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 4000억원 걸린 소송에서 또 패소
한화·AIA생명도 고배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한화생명 63빌딩 전경. 사진=한화생명 제공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한화생명 63빌딩 전경. 사진=한화생명 제공
5년째 이어지는 즉시연금 소송전에서 한화생명과 AIA생명을 상대로도 가입자가 승소했다. 2022년 진행된 즉시연금 소송 관련 재판이 모두 가입자의 승소로 끝났다.

법원이 가입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최종 판결을 내린다면 보험사들은 8000억~1조원에 달하는 보험금을 추가로 지급해야 할 수 있다. 쉽지 않은 대결인 것을 예감한 보험사들은 패소에 대비해 충당금을 쌓아 두고 있다.

또 이긴 보험 가입자들

서울중앙지법 제203민사단독(소병석 부장판사)은 1월 21일 한화생명과 AIA생명보험의 즉시연금 가입자 7명이 이들 보험사를 상대로 제기한 미지급 연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틀 전인 1월 19일 재판부가 삼성생명 가입자의 손을 들어준 데 이어 또 한 번 즉시연금 소송에서 가입자가 승소했다.

즉시연금은 가입자가 목돈을 맡기면 한 달 뒤부터 연금 형식으로 매달 보험금을 받는 상품이다. 그중 상속 만기형(상속 연금형) 상품은 일정 기간 이자 개념인 연금을 받고 만기에 원금을 돌려받는 식으로 설계돼 있다. 사실상 초장기 예금 상품이나 마찬가지다.

즉시연금 상품 판매가 크게 늘어난 것은 2012년 전후다. 금리가 떨어져도 최저 보증 이율을 보장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고액 자산가와 은퇴자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 상품을 둘러싼 소송이 줄을 잇게 된 것은 연금 금액에 대해 보험사와 가입자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시연금을 판매한 보험사들은 보험료에서 사업비를 차감한 ‘순보험료’에 공시 이율을 적용해 매달 지급하는 연금 월액을 정해 공시한다.

이와 별도로 가입자가 사망하거나 보험 만기가 됐을 때 지급해야 하는 ‘만기 환급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금 월액에서 일정 금액을 공제했다.

그런데 만기 환급금 관련 공제 내용이 보험 약관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보험사들은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 산출방법서(이하 산출방법서)’라는 별도 내부 규정을 통해서만 해당 공제 내용을 반영한 보험료 산식을 기록해 놓았다. 설계사들 역시 공제 내용에 대해선 안내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를 부당하다고 본 가입자가 하나둘씩 “약관보다 연금을 덜 받았다”며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기 시작했다. 금감원은 2017년 11월 분쟁조정위원회를 열어 즉시연금 판매인 삼성생명에 고객들이 덜 받은 보험금을 전액 지급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금감원은 2018년에도 다른 보험사들에 똑같은 내용을 권고했다.

보험사들은 “산출방법서에 만기 보험금 지급 재원을 공제하고 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가입자들은 “약관엔 사업비 등 일정 금액을 떼고 연금을 준다는 내용이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소송을 걸기 시작했다.

뒤집기 어렵나…충당금 쌓는 보험사

보험사들은 연이은 소송전에서 거듭 고배를 마시고 있다. 올해 삼성생명·한화생명·AIA생명이 패소하기 이전에도 교보생명·동양생명·미래에셋생명 등이 줄줄이 1심에서 졌다.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은 2021년 10월 가입자 한 사람이 개인 자격으로 건 소송에서 승소하긴 했지만 3개월 뒤 다른 가입자들이 제기한 공동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빛이 바랬다는 평가다. 오히려 패소 사례가 하나 더 늘면서 가입자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내줬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모두 승소한 보험사는 NH농협생명(2020년 9월)이 유일하다.

패소 판례들이 쌓이면서 보험사들이 줄줄이 대기 중인 후속 소송에서도 승소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국에선 집단 소송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번 즉시연금 소송은 보험사별 여러 가입자가 각자 제기한 수십여 건이 진행되고 있다. 재판부가 최종 판결에서 보험사 측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추가 연금 지급에 따른 비용 유출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이 해당 분쟁을 처리하기 위해 2018년 벌인 전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보험사들의 즉시연금 가입자는 약 16만 명이다. 미지급 연금액은 분쟁조정위원회 권고 기준으로 8000억~1조원에 달한다. 삼성생명이 4000억원으로 가장 많고 한화생명(800억원)과 교보생명(750억원)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삼성생명은 즉시연금 소송에서 패소할 것에 대비해 2021년 2분기에만 2780억원을 충당금으로 쌓았다. 한화생명·동양생명·미래에셋생명·KB생명 등도 충당금을 적립해 놓았다.

소비자의 손을 들어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면서도 결과를 뒤집기가 만만치 않은 상황인 것을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법조계에선 패소한 보험사들이 곧바로 항소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즉시연금 소송이 모두 대법원에 가서야 결론이 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삼성생명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삼성생명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돋보기]
계약할 때 연금액 설명했어야 보험사 승소할 듯

그동안 즉시연금 소송에서 보험사가 승소한 사례는 손에 꼽는다. 약관에 연금 산출 방식에 대한 설명을 넣지 않았다는 것이 매번 보험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소송에 휘말린 보험사 중 NH농협생명만이 약관에 연금 지급액 관련 내용(가입 후 5년간 연금 월액을 적게 한다)을 기재했다. 보험사들의 패소가 줄 잇는 즉시연금 소송에서 승소한 이유다.

NH농협생명 사례를 제외하곤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2021년 10월 가입자 윤 모 씨가 삼성생명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에 대한 재판이다. 이 재판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 46부(부장판사 이원석)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같은 날 한화생명이 즉시연금 가입자 김 모 씨를 상대로 낸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에서도 “채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금 월액 관련 설명을 약관에 적지 않았음에도 보험사가 즉시연금 소송에서 승소한 첫 사례다.

재판부는 삼성생명이 약관에 연금 월액 산정의 기준이 되는 금액은 산출방법서에 정한 바에 따라 계산한 금액이라고 기재한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해당 지시문도 보험 약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며 “삼성생명은 당시 가입설계서를 통해 원고가 받게 될 연금 월액이 공시 이율 변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설명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원고가 보험 가입 당시 상속 종신형 등 만기 환급금이 없는 다른 상품에 대한 안내를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산출방법서에 대한 설명을 받았더라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산출방법서는 보험 계약 체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정보인 만큼 설명 의무의 대상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은 올해 들어 차례로 즉시연금 가입자들이 공동을 낸 소송에서 패소했다. 3개월 전 승소 판결이 또 다른 소송에서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교보생명·동양생명·미래에셋생명·KB생명 등 다른 보험사도 가입자들이 공동으로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여전히 약관에 연금 월액 산정 방식이 없다는 점이 보험사들에 불리하지만 가입자 개개인으로 놓고 볼 때 계약 체결 당시 얼마나 연금 월액에 대한 설명이 이뤄졌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셈이다.

일각에선 금감원이 보험 가입자들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어 보험사들이 릴레이 소송전에서 이기는 게 쉽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금감원은 2017~2018년 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보험사들에 즉시연금 미지급금을 모두 고객들에게 돌려주라고 권고한 이후에도 소송을 제기하는 가입자들에게 법적 조력을 포함한 여러 지원을 하고 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