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개탄시대, 대한민국 경제는 어디로 : 국민의 트라우마]
중·장년층은 ‘배신감’에 격분…청년층은 ‘박탈감’에 분노
‘순실증’에 빠진 국민 “치료법은 단 하나”
(사진)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 진상 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집회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한경비즈니스 = 이홍표 기자]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12월 3일 열린 제6차 촛불 집회에 참가한 시민은 232만 명에 달했다.

'비선 무법자' 최순실의 국정 농단 의혹이 하나씩 사실로 드러나면서 전 국민은 연일 언론을 달구는 보도에 경악하면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촛불을 든 국민들은 서울광장·광화문 등에 모여 대통령 하야·탄핵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비단 촛불 집회가 아니더라도 직장에서, 학교에서, 인터넷에서, 식당에서 국민들이 모이는 어떤 자리에서도 최순실 사태가 모든 대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만큼 최순실 사태는 국민들에게 하나의 ‘사건’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특히 많은 국민들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TV에서 반복돼 나오는 ‘최순실 국정 농단’ 보도를 볼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는 게 대부분이다. 처음에는 설마설마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고 비리가 쏟아지니 너무 허탈하다는 게 대부분의 의견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앓는 ‘순실증’

혹자는 이런 답답하고 화나는 마음을 ‘순실증’이라고 부른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상당수의 국민들이 겪고 있는 ‘순실증’을 ‘집단우울증’으로 파악한다. 해결 불가능한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목격했을 때 집단 구성원이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순실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지지층은 50~60대 중·장년층 및 70~80대의 고령층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최순실 사태를 보며 망연자실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는 1987년 전두환 정부에 맞서 국민들이 거리로 나왔던 ‘6월 민주 항쟁’과 비교된다. 6월 민주 항쟁은 전국 20~3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됐고 연인원 400만~500만 명의 국민이 참여했다.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 민주화선언’을 이끌어 냈다.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세대는 현재 50대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로, 최근 붕괴되는 민주주의를 보며 개탄하고 있다.

50대는 18대 대선 당시 박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었다. 당시 50대의 82%가 투표했고 그 가운데 62.5%가 박 대통령을 뽑았다.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 전문 기관 한국갤럽의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를 보면 50대의 ‘긍정’ 응답 률은 5%(12월 3일 기준)에 그쳤다.

고령층이 느끼는 ‘배신감’도 거세다. 18대 대선 때 고령층의 80.9%가 투표했고 그 가운데 72.3%가 박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줬다. 하지만 돌아온 건 예산 삭감, 복지 축소 등 ‘찬밥’ 대접이다.

오제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2월 3일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 내년도 예산안 심사 비경제부처 질의에서 “최순실 관련 예산은 2714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46% 급증했는데 저소득층 및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 예산은 5772억원 삭감됐다”고 주장했다.

이 중 노인 분야는 경로당 냉난방비 및 양곡비 지원비가 전액 미편성됐고 노인 요양시설 확충 관련 58억원 등 396억원이 삭감됐다. 현재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연령층의 ‘긍정’ 응답률은 9%에 불과했다. 과거 집회나 시위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냈던 고령층이 광화문으로 나오게 된 이유다.

◆장기화 시 극단적으로 표출될 수도

지난 11월 17일은 2016 대학수학능력 시험일이었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10여 년간 수능을 위해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학교생활의 기본인 출석 일수조차 제대로 채우지 않은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에 입학한 사실에 분노했다. 또 그 과정에서 대학이 학칙을 바꾸고 면접에서 상위권 학생들에게 낙제점을 주면서까지 정 씨의 입학을 도운 사실이 밝혀져 이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취업을 준비하는 20~30대 취업준비생 역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7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5월 경제활동 인구조사 : 청년층 및 고령층 부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업준비생 10명 중 4명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공시족’이다.

하지만 청와대 전 4급 행정관 이영선 씨, 3급 행정관 윤전추 씨, 2급 선임행정관 김한수 씨 등은 최순실과의 인연으로 30대에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올랐다.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 씨 측근 연루 의혹이 불거진 포스코 계열 광고회사 포레카 강탈 시도도 있다. 차 씨 측근들은 포레카를 인수한 중소기업 대표 A 씨에게 지분을 넘기라고 요구하면서 거절하면 고강도 세무조사를 하겠다고 협박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고위직과의 인맥 하나로 돈·권력 등을 부당하게 갈취한 자들의 모습은 점차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 직장인과 자영업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한국갤럽이 12월 2일 발표한 대통령 지지율 조사 결과는 4%에 불과하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박 대통령을 믿고 지지했던 사람들은 허탈감을 표출하고 청년층은 원칙이 무너진 사회를 빗대 ‘이게 나라냐’라는 울분을 터뜨린다”며 “이런 상황이 장기화하면 사회 전체가 우울증에 빠져 자칫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 사회가 다시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대통령이든 최순실이든 누가 됐든 간에 그간의 잘못을 제대로 밝히고 이들에 대해 납득할 만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haw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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