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구재 시장’ 경쟁 계속…유행·브랜드 대신 ‘취향 소비’가 핵심
[한경비즈니스 칼럼=최재원 다음소프트 이사] 각종 경제지표들이 너도나도 장기 불황을 얘기하고 있다.
과거에도 많은 사람들은 불황의 신호를 포착하려고 애썼다. 이를 통해 ‘립스틱 효과(넥타이 효과)’, ‘미니스커트 효과’ 등과 같은 용어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성향 때문에 이런 효과가 적용되기 어려워졌다. 유행도 브랜드도 아닌 취향이 소비의 주가 되는 요즘, 소비자들의 지갑을 여는 상품에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나다운 나’가 소비의 핵심 키워드
어쩌면 취향이 뜰 수 있었던 것에도 불황의 힘이 있지 않았나 싶다. 자꾸 빠르게 바뀌는 유행에 맞춰 소비하기는 벅차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정확하게 알았으니 취향에 맞는 아이템만 구매하는 것이다.
유행이나 브랜드보다 취향이 더 오래갈 수 있고 더 ‘나다운 나’에 가까운 느낌이어서 소비를 정당화하기도 쉽기 마련이다.
하지만 취향을 소비하는 데도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다음소프트가 ‘상품 구매 시 고려한 항목 변화’를 반기별로 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것은 단연 ‘가격’이었다. 하지만 최근 온라인 쇼핑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오프라인을 의미하는 ‘매장’ 대신 ‘인터넷’이 상위권으로 올라섰다. 반기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매장보다 인터넷을 통한 구매가 활발해진 것이 입증된 셈이다.
또 할인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면서도 세일에 대한 관심이 올 들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상품의 구성을 의미하는 ‘세트’ 역시 성장세가 확인됐다. 변하지 않는 가격에 대한 고려는 이제 구매 채널과 상품의 구성, 할인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사람들은 내구재 대신 비내구재를 많이 구매했다. 비내구재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고 사용 기간이 짧은 것으로, 얇아진 주머니 속에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이다.
내구재는 전년 대비 4.3% 늘어나는 데 그쳐 201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면 비내구재는 전년 대비 47% 증가해 2007년 이후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화장품이 전년 대비 14.5% 증가하며 2005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초로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화장품 중에서 립스틱은 예전부터 저렴한 가격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아이템으로 꼽혔다.
그리고 ‘레드 립스틱’은 바로 불황의 대표 주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불황이라는 요즘 레드 립스틱의 매출 점유율은 13%에 불과하다. 그 대신 새롭게 떠오른 강자는 ‘말린 장미’ 색상이다. 화장품 브랜드인 네이처리퍼블릭에 따르면 이 ‘말린 장미’ 색상이 립스틱 매출의 절반 이상인 57%를 차지했다.
말린 장미색은 ‘MLBB’라고도 불리는데, ‘마이 립스, 벗 베터(My Lips, But Better)’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내 입술인 듯 아닌 듯, 자연스럽지만 더 예쁘게 연출할 수 있는 립 컬러를 의미한다. 빨갛게 강렬함을 자랑하기보다 은은하게 과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사진) 크리미틴트컬러밤. /마몽드 제공
화장품 브랜드인 마몽드에 따르면 MLBB 색상의 인기는 레드보다 3.6배 더 많이 팔릴 정도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레드 립스틱=불황의 아이콘’ 옛말
MLBB의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하늘 아래 같은 색조가 하나도 없듯이’ 다양한 말린 장미 색깔들 중에서도 자신의 얼굴 빛깔에 맞는 색깔을 고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피치 베이지, 오렌지 빛이 가미된 브라운 베이지, 누드 핑크, 빈티지 로즈 등등 그 립스틱의 색깔 이름도 다양한데, 이에 맞는 얼굴 빛깔을 칭하는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요즘 트렌드다.
전체적인 메이크업 방법의 트렌드는 존재하겠지만 자신에게 맞는 화장을 했을 때 얼굴이 돋보이는 것이 좋은 메이크업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 여성들은 퍼스널 컬러를 진단하고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리는 화장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을 웜톤’, ‘봄 웜톤’, ‘여름 쿨톤’, ‘겨울 쿨톤’ 등 흔히 네 가지로 분류되는 퍼스널 컬러 이름들이다.
취향과 합리성을 차치하더도 진화심리학에 의해 이제 더 이상 레드 립스틱이 불황의 인기 아이템이 아니라는 것이 설명된다.
진화심리학에선 불황에 화려해지는 여성들의 차림새를 당시 주로 경제력을 가진 남성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진단한다. 번식을 위해 여성은 힘을 지닌 남성을 선호했고 여성의 선호를 얻기 위한 남성들은 그들 간 경쟁을 통해 힘의 우위를 증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요즘 여성들은 대부분이 고학력자에 직업을 갖고 있다. 높은 경제력을 자랑하는 이도 많다. 따라서 전통적인 성 역할이 바뀌고 있는 지금, 이 이론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제 높아진 여권이 진화의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구매 채널로 뜨는 곳은 편의점과 창고형 할인 마트다. 편의점은 판매 품목을 다양화하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이른바 ‘가성비’ 높은 제품들로 호평 받고 있다.
특히 신선식품 및 간편식품에 대한 반응이 높았고 ‘혼밥·혼술족(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것)’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편의점은 대개 소규모 매장이고 판매하는 상품들도 소포장·소용량이 많다.
반면 창고형 할인 마트는 ‘용량’이 주요 화두다. 2015년 기준 창고형 할인 마트의 매출 규모는 4조4630억원으로 2012년에 비해 53%나 증가했다. 또 창고형 할인 마트에 대한 감성 분석 결과 긍정 63%, 부정 7%, 중립 29%로 압도적인 호감이 나타났다. (사진) 창고형 할인점인 롯데마트 빅마켓 영등포점에서 쇼핑객들이 카트에 대용량 물건을 담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가성비’ 또는 ‘가용비’가 뜬다
창고형 할인 마트에 대해 사람들은 맛과 가격 다음으로 상품의 ‘크기’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가격에 비해 맛도 있고 설령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양이 매우 많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비단 상품뿐만 아니라 창고형 할인 마트에서는 푸드 코트에서도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판매하는데, 음식들의 크기 역시 일반 대형마트보다 훨씬 커 이곳의 모든 상품들은 가격 대비 용량을 의미하는, 이른바 ‘가용비’로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대용량 음식의 유행은 최근 사회적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대용량으로 ‘쟁여두고’ 입이 심심할 때 먹기도 하며 최근에는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취업 준비생들이 식사를 대신해 대용량 냉동 볶음밥 등을 조리해 먹는다고 한다.
불황에 대용량 제품이 인기를 끄는 씁쓸한 단면이 확인된 셈이다. 이 밖에 편의점에도 용량이 늘어난 ‘우유’와 ‘커피’ 등이 출시되며 대용량 식품의 새로운 인기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대용량을 넘어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는 무한 리필 가게에 대한 관심이 확인됐다. 2016년 연어 무한 리필 집의 히트를 시작으로 올해에는 삼겹살 무한 리필 가게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치킨·쇠고기·간장게장 등이 무한 리필인 곳도 새롭게 등장했다.
무한 리필 가게에 흔히 따라붙는 부정적인 선입견과 달리 소셜 미디어에서는 무한 리필 가게에 대해 ‘양 대비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긍정 72%, 부정 3%, 중립 25%의 의견을 보였다.
대용량 화장품도 매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킨·로션·수분크림 등과 샴푸·트리트먼트 같은 헤어 제품까지 다양한 화장품 대용량 제품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화장 솜과 마스크 팩 같은 도구들도 올해 새롭게 등장했다.
대용량에 대한 관심도가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취향에 맞는 한 가지 제품에 정착하는 사람들의 소비 패턴이 자리 잡은 것으로 확인된다.
불황으로 사람들의 일반적인 소비성향이 감소하겠지만 소모되는 비내구재 시장에서의 경쟁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의 소비 트렌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특정 제품을 구매할 때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다. 이를 대용량으로 구매한다면 이 같은 성향을 더욱 고려하게 될 것이다.
불황 시대의 새로운 소비 공식은 세분화된 개인의 취향에 대응할 수 있는 상품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여기에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거나 구성과 용량을 이용한 상품 기획이 새로운 소비 공식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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