인이 제안하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만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 천재들을 이끈 인물이 오펜하이머입니다. 그는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된 후 이런 말을 합니다. “과학자라는 죄를 알아 버렸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을 제조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합니다.정부는 그를 소련 스파이로 몰아갑니다. 과학자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임무를 완수하고 양심에 따라 더 큰 희생을 거부한 것이 죄였습니다. 대가는 68년간의 스파이 혐의였지요. 맨해튼 프로젝트는 권력으로서의 기술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변질시킨 대표적 사건이었습니다.최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단어는 ‘상온 초전도체’입니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비싸고 귀한 자원 ‘언옵테늄’이 초전도체입니다. 저항이 사라져 에너지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물질. 자기 부상 열차를 현실로 만들고 에너지 혁명을 일으킬 ‘상온 초전도체’.이를 한국 연구진이 발견했다는 초보적 결과물을 내놓은

    2023.08.04 09:30:31

    상온 초전도체, 이 낯선 용어에 우리는 왜 흥분할까[EDITOR's LETTER]
  • 이상한 나라의 푸바오[EDITOR's LETTER]

    몇 달 전 한 친구와 통화했습니다. 머리가 복잡하다고 했더니 동영상 링크를 하나 보내 줬습니다. 판다 두 마리가 투닥거리는 영상이었습니다. 제목은 ‘사춘기 온 푸바오, 분노한 아이바오 등짝 스매싱.’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이후 머리가 무거울 때마다 푸바오를 찾기 시작했고 추천 영상은 곰으로 도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이 곰 한 마리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과학적으로는 동물을 보고 있으면 혈압이 하락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심리적·육체적 혜택을 본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동물과의 상호 교감을 통해 정신적 안정감을 주는 ‘애니피(animal theapy)’라는 치유법도 있지요. 이것만일까.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실 사회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현실을 볼까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보는 게 힘들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비 좀 많이 왔다고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구명조끼도 없이 수해 지역에 투입된 해병대 청년도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젊은 선생님은 학부모의 압박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월세가 싼 원룸을 찾으러 신림동에 왔다가 일면식도 없는 인간이 휘두른 칼에 맞아 숨진 취업 준비생의 삶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작년 10월 이태원 골목 참사 현장에는 아직도 추모의 글들이 남아 있는데 우리는 계속 젊은 생명들을 잃고 있습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책임을 피하고 떠넘기기 바쁩니다.주변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 가면 진심으로

    2023.07.31 07:57:28

    이상한 나라의 푸바오[EDITOR's LETTER]
  • 하늘로 간 에코프로 주가, 그리고 터닝포인트[EDITOR's LETTER]

    화제의 주식 에코프로의 주가가 오를 것이라고 확신한 것은 작년 6월께였습니다. 에코프로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실적 전망과 경쟁력 등에 대한 대략적 얘기만 들었을 뿐인데 ‘이 회사 잘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전에 이동채 전 회장이 어떻게 사업을 시작하고 실패했고,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었는지 취재해 둔 덕에 신뢰가 갔습니다.물론 결정적으로 주가 상승을 확신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제가 주식을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식을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오르는 마이너스의 손이기에 ‘내가 주식을 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에코프로는 믿을 수 있었습니다.한동안 잊고 있다가 4월께 주가를 보니 ‘역시’ 법칙대로였습니다. 배아픔이 밀려왔습니다. 통증을 뒤로하고 그간의 과정을 살펴보니 몇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먼저 코로나19 사태 때 있었던 ‘동학개미 운동’과의 유사성입니다. 일부에서는 ‘동학’이란 단어를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학은 실패한 혁명이라 부적절하다”고 이유를 댔습니다. ‘대중과 혁명에 대한 알레르기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무시했습니다. 어찌됐건 동학개미는 코로나19 시대의 희망과도 같은 단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주가는 3000선을 돌파했습니다.에코프로를 황제주로 만든 것도 기관이 아니라 개인들이었습니다. 불확실한 시대에 희망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일본 주식은 오르고 미국 빅테크도 고점을 찍었지만 한국 시장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산업적으로도 전기차는 중국의 기세가 무섭고 반도체는 추격당하고 바이오는 시들했습니다. 이럴 때 전기차에 들

    2023.07.25 14:12:50

    하늘로 간 에코프로 주가, 그리고 터닝포인트[EDITOR's LETTER]
  • 기시다의 쇼타임, 그래도 정책의 기술은 있었다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소니 워크맨과 TV, 도요타 자동차, 조지루시의 코끼리 밥솥, 그리고 마일드세븐. 1980년대 일본 제품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자동차부터 샤프까지 ‘일제’라고 하면 최고로 쳐줬습니다.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곤도 마사히코의 노래 ‘긴기라기니’가 길거리를 장악하고 갤러그가 한국의 오락실을 점령한 것도 1980년대였습니다. 방송도 일본 것을 베꼈습니다. 일본의 전성기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전성기는 막을 내립니다.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의 버블 경제는 외부 충격과 정책 실패, 잘못된 전략이 어우러져 몰락의 방정식을 완성합니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팔을 비틀어 반도체 산업을 파괴했습니다. 일본은 장기 불황에 들어간 지도 모르고 금리를 올렸습니다. 기업들은 시장 변화를 무시하고 고품질에 집중하다가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일본 업체들 자리의 상당수는 한국 기업들의 차지였습니다. 반도체·가전·자동차 등은 물론 코끼리밥솥 자리까지 쿠쿠가 대체했습니다. 그랬던 일본 경제가 최근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몰락의 방정식은 역으로 작용하며 부활의 디딤돌이 됐습니다. 미·중 무역 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중심 국가로 선정한 듯합니다. 워런 버핏은 일본 종합상사에 투자하고 마이크론은 공장 증설에 나섰습니다. 한국과 대만도 미국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양보를 거듭하며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섰고 삼성전자는 일본에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대만 TSMC는 일본 내에 반도체

    2023.07.10 06:00:04

    기시다의 쇼타임, 그래도 정책의 기술은 있었다 [EDITOR's LETTER]
  • 당신은 어떤 리더입니까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좋은 리더십을 구성하는 마법의 성분은 여전히 수배 중이다.”리더십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리더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경영 구루 톰 피터스조차 “리더십의 첫째 슬로건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 정도니 말입니다.종합 예술가로 불리는 마에스트로들을 통해 그 성분이 왜 수배 중인지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첫째 인물은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입니다. 그는 다혈질의 폭군이었습니다.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휘봉을 던지고 꺾어 버리기도 했죠. 별명이 ‘베수비오 화산’이었습니다. 미국 NBC 심포니 단원들은 그를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폭발이 오롯이 음악에 대한 열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1957년 토스카니니가 세상을 떠나자 악단은 1년간 지휘자 없이 추모 연주를 하고 해산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리더십에 대한 최고의 존경을 표한 것이지요.다음은 베를린필을 35년간 이끈 폰 카라얀입니다. 그는 세상의 흐름과 인간의 심리를 이해한 마에스트로였습니다. 1940년대 후반 LP 시대가 열립니다. 많은 음악가들이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고 무시했지요. 하지만 카라얀은 집에서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온 것을 직감하고 LP 녹음에 집중했습니다. 1980년대 CD가 등장했을 때도 가장 먼저 반응했습니다. 이를 통해 크게 성공했습니다.심리를 파악하는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지휘자가 연주자와 눈을 맞추며 교감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지만 그는 때때로 눈을 감고 은발을 흩날리며 지휘봉을 휘둘렀습니다.“음악의 내면에 집중하기

    2023.07.03 08:43:19

    당신은 어떤 리더입니까 [EDITOR's LETTER]
  • 정주영은 어떻게 신화가 됐나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2007년 어느 날, 현대중공업 울산 공장에 취재를 갔습니다. 공장에 들어서자 플래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길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길이다.”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안내를 맡은 부장급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요즘이 어떤 시절인데 저런 걸 붙여 놓는 거지요. 저걸 보면 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정주영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요즘도 저 글귀를 보면 마음이 찡합니다.” 정 회장 지시로 바다를 메워 조선소를 지은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40년간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한국 조선업의 출발은 이제 신화가 됐습니다. 벌어진 일도 신화에 가깝습니다.1960년대 건설업으로 성공한 정 회장은 1970년대 들어 조선업 진출을 결심합니다.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중화학 공업으로 가야 한다. 건설업 현장을 바다로 옮기는 것이 조선업이다.” 하지만 공장도, 돈도, 기술도 없었습니다. 차관이 필요했습니다. 정 회장은 미포만 백사장 사진, 지도, 빌린 도면만 달랑 들고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선박금융이 발달한 영국이 그의 행선지였습니다. 바클레이스은행을 찾아 갑니다. 당연히 거절. 미치지 않고서야 공장도 없는 후진국 기업에 돈을 빌려줄 리 만무했겠지요.수소문 끝에 은행에 영향력 있는 영국 선박 컨설턴트 롱바통 회장을 찾아가 추천서를 부탁했습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500원의 신화’가 탄생합니다. 거부하는 롱바통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 뒷면에 있던 거북선을 보여주며 설득합니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2023.06.26 06:00:05

    정주영은 어떻게 신화가 됐나 [EDITOR's LETTER]
  • 살리는 규제, 죽이는 규제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몇 해 전부터 토큰이란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왠 토큰? 40~50대는 버스 토큰을 떠올렸을 겁니다. 토큰은 회수권과 함께 버스 요금업계를 이끈 쌍두마차였습니다.1980~1990년대 버스 요금을 현금 대신 가운데 구멍이 뚫린 작은 토큰을 내고 탔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토큰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권리 증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디지털화됐고 다양한 주체가 여러 가지를 발행할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점이었습니다.다양한 자산에 대한 권리 증서(주식)를 토큰 형태로 발행하는 토근 증권 발행(STO)은 투자 상품을 다양화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가상자산과 달리 토큰의 가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산이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긴 합니다.흔히 예를 들 듯이 뉴진스의 노래 한곡, 호화 유람선, 미술품, 주차장을 자산으로 토큰을 발행할 수 있습니다. 또 동네 커피숍과 사업 계획서를 기초 자산으로 쓸 수 있습니다. 발행하려는 사람, 금융회사들, 투자자가 모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여기에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세계적 트렌드로 만들었던 세계적 자산 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한마디를 거들었습니다. “다음 세대의 시장은 ‘자산의 토큰화’가 이끌어 갈 것이다.”  실행에 나선 기업도 있지요. 독일 지멘스가 채권을 토큰 형태로 발행, 토큰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알렸습니다.금융위원회가 지난 2월 STO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금융위는 신중한 스탠스입니다. 루나, 위믹스 등 가상자산 투

    2023.06.19 06:00:38

    살리는 규제, 죽이는 규제 [EDITOR's LETTER]
  • 12살의 샤넬과 71살의 사넬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15년 전 쯤의 일입니다. 꽤 비싼 시계를 갖게 됐습니다. 어느 날 점심 식사 자리에 차고 나갔습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취재원 한 명이 시계를 보더니 “아 시계 눈에 띄네요”라고 했습니다. 뿌듯했지요. ‘알아봐 주는군.’ 하지만 유심히 시계를 보던 그는 “그런데 그거 진품 맞나요? 시곗바늘이….” 아놔. 아마도 평소 행색이 명품 시계와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곗바늘 움직임이 이상해 보였겠지요. 다행히 다른 일행이 “진품 맞네. 바늘이 원래 그렇게 움직여”라고 해줘 오해에서는 벗어났습니다. 물론 나이가 좀 들고 나니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몇 년후 겨울. 한 중견기업 회장님과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회장님은 검정 패딩을 입고 왔습니다. 폼도 나고 회장이 입었으니 당연히 명품이겠거니 하고 브랜드를 살짝 봤습니다. 웬걸, 유***였습니다. 명품은 어쩌면 누가 걸치느냐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품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즉 가격을 올려도 수요가 줄지 않는 재화입니다. 미국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이 ‘유한계급론’에서 언급해 베블렌 효과로도 불리지요. 가격을 올리겠다고 하면 백화점 앞에 줄을 서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원래 명품은 특정 계층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신분 상승의 욕망이 소비로 나타나며 대중화되기 시작했지요. 이를 ‘파노플리 효과’라고 합니다.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파티나 중요한 행사 때 명품 시계를 차고 백을 든다

    2023.06.12 06:00:01

    12살의 샤넬과 71살의 사넬 [EDITOR's LETTER]
  • 9만4000원에 삼성전자를 산 A를 위해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2021년 1월 어느 날. 한국 사회가 주식에 열광할 때의 일입니다. 후배 A가 대화 도중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선배 저 뒤늦게 삼전 주민이 됐어요.” 당시 삼성전자 주식을 사면 “주민이 됐다”고 했고 매수 가격은 층으로 불렀습니다. “몇 층인데?”라고 했더니 “94층이요”라고 답했습니다. 헉! 67층, 75층도 높다고 했는데 94층이라니…. 물론 그때 ‘10만전자’ 어쩌고 하는 얘기도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10만원 가더라도 뭐 먹을 게 있을까 싶었습니다. 왜 뒤늦게 샀느냐고 했더니 “나만 삼전 없어”라고 말하기 싫어서라고 했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 잘 버텨보자”고 하고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2020년, 2021년 한국 사회는 주식으로 들썩였습니다. 블라인드와 인터넷 게시판은 물론 방송에도 주식 프로그램이 등장했습니다. 국민들은 집단 흥분 상태였습니다. 삼성전자는 주주가 단숨에 500만 명을 넘어 국민주가 됐습니다. 모두 부자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자신감을 얻은 용감한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테슬라를 비롯한 혁신 기업에 과감히 베팅하고 코인 시장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부동산 ‘영끌’도 있었습니다. A도 뒤늦게 미국 주식과 코인을 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2년은 ‘투자의 시간’이었습니다.뜨거운 시간은 인플레이션으로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작년부터 주변에 주식 얘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손실률 공포로 모바일 주식창을 몇 달째 열어보지 않는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변화가 감지됐습니다

    2023.06.05 06:01:16

    9만4000원에 삼성전자를 산 A를 위해 [EDITOR's LETTER]
  • 꼴찌 롯데의 반란…무엇이 조직을 바꾸는가[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스포츠의 매력은 반전, 또는 이변입니다. 한국 축구팀이 U-20 월드컵에서 우승 후보 프랑스를 꺾은 것 같은 일 말입니다. 올해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변의 팀은 단연 롯데자이언츠입니다. 롯데는 ‘꼴데’, ‘봄데’로 불립니다. 꼴찌 롯데, 봄에만 반짝하는 롯데라고 붙여진 별칭이지요. 하지만 올해는 다릅니다. 5월 말인데 LG트윈스·SSG랜더스와 1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무엇이 달라졌을까요. LG 팬으로서 객관적으로 비교해 봤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대호·손아섭 등 과거 롯데를 상징하던 스타플레이어가 없다는 점입니다. 특출난 투수도, 3할 타자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뜻밖의 효과로 이어졌습니다. 롯데 구단 관계자는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선수들이 어떻게든 살아 나가려고 하고 나가면 한 베이스를 더 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근성이 살아나고 있다는 게 첫째 달라진 점이었습니다.프로 스포츠에서 스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팀을 놓고 보면 스타가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타 이외에 다른 선수들은 액세서리로 취급당하며 전력이 약화되곤 합니다. 기업 조직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롯데는 이들이 빠지자 개인 성적보다 팀을 생각하는 마인드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스타의 공백을 채운 것은 다양성입니다. 과거 롯데는 경남고와 부산고 등 PK 색깔이 짙은 팀이었습니다. 주력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올해는 재일 동포 안권수 선수를 비롯해 경기도 안산 출신 황성빈, 서울 출신 유강남·안치홍·김민석, 광주 출신 김원중·노진혁 선수 등이 주력

    2023.05.29 08:59:16

    꼴찌 롯데의 반란…무엇이 조직을 바꾸는가[EDITOR's LETTER]
  • 전세의 기억과 익숙함의 함정, 그리고 반성[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셋방 살던 어릴 적 기억이 납니다. 집주인들은 무서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에게 막 뭐라고 하기도 하고 저와 동생은 떠든다고 혼도 자주 났습니다. 애들이 떠드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미취학 아동들이 항상 뭔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그렇게 몇 번 집을 옮겨 다니면서 부모님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나름 성숙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해 마당이 있는 집을 사 이사한 날 부모님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철이 들고 생각해 보니 전세는 참 이상한 제도였습니다. 본질적으로 전세 제도는 사금융입니다. 집을 빌려 쓰지만 그 대가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무이자로 목돈을 빌려주는 제도지요. 일반적으로 채권자가 갑, 채무자가 을이지만 전세만큼은 항상 채무자인 집주인이 갑인 이상한 금융 거래라는 점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한 제도지만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는 순기능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몇 번 전셋집을 옮긴 것은 저축의 과정이었습니다. 적은 돈으로 전세를 얻고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저축했습니다. 은행은 높은 금리로 돈을 불려줬지요. 그 과정을 반복한 끝에 결국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지요. 집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감은 당연했고요. 고금리와 임금 인상, 인구 증가와 집값 상승 등의 조건이 맞아떨어지며 1970년대 이후 전세는 내 집 마련에 사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전세 대출 같은 것은 없던 시절입니다. 그다음 세대도 마찬가지 과정을 밟았습니다.  전세는 그래서 친숙하고, 또 익숙했습니다. 익숙함은 일반적으로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인지

    2023.05.22 09:21:14

    전세의 기억과 익숙함의 함정, 그리고 반성[EDITOR's LETTER]
  • “이념이 밥 먹여 주지는 않는다”고 외치는 T25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란 책을 기억하시는지요. 1999년 출간된 세계화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화에 참여한 나라들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이는 중산층 확대로 이어졌다. 중산층은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는 논지를 폈습니다. 렉서스는 세계화의 상징, 올리브나무는 세계화에 올라타지 못한 중동에 대한 알레고리였습니다. 20여 년 후 세계화의 파열음이 프리드먼의 나라인 미국의 중산층에서 시작됐다는 점은 아이러니입니다. 2012년 초 미국의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가 제조업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10여 년간 600만 개가 넘는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메이드 인 USA’는 자취를 감췄다. 제조업 고용 감소는 중산층의 붕괴를 불러왔다. 제조업 르네상스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의 제조업과 중산층 붕괴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위대한 탈출’의 저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은 2016년 한 콘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 15년간 특정 계층의 사망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사망 원인은 스트레스와 심각한 약물 중독 등이다.” 과거 우범지대 흑인을 묘사할 때 등장한 단어들이었습니다. 이 비극의 주인공들은 일자리를 잃은 45~54세 백인 중년층이었습니다. 디턴은 이어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사망률이 높게 나타난 백인 남성들이 주로 도널드 트럼프 대선 후보 지지층과 겹친다.” 일자리를 해외에 빼앗긴 백인 저소득층 남성들은 그해 11월 트럼프를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2023.05.15 07:39:10

    “이념이 밥 먹여 주지는 않는다”고 외치는 T25 [EDITOR's LETTER]
  • 한국의 성공 전략, 실용주의의 실종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유튜버들이 전자 제품을 언박싱하는 동영상을 간혹 봅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눈을 피해 사고 말리라’는 생각을 하며 한국 유튜버들이 박스를 뜯고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깨알같이 써 있는 매뉴얼을 휙 던져 버리는 겁니다. “너 따위는 없어도 내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유튜버만 그럴까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매뉴얼을 잘 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자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한국의 모든 서비스가 빠르기로 유명한 것도 매뉴얼보다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데 집중한 결과일 것입니다. 매뉴얼 사회인 일본과 다른 점입니다.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에서는 구호 물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비대위를 결성해 스스로 해결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한국인의 특성을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용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은 왕조가 500년을 갔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 유적 외에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새로운 한국인이 형성됐고 이들은 시대에 따라 적절하게 대상을 바꿔 가며 좋은 것을 선택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전략으로 택했다는 얘기입니다. 흔적은 곳곳에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에 전 국민이 나선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배고픔 속에도 자식들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선진국 기업들을 가장 빨리 따라갈 수 있는

    2023.05.06 06:00:01

    한국의 성공 전략, 실용주의의 실종 [EDITOR's LETTER]
  • 조선의 걸 크러시와 K-컬처의 여전사들 [EDITOR's LETTER]

    [EDITOR's LETTER] 블랙핑크를 좋아합니다. 솔직히 노래는 잘 모릅니다. 엄청난 고독과 정신적 압박을 이겨 내고 세계 무대를 휘젓는 모습이 좋습니다. 얼마 전 세계적 음악 행사인 코첼라에서 헤드라이너(메인 공연자)로 무대에 올라 당대 최고의 뮤지션이라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공연도 멋졌습니다. 전사 같았습니다. 무대 구성·노래·퍼포먼스에 대한 해외 언론의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기와지붕과 부채 등을 활용해 한국적인 것을 표현한 것도 기특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어떤 평론가는 “코첼라 무대에 섰다는 것 외에는 남긴 것이 없다”고 혹평했습니다. 평론가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야 하나 싶었습니다.이런 지적을 피하고 싶어서일까요. 해외에서 이름을 알린 뒤 한국에 들어오는 전략을 택하는 K팝 가수들이 많다고 합니다. 물론 시장성이 더 큰 이유겠지요. 해외에서 먼저 유명해지고 한국에서 이름을 얻은 사람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오래전으로 한 번 가 볼까요.조선의 천재 시인 허난설헌은 어릴 때부터 필력이 뛰어났습니다. 많은 시를 썼지요. 스승은 서얼 출신이었습니다. 행복했던 유년 시절은 열다섯 살에 끝납니다. 원하지 않던 정략 결혼, 시집살이는 외롭고 고됐습니다. 그는 시에 여성·서자·서민들이 느끼는 애환을 담았습니다. 시대적 모순들이었습니다. 이 천재는 스물일곱에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동생 허균은 그가 남긴 시를 묶어 ‘난설헌집’을 냅니다. 중국 사신이 이를 가져간 후 중국에서는 대유행이 됩니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

    2023.04.29 06:00:05

    조선의 걸 크러시와 K-컬처의 여전사들 [EDITOR's L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