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선진국이면서도 보건 후진국인 미국의 반면교사

건강염려증 6

외국인 집을 방문하면 문화적 간극을 실감나게 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20여 년 전 미국인 친구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화장실 거울 수납장에 즐비한 플라스틱 약통을 보고 꽤나 당황했던 기억이다. 비교 문화 감수성이 부족했던 때라 이 친구가 무슨 심각한 질병이라도 있나 은근히 염려됐었다.

시간을 좀 두고 넌지시 물어보니 60대 초반 부모님의 약통들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심각한 지병이라도 앓고 있느냐고 하니 “그냥 심장·혈압·당뇨· 관절 뭐 그런 것들”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 같다. “아니, 약들을 왜 화장실에 둬” 하는 질문에 아침저녁에 양치할 때마다 약을 먹으니 가장 적절한 곳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욕실 수납장을 메디슨 캐비닛(medicine cabinet)이라고 부른다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 후 상당수 미국인들이 ‘밥 먹듯이’ 약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약에 대한 재래적 경계심을 지닌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미국식 라이프스타일이다.
미국인 욕실 메디슨 캐비닛에 가득 찬 처방약들 / 자료=게티이미지
미국인 욕실 메디슨 캐비닛에 가득 찬 처방약들 / 자료=게티이미지
◆한국의 1년 예산보다 큰 미국인들의 약값 지출
밥 먹듯 먹는 약, 그 약으로 얻은 병[몸의 정치경제학]
경상 의료비는 한 나라의 국민이 보건 의료 관련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지출하는 총비용을 말한다. 미국인들은 지난 20년간 꾸준히 국내총생산(GDP)의 18%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해 왔다. 스위스·독일·영국·일본에 비해 평균 두 배가 넘는 지출이다.

<표1>을 보면 지난 20년간 미국 내 의료비용 증가가 물경 300%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2년 1950억 달러에서 2012년 3190억 달러로, 2021년에는 5740억 달러로 급증한다. 국민 1인당 연간 의료비 1700만원,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문학적 의료 지출 중에서 약값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높아져 왔다. 코로나19 사태라는 변수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의료비 대비 약값 지출은 이미 12%에 육박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2>는 1인당 의료비와 약값 지출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위해 단위를 원화로 바꿨다.

1인 약값 206만원을 한국 소비자의 관점에서 환산해 봤다. 2만원짜리 배달 치킨 한 마리를 1년 내내 주 2회씩 질리도록 먹어야 되는 금액이다. 매출 상위 5개 전문점 카페라테 평균 가격 4000원, 이를 1년 5개월간 매일 마실 수 있다. 4인 가족 기준 연간 약값 820만원이면 서울 소재 Y대학교 1년 치 등록금(평균)을 낼 수 있는 돈이다.

미국 인구가 현재 3억3400만 명이니 1인 평균 약값 지출을 곱하면 688조원이 나온다. 2021년 한 해 동안 미국인들이 소비한 약값은 같은 해 세계 반도체 시장 총 매출 665조원(미국반도체협회 SIA)보다 많고 2022년 대한민국 총예산 607조원보다 13% 이상 큰 규모다.
◆병원 무서워 약국 찾고 약값 무서워 약을 끊는 미국인들

미국 CBS 방송은 2020년 기준 전 국민의 20% 정도가 하루 5알 이상의 처방약을 먹는다고 보도했다. 비영리 의료연구센터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에 따르면 70% 이상의 미국인이 적어도 하루 1알 이상을, 50% 이상은 2알 이상의 처방약을 먹는다고 한다. 처방약을 매일 먹는 사람들은 평균 4알을 투약하는데 물론 비타민이나 여타 영양제와 건강기능식품은 별도다.

그런데 미국인들의 ‘약 사랑’에는 애처로운 사연이 있다. 국민 1인당 연간 의료비가 1700만원 드는 사회에서 병이란 거의 천벌에 가깝다. 미국에서 20년을 생활한 필자도 경찰서보다 가기 싫었던 곳이 병원이었다. 어쩌다 응급실에라도 한 번 다녀오게 되면 1년 치 저축을 모두 털어야 했다.

그래서 이빨이 아파도, 혈뇨가 생겼을 때도 꾹꾹 1년간 참았다가 한국에 돌아와 진료받았다. 당시 대한민국 보험 적용 대상자가 아니었지만 왕복 항공료를 포함하더라도 미국 병원에서 치료받는 값보다 훨씬 싸고 신속했기 때문이었다.

보험료와 병원 치료비가 상상을 초월하니 웬만하면 약으로 ‘땜빵’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꿩 대신 닭으로 약국에 자주 들르게 된다. 약물 편의주의라는 사회적 풍토도 무시할 수 없지만 본원적으로는 공공 의료의 위축과 시장으로 경도된 미국식 보건 체계가 빚은 비극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약값에는 왜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 것일까. 단순히 약을 많이 먹기 때문만은 아니다. 피터 패터슨 재단은 미국 내 처방 약품의 가격이 영국·독일·호주·스위스·캐나다·일본 등 비교 대상 9개국 평균보다 2.4배나 높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전 세계 인구의 4.5%만 차지하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처방약의 50%를 소비하는 기형적인 상황이 지속됐다. 제약업계와 ‘아삼륙’인 의료업계가 처방약의 나팔수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미국 질병관리센터(CDC)는 약품 구매 지출의 총 84%를 차지하는 브랜드 약품(특허를 지니고 있는 거대 제약회사 제품)이 비교국 평균 대비 4.9배나 높다는 믿기 힘든 사실을 지적했다. 유명 제약회사 브랜드 제품은 2021년 한 해에만 평균 5% 인상됐고 이런 살인적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 약 30%의 환자가 처방약을 포기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역시나 정치…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바나나 공화국’도 아닌 미국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지난 20여 년 동안 정부와 정치인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치인들이 제약 회사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약가 인하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로비(lobby)의 정치다. 로비의 정치를 다른 말로 바꾸면 힘의 정치요, 돈의 정치가 된다. 제약회사가 기부하는 돈의 무게가 성난 시민들의 표심보다 무거우면 정치의 추(錘)는 당연히 그리로 기울기 마련이다. 각종 시민 단체와 상당수 정치인들이 약값 제한 법제화를 위해 고군분투해 왔지만 다수결이라는 냉정한 원리는 본시 정의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법이다.

하지만 성난 소비자들도 이번만큼은 가만히 앉아 당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38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약값 인하에 가장 강경한 민간 단체다. 회원 대부분이 50세 이상 고령군이라 처방약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다. 이 단체의 강력한 로비 끝에 2022년 8월 약가 인하를 위한 주요 법안이 통과됐다.
‘당장 의약품 비용을 낮춰라!’ 미 상원 회의실 연단에 서 있는 AARP 회원들 / 자료 : AARP
‘당장 의약품 비용을 낮춰라!’ 미 상원 회의실 연단에 서 있는 AARP 회원들 / 자료 : AARP
법안의 요체는 두 가지다.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연방건강보험(Medicare)이 제약회사와 처방약 단가를 협상할 수 있도록 한 것과 물가 인상률 이상의 약가 인상을 금지하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2년 8월 16일 물가 인상 경감 조치 법안을 조인하면서 “이에 따라 처방약 지출이 현격히 줄어들 것이고 1300만 명의 시민이 연간 800달러(약 1040만원)을 절약할 수 있게 됐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번에도 법안 처리가 좌절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를 장악한 상태였지만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 다수가 제약회사에서 막대한 정치 후원금을 받는 형편이라 ‘물주들의 손 깨물기’는 여간 껄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상원은 51 대 50으로 가까스로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어 하원도 220 대 207로 아슬아슬 표결 처리했다. 3개월 뒤 11월 중간 선거 결과 공화당이 하원 다수석을 점유한 시점에 투표가 진행됐더라면 부결됐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세계 최고의 의료 기술을 자랑한다지만 정작 국민 다수가 그 혜택을 누리기는커녕 약값 출혈 지출로 고통받고 있는 나라. 거대 제약회사의 횡포에 눌려 살면서도 수십년 동안 약가 인하조차 번번이 실패하는 나라. 도대체 강대국이란 무슨 쓸모가 있고 선진 사회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아무리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는 ‘큰형님’ 나라라지만 이런 건 제발 좀 안 따라갔으면 하는 심정으로 글을 맺는다.

최정봉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