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주듯이 떠맡기면 숨기고 책임 떠넘겨…힘든 일 해결한 직원은 ‘팔자’가 달라져야

[경영 전략]
험한 일 맡겨 놓고 책임만 물으면 회사가 골병 든다 [박찬희의 경영 전략]
경영학은 체제가 잘 갖춰진 대기업을 대상으로 구성됐다. 그럴듯한 이론으로 짜맞춘 내용들을 꾸며진 사례까지 더해 외우다 보면 마치 현실의 경영자들은 늘 치밀한 계산으로 완벽한 의사 결정을 하고 구성원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그래서 재벌 총수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나오는데 여기에 “S사가 하면 다르다”는 식의 광고까지 더해지면 환상은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현실의 대기업은 곳곳에서 파고드는 영악한 사람들에게 눈뜨고 당하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을 상대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자기 돈이니 죽기 살기로 덤비지만 이를 상대하는 회사원들은 나름의 심란한 사연들로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사실 회사를 목 졸라 등치기로는 악덕 대주주 일가가 으뜸이겠지만 일단 이번 글에서는 만만치 않은 사업자들 앞에서 무력한 대기업의 관료주의, 이른바 ‘회사 공무원’과 ‘기업 내시’들의 해악과 이를 해결하는 지혜를 생각해 본다. 사고 수습은 잘해야 본전?입사 시험이 고시라고 불리고 실제로 직원들의 학력이나 경력이 사회 어느 부문보다 뛰어난 대기업이 눈뜨고 당한다니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부를 잘한다고 사업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크고 복잡한 대기업의 구조에서는 사업에서 돈 버는 것 말고도 생각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대기업을 상대로 등치려는 악덕업자들 앞에서 회사 생활을 무난하게 오래하는 것이 목표인 ‘회사 공무원’은 상대가 되지 못한다.

A건설은 1970~1980년대 해외 건설로 성공한 건설사다. 특히 1990년대 신도시 개발과 플랜트 건설로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나이 80을 훌쩍 넘긴 A건설의 창업자는 건설업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기업 문화, 특히 현장 관리자들의 무모한 일처리를 바꾸기 위해 제조업의 공정 제어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관리 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일단 공사 수주부터 하면 실적으로 인정받던 시절의 관행을 버리면서 수익성과 자금 흐름이 좋아졌다.

그런데 세상엔 공짜는 없었다. 어느새 관리자들이 책상머리에서 현장을 쥐고 흔들고 현장에서는 살기 위해 눈치껏 때우고 숨기는 관료주의가 자리 잡고 말았다.

개발 사업은 처음 계획과 달리 사업이 막혀 버리고(속된 말로 엎어지고) 빚까지 떠안는 경우가 곧잘 생긴다.

수도권 신도시의 한 사업 현장을 예로 들면 주변에 정보기술(IT) 클러스터가 자리 잡고 지하철 노선까지 열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개발 계획에 일부 차질이 생기고 인허가 과정도 꼬이면서 사업 추진을 맡았던 디벨로퍼(시행사)가 손을 떼고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시공을 보증한 건설사로서는 시행사와 그야말로 심란한 분쟁 과정을 이어 갈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관리자들의 책임 추궁과 현장 담당자들의 생존술이 엉키면 혹시 되살릴 수 있던 사업도 수렁에 빠진다.

A건설에 이 신도시 사업 현장은 귀양지나 유배지로 불린다. 관리본부가 어려움에 빠진 사업을 놓고 잘못을 파헤치며 책임을 물으니 해당 사업 현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물먹거나 떠났다.

험한 일을 마치 벌을 받는 것처럼 떠맡은 쪽에선 애써 사업을 되살려도 ‘사고 수습’에 불과하니 잘해야 본전이다. 행여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만 떠안게 되니 눈치껏 숨기고 시간을 보내며 탈출할 기회만 찾는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 사업 현장은 이미 상당한 진척을 이룬 상태라 속칭 ‘맨땅에 삽질 시작’은 아니고 주변의 개발 상황에 따라 충분히 사업성을 살려낼 여지가 있다.

건설업 고유의 사업 위험과 애로를 꽉 막힌 관리 통제의 틀로 재단해 책임 추궁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회가 살아있는데도 내팽개친 사업들이 많아지면 회사는 그야말로 골병이 든다. 문제를 해결하면 막대한 보상 안겨줘야생각의 틀을 바꿔 보자. 이 신도시 사업 현장을 하나의 독립 사업으로 설정해 일정한 기간에 개발 성과를 내든지 좋은 값에 팔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담당자들에게 주면 어떨까.

쉽게 말해 일이 잘되면 팔자가 달라진다면 담당자들은 책임 추궁을 피해 숨는 회사 공무원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기회의 땅을 찾는 바이킹 전사가 된다. 성과 관리, 원가 책임 운운하며 트집만 잡는 책상머리 관리자들이 꼴 보기 싫은 ‘야전형 인물’들도 회사를 떠나지 않고 이런 험하지만 기회가 있는 일에 모인다.

도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회사는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다는 뜻이므로 빨리 털어 내거나 기회를 살릴 수 있는 사업자를 찾아 매각하는 편이 낫다.

일이 안 되면 책임추궁부터 하고 문제 해결은 잘해야 본전인 회사는 절대로 험한 일을 풀어 낼 수 없다.

세상을 바꿔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은 험하고 복잡한 일을 풀어 내 기회로 만들었다. 돈 벌려고 만든 회사에서 기회를 만드는 일보다 남 트집 잡아 벌주는 일이 앞서면 유능한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회사 공무원이 돼 눈치로 연명하거나 회사 권력에 기생하는 기업 내시가 된다.

좁은 땅에서 가진 것 지키며 만만한 백성들 쥐어 짜는 나라의 지배층은 편하다. 해외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 권세를 키우는 거상(巨商)들이 그 수하들과 칼을 들고 해적이나 외세와 손잡으면 체제의 위협이 되니 미리 싹을 잘라 버린다.

새로 만들 땅과 사업이 없으면 가진 사람의 뒤를 파고 트집 잡아 뺏으면 된다. 이런 나라에서는 권력 게임에 능통한 정치꾼이 되거나 눈치 보며 살길 찾는 ‘착한 백성’이 돼야 성공한다. 물론 정치꾼에 기생하는 내시형 아전이 되는 방법도 있다.

목숨 걸고 나서 영토를 개척해 상권을 넓히고 땅 없는 농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나라, 먼 바다로 나가 신대륙을 찾고 무역로를 개척하면 해적도 귀족이 되는 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 음해와 모략은 궁성 안에서나 통할 뿐이다. 기회를 찾고 문제를 풀어 낸 사람들이 힘을 갖는다. 닫아 걸고 권력 게임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와 지배층은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정복 국가를 만나면 대책이 없다.

숙이고 빌붙어 봐야 ‘현지 관리자’ 신세로 전락하고 똑똑한 백성들은 이제 더 힘센 정복 집단에 충성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달린 매우 험한 일이다. 그런데 전쟁에 나선 군인에게 트집을 잡아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이어지고 적이나 아군이나 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써야 하지만 총칼 든 사람들의 힘이 두렵고 그들과 손잡은 정적들이 두려운 권력자들은 그럴듯한 말로 명분의 칼을 들이대 권세를 키운다.

‘도학 정치’를 내걸었던 조광조는 함경도 일대의 야인 집단에 대한 기습 작전을 ‘군자의 일’이 아니라며 뒤집었다. 쓰시마 섬을 정벌했던 이종무는 조정 대신들의 트집을 우려해 무리하게 상륙 작전을 펴다 큰 손실을 보고 탄핵 받았는데, 그 사유는 인사 규정 위반이었다.

적군이 도성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면 ‘군자의 일’ 같은 허황된 명분론은 뭇매를 맞는다. 전쟁을 이겨 그 땅의 영주가 될 수 있다면 눈치 보며 작전을 펴다 그나마 탄핵 받는 어이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기업 곳곳에 숨어 있는 문제가 있는 사업들 중에는 나서서 해결해도 잘해야 본전이니 숨기고 떠넘기다 망가진 경우가 많다. 벌주듯이 떠맡기고 잘못되면 책임만 물으면 회사는 더욱 골병이 든다.

기회를 찾고 문제를 풀어 내면 팔자를 고치는 나라는 힘세고 부유해진다. 반대로 험한 일은 떠넘기고 권력 게임의 소재로 삼는 나라는 시들어간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