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기업에 젊은 경영인 매칭해 발전 시기는 형태
지역 흑자기업 폐업 막아…M&A 거부감 큰 일본서 대안으로 부상

서치펀드 투자를 통해 아레스산업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오토미 료(사진 왼쪽) 모습. 사진=서치펀드 재팬
서치펀드 투자를 통해 아레스산업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오토미 료(사진 왼쪽) 모습. 사진=서치펀드 재팬
지금 일본에서는 재벌 2·3세가 아니어도 20대에 수십억원짜리 기업을 인수해 사장이 될 수 있다.

캐릭터 상품을 기획·판매하는 기업 아레스컴퍼니(지바현 마쓰도시)의 사장 오토미 료는 1993년생으로 올해 31세다. 아레스컴퍼니는 오토미 사장이 6살 때인 1999년 설립됐으니 그가 창업자일 리는 없다.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다. 사모펀드(PEF) 운용사가 새로 인수한 기업에 파견한 펀드매니저도 아니다.

아레스는 오토미 사장이 2년간 잘 경영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업을 고른 끝에 2022년 수억 엔(수십억원)을 주고 인수한 회사다. 재벌 2·3세가 아닌 그가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자신을 사장이 될 만한 인재라고 평가해 준 투자수단으로부터 인수자금을 빌려서 사장이 됐다. 열정 있는 인재, 높은 수익 일으켜
‘사장이 될 상인가’를 평가하는 투자수단이 바로 서치펀드다. 벤처 캐피털(VC)은 될성부른 떡잎 같은 회사에 투자하고, PEF는 저평가된 기업을 사들인다. 서치펀드는 기업이 아니라 사람, 그중에서도 ‘사장이 될 만한 인재’에 투자한다.

오토미 사장은 경영학 분야에서 일본 최고 명문인 히토쓰바시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땄다. 일본 엘리트들의 산실인 미쓰비시종합상사와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베인앤컴퍼니를 거쳤다. 서치펀드가 오토미의 수완을 믿고 수십억원을 선뜻 빌려준 이유다.

서치펀드는 1984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탄생해 하버드대 등 명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활성화한 신종 창업 형태다. 스타트업이 사업 아이템을 갖고 회사를 처음부터 차리는 형태라면 서치펀드는 기존 사업을 더 발전시키는 형태의 창업이다.

서치펀드는 2년간 인수 대상을 탐색해서 인수한 기업을 4년간 운영해 경영성과를 배분한다. 인수 규모는 대략 5억~15억 엔(약 45억~134억원) 규모다. 2년 안에 인수 대상을 찾지 못하면 도전은 그것으로 끝난다.

스탠퍼드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84년 이후 북미 지역에서 생긴 526개 서치펀드의 내부수익률(IRR)은 35%로 벤처캐피털과 PEF를 앞섰다. 모테기 유타카 노무라리서치앤어드바이저리 사장은 “자신이 만든 사업계획을 토대로 스스로 인수 대상을 찾아 필사적으로 경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후계자 없는 일본 기업엔 서치펀드가 제격
미국의 서치펀드는 경영인을 꿈꾸는 젊은이가 직접 펀드를 만들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투자가로부터 자금을 모집하는 형태다. 일본에서는 금융회사가 ‘후계자난(難)’을 겪는 중소기업과 창업을 꿈꾸는 젊은 경영인 후보를 매칭하는 ‘일본식 서치펀드’로 진화했다.

서치펀드가 일본과 궁합이 잘 맞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유능한 경영인이라 하더라도 창업에 능한 사람과 수성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일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다 기존의 기술을 개선하는 데 능한 나라다.

사업 아이템 하나로 ‘맨땅에 헤딩’하는 스타트업이 경제 규모에 비해 좀처럼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다. 튀는 걸 꺼리는 일본 특유의 기업 문화와 사회 분위기에서 자란 일본 젊은이들 역시 창업에는 소극적이지만 기존의 사업을 갈고닦아 발전시키는 데는 소질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이 서치펀드를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중소기업의 후계자난을 해소할 수 있는 기대주여서다. 2025년이면 일본 중소기업 245만 곳은 평균적인 은퇴 연령인 70세를 넘은 사장들이 경영한다. 이 가운데 127만 곳은 후계자를 구하지 못한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중소기업청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중소기업 60만 곳이 흑자인 채 문을 닫으면서 65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22조 엔의 국내총생산(GDP)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지금까지 사업승계의 주요 해결책은 기업 인수합병(M&A)이었다. 하지만 역대 최대 규모의 사업승계형 M&A가 이뤄졌다는 2022년에도 성사 건수는 1681건이었다. 연간 6만 건 이상인 일본 정부 목표의 2.8%에 그쳤다.

M&A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면서 ‘M&A가 아닌 것 같은 M&A’를 고안하는 일은 ‘대폐업 시대’를 막는 열쇠가 됐다. 그 열쇠 가운데 하나로 서치펀드가 주목을 받는 것이다.

일본 중소기업 경영인들이 M&A를 꺼리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식 같은 회사를 맡아서 경영할 사람의 면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치펀드는 일면식도 없던 PEF나 지금까지 경쟁상대였던 기업에 회사를 매각하는 대신 회사를 물려받아 잘 키워 보겠다는 젊은 후계자를 전국에서 선발할 수 있다. 지방은행, 지역 중소기업 살리기 나서
일본 서치펀드의 원조는 야마구치현의 지방은행인 야마구치파이낸셜그룹이다. 2019년 야마구치파이낸셜그룹 계열 3개 은행이 10억 엔을 출자해 일본 최초의 서치펀드인 야마구치캐피털을 설립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 집안의 지역구이기도 한 야마구치현은 후계자가 없는 중소기업 비율이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역이다. 지역은행인 야마구치은행의 밥줄인 현지 중소기업이 대폐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토 다다시 야마구치캐피털 사장은 “야마구치현의 기업이 다른 지역의 기업에 팔리면 본사가 이전하면서 주거래은행도 바뀌게 된다”고 말했다.

서치펀드는 대도시의 우수하고 젊은 경영자를 야마구치로 모셔와 현지 기업이 다른 곳으로 팔려 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야마구치캐피털의 서치펀드는 1949년 창업한 야마구치시의 식품 가공회사 미카사산업을 대형 종합상사 출신인 가라사와 히로시(38) 사장과 매칭하는 등 지금까지 7건의 M&A를 성사시켰다. 성과를 인정받으면서 펀드 규모는 50억 엔으로 커졌다.

수도권 전문 서치펀드도 등장했다. 요코하마은행은 2023년 3월 수도권의 승계형 M&A를 전문으로 하는 서치펀드를 설립했다. 총 10억5000만 엔 규모의 펀드를 10년간 운영한다. 건당 1억~2억 엔 규모의 M&A를 지원할 계획이다.

요코하마시가 속한 가나가와현은 후계자 부재율이 74.5%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도쿄도도 71.3%로 전국 평균인 59.9%를 훌쩍 넘는다. 기존의 서치펀드는 일본 전역을 대상으로 활동했지만 요코하마은행의 서치펀드는 수도권에 특화한 게 특징이다.

일본 최대 증권회사인 노무라증권도 지난해 58억 엔 규모의 서치펀드를 만들어 시장에 진입했다. 노무라증권의 서치펀드에는 아와은행, 산인합동은행 등 지방은행들이 참여했다.

서치펀드에는 지방은행의 참여가 활발하다. 후계자난을 겪는 지역 중소기업을 발굴하는 데는 지방은행의 네트워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지방은행 차원에서도 파악이 어려운 영세기업은 지역 신용금고가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도 서치펀드를 직접 지원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약점인 스타트업 육성과 청년 창업, 중소기업 승계난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책금융 회사인 일본정책투자은행은 지난 2020년 중소기업 전문 M&A 자문회사인 일본M&A센터와 ‘서치펀드재팬’을 설립해 1호 펀드를 10억 엔 규모로 조성했다.

MBA 학위를 따는 등 기업 경영에 뜻이 있는 젊은 인재를 일본M&A센터가 발굴한 중소기업과 연결하는 구조다. 첫머리에 소개한 오토미 료 사장과 아레스컴퍼니를 연결한 것도 서치펀드재팬이었다.

서치펀드로 아직 후계자를 구하지 못한 중소기업 127만 곳의 사업승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엔 규모가 작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09년 ‘중소기업의 경영 승계 원활화에 관한 법률’(경영 승계 원활화법) 제정 이후 15년째 후계자난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는 일본 정부와 민간 투자회사들의 다양한 시도는 비슷한 위기를 맞을 한국도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