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의 ‘삼국유사’ ‘경애왕편’에 그런 서술이 나온다. 그러니 이른바 ‘팩트’다. 하지만 이것은 함정이다. 부분의 서술만 편의에 따라 발췌해 그것만 강조한 것이다. ‘경애왕편’ 전편에 보면 견훤의 후백제는 9월에 침공해 10월에 지금의 영천 지역을 점령하고 11월에 경주에 입성했다. 당연히 음력으로 기술된 것이니 양력으로 바꾸면 10월에 침공해 영천 지역을 점령한 게 11월이고 경주에 입성한 것은 12월이다. 제아무리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 엄동설한에 궁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시며 무희들과 놀았다는 얘기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한겨울 포석정에서 음주가무를?
그곳은 신라의 화랑 가운데 으뜸으로 흠숭 받던 문노를 모셔둔 사당인 포석사가 있던 곳이다. 포석사는 신성한 곳이어서 왕이 신하를 이끌고 제사를 지내러 가는 곳이다. 거기에서 대신들과 회의를 하거나 원로들을 초빙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정자와 유상곡수 물길은 그런 부대시설이었다. 쇠락한 신라는 견훤의 침공에 속수무책이었다.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원병보다 적병이 먼저 들이닥쳤다. 그래서 경애왕이 포석사에 행차했다. 거기에 놀러 갔겠는가. 아니다. 화랑 문노에게 빌러 간 것이다. 그것은 고도의 정치적 포석이기도 하다. 왕이 포석사에 행차했다는 말을 들은 경주인들은 자연스럽게 문노의 화랑정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화랑정신을 되살려 도읍을 지켜 내자는 결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다. 하지만 견훤의 군대는 그 결의가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그런 앞의 의미는 싹둑 잘라버리고 필요한 부분만 떼어내 강조한 것이다. 악랄한 일제의 소행이다.
1933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모든 문화재를 전수조사하라고 특명을 내렸고 이듬해에 포고령으로 문화재를 지정했다. 보물1호 남대문(숭례문이 아니다), 보물2호 동대문(흥인지문이 아닌), 고적1호 포석정이다. 포석정은 무능하고 정사에 무관심한 채 유흥과 황음에 빠진 군주를 강조함으로써 자치의 능력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음험한 뜻으로 그렇게 지정됐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가 경주에 가서 포석정을 방문할 때 ‘정자’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갖는가. 분명 명칭은 포석‘정(亭)’이 아닌가. 그런데도 정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무관심이고 오직 유상곡수만 확인한다. 만약 정자가 없다면 포석정이 아니라 ‘포석정지(址)’여야 한다. 그런데 정자라는 명칭이 ‘놀이’와 ‘쉼’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보물1, 2호로 지정된 것도 개운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일제는 한양을 경성으로 개명하고 도성을 허물고 대문을 떼어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숭례문으로는 가등청정의 군대가, 흥인지문으로는 소서행장의 군대가 한양으로 입성했다. 일본인들로 보면 그 두 개의 문은 전쟁 때 자국의 개선을 목격한 것이기에 보물1, 2호로 지정했다. 국보도 아니다. 국보는 일본에만 있는 것이고 식민지 조선에는 기껏해야 보물이면 족하다는 폄하의 뜻이 담겼다. 고적(古蹟)이라는 것도 ‘오래된 유적’이라는 폄하의 뜻이다. 사적(史蹟)이 ‘역사적 유적’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비추면 금세 알게 된다. 부끄럽고 원통한 일이다.
그런데 광복된 조국은 보물1호를 국보1호로, 보물2호를 보물1호로, 고적1호를 사적1호로 그대로 대충 맞추는 것으로 때웠다. 왜 그랬을까. 조선의 수재들이 경성제국대에서 일본인들에게 식민 사관으로 배웠고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자들을 제국대학의 교원으로 임용하거나 총독부의 역사 편수관으로 보냈다. 광복 이후 그들은 서울대의 교수와 대한민국의 역사 편수관으로 변신했다. 그런 이들이 별 고민 없이 문화재를 정한 것이다. 그렇게 식민 사관은 지금도 당당하게 살아있다.
누가 누구를 위안한다는 말인가
‘위안부’라니! 필자는 ‘위안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위안부라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안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왜 위안해야 하는가. 더 분노할 대목은 그다음이다. 도대체 ‘어떻게’ 위안한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태연히 쓴다.
예전에 ‘정신대’라고 썼던 걸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정신대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목적을 위해 솔선해 몸을 바치는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가 고안해 낸 말이다. 그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민망했는지 ‘위안부’라는 말로 대체했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그런 말을 만들어 냈을까. 피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나 유엔에서도 ‘전쟁 성노예(War Sex Salve)’라고 기술하는 걸 비교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고 딱한지 알 수 있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 때 한꺼번에 다 털었으니 자신들은 더 이상의 책임이 없다고, 그런데도 이미 끝난 문제를 자꾸 들먹이니 상대하기 싫다고 어깃장을 놓는다. 우리로서는 분노할 일이다. 하지만 냉정할 필요도 있다. 그때 우리로서는 경제 부흥에 필요한 돈이 필요했으니 당사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설득할 시간이 없었고(그럴 생각도 없었겠지만) 어쩔 수 없다고 당당하게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면 된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방치하며 걸핏하면 국민의 감정만 자극하면서 때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였다 풀었다 반복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나치에 3년 반 점령당한 프랑스가 종전 후 7000명이 넘는 부역자들을 처형하고(그중에는 뛰어난 정치인·기업인·학자·예술가 등이 많았다) 부역의 흔적이 있으면 평생 공직에 나갈 수 없게 했으며 심지어 나치 장교와 놀아난 술집 여성들까지 단죄한 것은, 혹시라도 다시 다른 나라에 점령당해도 결코 부역하지 않고 저항하며 싸울 수 있는 역사적 교훈을 마련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정복자에 협조하면 3대가 권세와 부를 누리고 산다는 것을 부끄럽게 지녔다. 생각해서도 안 되고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우리가 다시 다른 나라에 점령되면 과연 당당하게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을까. 역사는 바로 그런 것이다. 역사의식은 바로 그런 정신을 마련하는 것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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