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중 노동자 과실 산재 인정 판결 잇달아…법원 “업무 연관성 발견되면 업무상 재해”

[법알못 판례 읽기]
회식 후 상사 바래다주고 무단 횡단하다 사망…‘업무상 재해’일까
‘61.8분.’ 한국인들의 평균 출퇴근 시간이다. 201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OECD 회원국의 평균 통근 시간은 28분, 한국은 그 두 배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달리 통근 시간이 긴 만큼 노동자들이 출퇴근 중 겪는 사건·사고도 빈번하다. 만약 통근 중에 노동자의 과실로 상해를 입고 사망에까지 이르게 됐다면 노동자는 이를 보상받을 수 있을까.

출퇴근 시간뿐만 아니라 근무지로 이동하는 도중 노동자 본인의 실수로 사고를 내 사망한 경우에도 그 인과 관계에서 업무와의 연관성이 발견된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일련의 판결이 나왔다. 여기에 최근 한 달여간 나왔던 눈여겨볼 만한 판례를 소개한다.

회식 다음 날 숙취로 교통사고 사망했다면
출근길 사고로 숨졌는데 전날 회식 때문에 술이 덜 깬 상태였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대표적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2021년 5월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는 출근길 교통사고로 숨진 A 씨의 부친이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은 처분을 취소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한 리조트에서 조리사로 근무하던 A 씨는 2020년 6월 상사와 함께 밤 11시께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차를 운전해 출근하던 중 사고로 숨졌다. A 씨는 당시 제한 속도(시속 70km)를 크게 웃도는 시속 151km로 차를 몰다가 반대 방향 차로의 연석과 신호등, 가로수를 잇달아 들이받았다.

그의 혈액을 감정한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77%로 면허 정지에 가까운 수준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복지공단은 A 씨가 음주와 과속 운전에 따른 범죄로 숨져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며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유족 측은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A 씨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무엇보다 “고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 인과 관계가 단절됐다고 보기 어려워 업무상 재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A 씨가 다음 날 숙취를 겪을 정도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재판부는 “채용된 지 약 70일 지난 고인이 상사와의 모임을 거절하거나 술자리가 끝나는 시각 등을 (본인의 의지대로)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고인은 사고 당일 근무 시간이 시작되는 시간인 오전 5시께 상급자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어 출발했고 지각 시간을 줄이기 위해 과속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회식 후 상사 데려다준 뒤 무단 횡단
회식 이후 벌어진 사고에 대해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또 다른 경우도 있다. 회사 사람들끼리 가진 술자리 후 만취한 직장 상사를 숙소에 데려다준 뒤 무단 횡단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원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울산지법 제1행정부는 B 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최근 내렸다. 2019년 3월 B 씨는 경남 거제시에서 직장 회식 자리를 3차까지 가진 후 상사를 숙소까지 바래다주고 귀가하는 도중 한 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차에 치여 숨졌다. B 씨 유족 측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 측은 “2·3차 회식은 사업주의 지배 관리하에 있는 회식으로 볼 수 없다”며 장의비 지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법원은 세 차례 회식 비용을 모두 회사가 부담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또 회사 상사를 숙소까지 데려다줬다는 점에서 업무와 연관성이 있다고 짚었다. 재판부는 “피고는 2·3차 회식이 직원들 간의 개인적인 회식이어서 사용자의 지배나 관리를 받는 자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개인 신용카드로 결제한 후 회사에 영수증을 제출해 비용 처리했다는 점에서 공식적인 회사 회식으로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또 “B 씨가 회식의 주 책임자인 상사를 숙소에 데려다준 것 역시 회식의 부 책임자로서 공식 회식을 잘 마무리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업무 수행의 연속이거나 적어도 업무 수행과 관련성이 있어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B 씨의 과실인 무단 횡단에 대해서도 회식과 연관성이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A 씨의 무단 횡단에 대해서도 회식에 의한 과음으로 주의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며 업무상 재해의 근거로 삼았다.

출장길 돌아오다가 졸음운전한 경우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내 사망에 이르게 됐더라도 유족급여 등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례도 재계의 이목을 끌었다. 출장 복귀 길에서 업무 차량을 운행하다 중앙선을 침범해 사망한 노동자에게도 업무상 재해가 인정돼야 한다는 판단이 주요 골자다.

회식 다음 날 숙취로 교통사고를 내 사망한 이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던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는 최근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앙선을 넘어 망인이 된 노동자에 대해서도 업무상 재해라는 판단을 내렸다.

경기 평택시 소재 대기업 협력사 직원이던 A 씨는 2019년 말 협력사 교육에 참석한 뒤 업무용 차량으로 근무지로 복귀하던 중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6.5톤 화물차와 충돌해 사망했다. 수사 기관은 A 씨가 졸음운전으로 사고를 낸 것으로 봤다. A 씨의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장의비와 유족급여를 신청했지만 반려됐다. A 씨가 운전 중 중앙선을 침범한 것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범죄 행위’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르면 노동자의 범죄 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돼 발생한 부상이나 사망 등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지 않는다. A 씨 유족 측은 공단의 반려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법원은 유족 측의 주장을 인정했다. A 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A 씨의 과실로 사고가 발생했다고 해도 업무 수행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 점을 고려하면 고인의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고 했다.

이어 “중앙선 침범이 특례법상 배제 사유에 해당해 형사 처분 대상이 된다고 해도 입법 목적과 규율 취지가 다른 산재보험법상 범죄 행위에 포함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수사 기관에서 사고 원인으로 추정한 졸음운전이 설령 사고 원인이더라도 업무와 관련 없는 사고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현장의 폐쇄회로(CC)TV 영상,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이 없고 중앙선 침범 이유도 확인되지 않았다”며 “고인은 음주를 하지 않았고 1992년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교통법규 위반이나 교통사고 경력도 없다”고 판시했다.


[돋보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근거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르면 ‘업무상 재해’는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노동자의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을 가리킨다. 현행법상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업무상 사고’로 인한 재해가 발생한 경우여야 한다.

근로 계약에 따른 업무를 할 때 발생한 사고이거나 사업주가 제공한 시설물 등을 이용하던 중 그 시설물 등의 결함이나 관리 소홀로 발생한 사고 등이 이에 해당한다. 휴게 시간 중에 벌어진 일이라도 사업주의 지배 관리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행위로 발생했다면 업무상의 재해로 인정된다. 회식처럼 사업주의 주관에 따라 참여한 행사나 행사 준비 중에 발생한 사고도 업무상 사고에 포함된다.

다음으로 업무와 사고로 인한 재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때 인과 관계 존재에 대한 입증 책임은 노동자 또는 유족에게 있다. 인과 관계는 반드시 의학적·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질병으로 인한 업무상 재해의 경우 노동자의 취업 당시의 건강 상태와 발병 경위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판단을 가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의 고의·자해 행위 또는 범죄 행위로 인한 재해가 아니어야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 다만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한 경우 등은 예외다.


안효주 한국경제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