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증시 33년 만에 3만3000선 뚫고 1분기 기업 투자 3개월 만에 반등
도쿄증권거래소, 영국서 투자자들에게 "추가 투자하라"…올해 기업들에 주가 부양 요구하기도
물가, 임금도 올라…그럼에도 금리인상 어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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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 주가 지수인 니케이225 지수가 보이는 스크린 앞을 행인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의 대표 주가 지수인 니케이225 지수가 보이는 스크린 앞을 행인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1. ‘세일즈맨’이 된 도쿄증권거래소 “일본이 변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일본 경제에는 많은 과제가 남아 있지만 주식 시장은 매력적입니다.”


6월 29일 유럽의 금융 중심지 런던에서 한 남성이 “일본에 추가 투자하라”며 열띤 연설을 했다. 160여 명의 유럽 투자자를 대상으로 강연한 이 남성은 야마지 히로미. 도쿄증권거래소가 속한 일본 거래소 그룹의 최고운영책임자다.

일본 거래소의 주가 부양 활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해 두 차례나 상장 기업들에 직접 “주가를 올리라”고 압박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 1월과 3월 도쿄 증시에 상장한 3300여 개 기업에 ‘주가순자산배율(PBR)이 1배를 밑도는 상장사는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공시하고 실행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PBR 1배 미만 기업은 시가 총액이 장부상 기업 가치보다 낮다는 의미다. 투자자들이 기업의 성장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해 주식을 사지 않으면 PBR이 떨어진다. 기업 실적이 좋지 않아도 성장성이 높다고 판단되면 PBR은 10배, 20배 넘게 치솟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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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소가 인위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리라”고 기업에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다. 일본 정부 차원의 전방위적 정책이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만한 대목이다.

거래소가 직접 칼을 빼든 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 증시는 500개 주요 상장사 기준으로 PBR 1배 미만인 기업이 전체의 43%에 달한다. 도요타조차 올해 초만 해도 PBR이 0.87배에 불과했다. 하지만 3월 이후 PBR이 1.12배를 돌파했다.

그동안 일본 기업들이 소극적 경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막대한 유보금을 쌓아 놓고 주주 환원도, 대규모 투자에도 나서지 않았다.
2. 버핏의 투자가 상징하는 것 도쿄증권거래소가 엄포를 놓자 기업들은 자사주를 매입하고 배당을 실시하며 주가 부양에 나섰다. NHK에 따르면 지난 5월 300개 기업이 자사주 매입을 발표했고 매입 규모는 3조2600억 엔(약 30조원)으로, 월간 기준 역대 최대치였다. 올해 주주들에게 돌아갈 배당금은 1000억 달러(약 130조원)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

주주 총회장의 풍경도 바뀌었다. NHK에 따르면 6월 주주 총회에서 주주 제안을 받은 기업은 90개사였다. 이렇게 많은 기업이 주주 제안을 받은 것은 일본 역사상 처음이었다.
지난 6월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주주총회장./연합뉴스
지난 6월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주주총회장./연합뉴스
주주 환원 정책만 호재는 아니었다. 일본 증시 활황의 가장 큰 주연은 역대급 ‘엔저’였다. 일본 기업의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리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몰렸고 1분기 주요 기업들이 예상치를 뛰어넘는 실적을 냈다. 여기에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의 보증이 더해졌다.

그는 경제 블록화에 따라 공급망이 미국과 중국 진영으로 나눠지면 자원을 확보한 기업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판단, 몇 년 전부터 일본 상사주 지분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가격이 뛰면서 일본 상사들의 이익이 늘었고 엔저로 수출 기업의 실적이 개선되자 닛케이지수는 올해 들어 30% 상승했다. 버블 붕괴 이후 3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다.
3. 반가운 물가 상승, 더 반가운 임금 인상
도쿄 핵심 상권인 긴자 거리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EPA=연합뉴스
도쿄 핵심 상권인 긴자 거리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EPA=연합뉴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말 그대로다. 임금과 물가가 제자리걸음을 걸었고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3분기까지 마이너스 성장했다. 임금이 오르지 않아 소비가 늘지 않고 기업 투자는 줄고 물가도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었다.

일본 정부가 세계 유일의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하며 돈을 풀어도 좀처럼 활기가 돌지 않았다. 전 세계 중앙은행이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종결 이후 금리를 인상했지만 일본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 6월에도 단기 금리(기준금리)를 마이너스로 동결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전과 다른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다.

물가가 오르고 임금도 올랐다. 3월 기준 일본 내 대졸자 취업률은 97.3%에 달했다. 소비자 물가상승률도 지난해 8월 이후 9개월 연속 3% 이상 유지되며 만성적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개선되고 있다.

올해 일본의 춘투(춘계 임금 협상) 임금 상승률은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3.66%에 달했다. 일본 기업의 임금 상승률이 3%대를 기록한 것은 1994년 이후 29년 만에 처음이다. 다만 일본 중앙은행은 물가와 임금 인상이 경기 회복에 미치는 영향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실질 임금은 13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 가고 있어 물가와 임금 인상 영향에 대해 판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게 일본 중앙은행의 방침이다.

우에다 총재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춘투의 영향이 여름철까지 실제 연봉에 반영될 것”이라며 노동 시장의 수급 변화 등으로 “(임금은) 기조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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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물가 상승, 반가운데 대책은 없어 아이러니하다. 10년 넘게 물가 상승을 기다려 왔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마냥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물가가 올라도 금리를 인상해 돈줄을 조일 수 없다. 일본은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지출을 늘렸다.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265%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부채 비율이 높아졌다.

2022년 말 기준 일본의 국채 발행 금액은 1005조7772만 엔으로 1경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그런데 일본의 국가 부채는 구성이 조금 다르다. 일본 중앙은행이 국채의 53%를 떠안았다. 이 같은 정부 부채의 구조 덕분에 일본은 현대사에서 단 한 차례도 채무 불이행(디폴트)을 겪은 적이 없다. 실제 일본 중앙은행은 최근 몇 년 동안 대량의 국채를 매입해 금리를 낮게 유지하면서 일본 정부의 부채 상환 능력을 지원해 왔다.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연합뉴스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연합뉴스
만기가 도래한 채권은 그만큼 다시 찍어 낸다고 해도 언제든지 ‘돈을 빌려 줄’ 대상이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일본은행은 정부의 자회사’라고까지 표현한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올리면 국채 가격이 하락해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하다. 10년 넘게 이어진 제로 금리 정책에 엔화의 통화 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엔화의 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 실효 환율은 50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엔저로 외국인 투자가 늘고 수출 경쟁력이 살아나는 기업이 있는 반면 원자재 등 수입 비용이 늘어 어려움에 처하는 기업도 있다. 여기에 물가 변동분을 반영한 실질 임금이 계속 떨어져도 일본중앙은행은 쉽사리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들 수 없다. 일본 내부에서 ‘엔저’로 인한 경기 회복을 일본 국민이 체감하고 내수 시장 활성화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화려한 부활일까 짧은 영광일까…일본 경제를 읽는 5가지 장면[기시다노믹스의 힘②]
5. 지난해 자영업자 도산 36배 증가 올해 초 114년 된 과자 회사 ‘사쿠마제과’가 문을 닫은 것은 상징적이다. ‘사쿠마식 드롭스’는 일본의 국민 사탕으로 불렸지만 수입 물가 상승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실제 일본에서 도산하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급격하게 늘고 있다. 엔저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소상공인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일본 시장 조사 기관인 도쿄상공리서치가 2022년 일본 전국 기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지난해 6880곳이 도산했다.

올해는 기업이 망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NHK가 민간 데이터 회사 자료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5개월간 3224개 기업이 도산했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일본 정부가 지원책으로 도입한 실질 무이자·무담보 대출인 ‘제로제로 대출’ 상환이 본격화되면서 회생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에서는 정부의 ‘제로 금리’ 지원책이 실질적으로 파산 상태이면서도 사업을 계속하는 ‘좀비 기업’의 연명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