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시차출근 등 유연근무제, 스마트 워크가 직장인의 삶을 바꾸다
기업 효율성 증진에 일·가정 양립 변화…‘내수회복·고용확대’까지 #. 이 모(30) 대리가 뿔났다. 법정노동시간은 8시간이라고 했건만 오후 6시 퇴근은 5일 중 하루 있을까 말까. ‘평균 노동시간 10시간 58분. 1주일 평균 야근 일수 2.3일.’
이 대리는 하루의 절반 가까이를 회사에 바치지만 이 중 생산적인 시간은 단 5시간 32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나머지 절반은 형식적인 보고에, 비효율적인 회의에 허투루 시간을 소비한다는 얘기다. 그는 오늘도 ‘월·화·수·목·금…금(토)금(일)’의 세상에서 나 홀로 ‘칼 퇴’를 외친다.
#. “저녁이 생겼어요.” 이 대리의 삶이 달라졌다. 그가 몸담은 회사가 ‘시차출퇴근제’를 도입하면서 생긴 변화다. 아침잠이 없는 이 대리는 최근 남들보다 2시간 일찍 출근하고 오후 4시 퇴근길에 오른다.
스마트 워크 인프라를 활용해 대면 시간이 줄면서 업무 수행 과정에서 근무 집중도도 높아졌다. 자연스레 추가 노동시간도 줄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그간 ‘독박 육아’에 시달렸던 배우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서 가정에도 웃음꽃이 피었다는 거다. [한경비즈니스=정채희 기자] 대한민국 노동 문화에 혁신이 일고 있다. 유연근무제의 확산으로 ‘스마트 워크’ 시대가 열리면서 직장인들의 일하는 방식이 크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유연근무제는 기존 법정노동시간인 ‘1일 8시간, 주당 40시간’ 안에서 노동시간이나 장소에 유연성을 더해 직원 개개인별 자율성을 강조한 근무 방식이다.
예컨대 ▷일률적인 출퇴근 시간을 조정한 시차출퇴근제 ▷주 40시간 내에서 1일 노동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탄력근무제 ▷노동자가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근무하는 제도인 재택근무제 ▷출장지·주거지와 가까운 곳에서 원격근무를 사용해 출근하는 원격근무제 등이 있다.
국내에선 2010년대 공기업을 중심으로 이러한 유연근무제가 도입된 후 최근 사기업에 확산되고 있다. 특히 대기업과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기업별 다양한 유연근무 방식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미래창조과학부·행정자치부가 발표한 ‘2015 스마트 워크 이용 현황 실태 조사’를 보면 스마트 워크를 도입한 민간·공공 분야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 2800명(민간 부문 2000명, 공공 부문 800명)의 스마트 워크 이용률은 2012년 10.4%에서 2015년 14.2%로 3년 새 3.8%포인트 증가했다.
사업장 규모별 이용률은 100인 이상 기업이 21.4%로 가장 많았고 5~9인의 소규모 사업장은 8.1%다.
유형별 이용 현황을 보면 모바일 오피스의 이용률이 20.1%로 가장 높았다. 신속한 업무 처리가 가능하고 출장지에서 연속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어 원격회의(11.2%), 재택근무(9.2%), 스마트워크센터 근무(5.9%) 순이다. 다만 노동자가 희망하는 스마트 워크는 재택근무가 63.5%로 타 방식을 압도했다. ◆기업, 업무 효율 증대로 경쟁력 확보
스마트 워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기업과 개인 또 정부 측면에서 기존의 근무 방식에 비해 효율성을 제고하기 때문이다.
먼저 기업은 ‘경쟁력 확보’가 제도 도입의 가장 큰 목적이다. 최근 불확실한 경영 환경과 저성장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업무 효율을 높이는 것이 필수다. 노동시간이 곧 생산을 가져왔던 시대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고용부에 따르면 스마트 워크 도입 후 전체 응답자 2800명 중 54.9%가 ‘업무 처리 시간이 빨라졌다’고 답했다. 스마트 워크로 업무 과정이 단축됐다는 의견은 54.1%다. 반면 ‘그렇지 않다’는 답변은 각각 8.2%, 9.1%에 그쳐 사실상 다수의 노동자가 스마트 워크 효과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나타냈다.
비용 절감도 스마트 워크가 기업에 준 선물이다. 전체 응답자의 59.5%가 스마트 워크로 사무실 운영비 등의 관리비가 절감됐다고 답했다. 이 역시 반대 의견은 8.7%에 불과했다.
이뿐일까. 우수 인재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기존 숙련된 인력의 이직도 방지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 1명이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 수)을 보면 한국은 1.24명으로 34개 국가 중 33위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가운데 재택근무나 시차출퇴근제 등으로 일과 육아 사이에서 직장을 떠나는 노동자의 이탈을 막는 데 스마트 워크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취업 포털 업체인 잡코리아가 ‘청년 구직자들이 취업하고 싶은 회사’를 조사한 결과 만 34세 미만 청년 구직자 1092명 중 43.9%는 ‘야근 없고 자유로운 휴가 사용 등의 근무 여건이 좋은 회사’를 꼽았다. 스마트 워크 제도의 유무가 유망한 청년 구직자 확보에 기여한다는 지적이다.
◆개인, 일가(家)양득으로 ‘삶의 질’ 제고
스마트 워크를 통한 노동시간의 단축은 국민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이 OECD 국가 중 ‘최상위’에 달하는 한국의 악명을 벗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2015년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2113시간이다. OECD 회원국 평균인 1766시간보다 43일(347시간, 이하 1일 8시간 근무 기준) 많다.
회원국 중 ‘최저’ 노동시간을 기록한 독일과 비교하면 4.2개월(742시간), 미국과 비교하면 1.8개월(323시간)을 더 일한 셈이다. OECD 회원국 중 노동시간이 2000시간을 넘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면 그리스(2042시간)·코스타리카(2230시간)·멕시코(2246시간) 등 세 나라뿐이다.
문제는 노동의 질이다. 일하는 시간은 길지만,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최하위권이다. OECD가 같은해 발표한 시간당 노동생산성에 따르면 한국은 31.98달러로 OECD 평균치인 50.50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독일은 66.63달러, 미국은 68.34달러다.(*1위는 룩셈부르크로 95.09달러다. 이 나라의 국민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1507시간으로 OECD 국가 중 '최저 노동시간' 기준 상위권에 속한다.)
법정노동시간을 넘는 노동시간은 삶의 질에 대한 만족도 또한 저하시킨다. 한국고용정보원은 2014년 전체 노동인구의 42%인 약 930만 명이 ‘시간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시간 빈곤이란 1주일 총 168시간 중 개인 관리와 가사 보육 등 가정에 필요한 시간을 제외한 남은 시간이 주당 노동시간보다 적으면, 일에 쫓겨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 또는 그런 현상을 의미한다.
유연근무제 도입 이후 노동자들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실제 노동자들은 스마트 워크를 통한 출퇴근 시간 단축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고용부 자료에 따르면 민간·공공 분야 직원 2800명 중 73.2%가 스마트 워크 도입 후 ‘출퇴근 시간과 비용이 절약된다’고 응답했다.
이에 따라 육아·가사 등 가정을 위한 시간이 늘어난 이는 63.6%, 학업과 취미 활동 등 자기 계발의 시간이 늘어난 이도 55.9%에 달했다. 삶의 질도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응답자의 53.5%는 ‘삶의 질 향상’에 스마트 워크가 도움이 됐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정부, ‘내수회복·고용창출’ 두 마리 토끼
개인과 기업의 이익은 국가의 이익으로도 돌아올 전망이다. 정부는 최근 ‘1일 8시간, 주 40시간’의 고정 틀을 깨는 유연근무제로 단축 근무를 유도해 소비 진작을 꾀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매년 사상 최저를 기록하는 소비지표에 비상등이 켜진 정부가 노동시간에 메스를 대며 소비 회복에 나선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가구의 평균소비성향은 전년보다 0.9%포인트 하락한 71.1%로 집계됐다. 이는 일본의 평균소비성향이 최악이었던 1998년(71.2%) 당시보다 더 낮은 수준이다.
평균소비성향은 가구 소득 중 세금·연금 등을 빼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처분가능소득 가운데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한국의 평균소비성향은 2012년부터 5년 연속 해마다 최저 기록을 경신하고 있고 이는 일본의 장기 불황 시대인 ‘잃어버린 20년’ 당시보다 더 부진한 상황이다.
이에 기획재정부는 지난 2월 23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내수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며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의 조기 퇴근을 권장하는 제도인 이른바 ‘한국판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는 일본 정부와 재계가 장시간 노동의 문제점 해소와 소비 촉진을 위해 매달 마지막 금요일 조기 퇴근을 권장하는 제도로 유연근무의 일종이다. 일본에서 지난 2월 말부터 시행 중이다.
다만 한국은 매달 마지막 금요일 하루 2시간 일찍 퇴근하되 월~목요일 30분씩 초과 근무하는 방안으로 연장 근무와 임금 삭감이 따로 없는 일본식 프리미엄 프라이데이와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노사 간 이해관계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만큼 아직은 벤치마킹 수준으로 제도를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이호승 기재부 경제정책국장은 “민간 부문의 프리미엄 프라이데이를 촉진하기 위해 일·가정 양립 우수 기업 인증 시 하나의 요소로 한다든지 노사 관계 안정을 위한 인센티브를 준다든지 하는 방안 등을 관련 부처와 함께 이달 중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또한 유연근무를 통해 장시간 근로 문화가 개선되면 ‘시간 나누기’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박근혜 정부는 대선 당시 2020년까지 OECD 수준(1800시간대)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는 공약을 한 바 있다. 단축된 노동시간으로 신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전략이다.
이에 앞서 노무 전문가들은 현행법상 주5일(40시간) 근무제만 철저하게 적용돼도 신규 일자리를 수십만 개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현행법을 적용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18.9%인 365만 명”이라며 “법대로 주5일 근무제가 적용되면 이들의 노동시간은 주 3~4시간(연 156~208시간) 단축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27만~37만 개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poof34@hankyung.com
[스마트 워크 커버스토리 기사 인덱스]
- 金과장의 삶을 바꾸는 스마트 워크
- [스마트 워크 기대 효과] 스마트 워크가 직장인의 삶을 바꾸다
- [확산되는 유연근무제] '칼퇴' 권장하는 기업들 "회사, 잘 굴러갑니다~"
- [근무 공간의 변화] 코워킹 스페이스, '밀레니얼 세대' 일터로
- [달아오르는 ICT 전쟁] 스마트 워크 솔루션, 글로벌 ICT 전쟁터
- ['유연근무제' 현장은 멀었다] "노동시간 단축이요? '빨간 날'도 못 쉽니다"
- [스마트 워크 해외 사례] 곳곳에서 일어나는 노동 혁명…세계는 지금 '스마트 워크' 중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