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3고’ 쇼크]
과일 가격 급등이 이어지고 있는 4월 2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사과를 고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과일 가격 급등이 이어지고 있는 4월 2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사과를 고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금리인상과 인하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의외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한 곳 있다. 자영업자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다.

“지금보다 금리 더 오르면 자영업자는 폭망 아녜요?”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랐어요. 금리 인상되어야 합니다.” 대파 끝나니 양배추…폭탄돌리기?흔히 금리인하를 가장 기다리는 게 자영업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산이다. 자영업자 사이에서는 ‘금리인상’을 주장하는 이들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유는 단 하나, 가게 세보다 자영업자를 위협하는 생활물가, 즉 장바구니 물가의 상승이다.

“양배추 무슨 일 있나요?” “양배추 가격 실화예요?” “양배추 미쳤나요?”

지난 4월 17~18일 국내 최대 자영업자 커뮤니티인 ‘아프니까 사장이다’의 주인공은 양배추였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수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이날 기준 양배추 8kg의 중도매인 판매 가격은 2만520원이다. 한 달 전 9566원에서 약 114% 올랐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약 136% 상승이다.

한 포기의 소매가는 17일 기준 5910원으로 한 달 전보다 44% 올랐다. 그러나 이 역시 ‘평균가’다. 지역별로는 양배추 값이 경쟁하듯 올라왔다. “행사상품 양배추 1통에 9900원”, “춘천 양배추 1통에 1만원 넘어갔습니다”….

양배추 값의 고공상승은 당장 자영업자의 매출타격으로 이어졌다. 경기도 안양에서 30년째 바비큐 장사를 하는 A 씨는 “양배추 샐러드가 기본품목인데 몇 달 새 3배가 올랐다. 가게 운영하면서 처음 보는 역대 최고가”라며 “그나마 다른 품목들이 가격을 유지해줘서 인상 없이 버텨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근 자영업자들에게 식자재 가격은 폭탄 돌리기와 다름 없다. 한동안은 대파와 부추 값이 널을 뛰더니 이젠 김과 양배추가 ‘금값’이 됐다. 폭탄 돌리기의 결과는 장바구니 물가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주요국의 장바구니 물가 오름세가 꺾인 반면 한국은 2월과 3월 두 달 연속으로 소비자물가지수가 1년 전보다 3% 넘게 올랐다. 농산물 때문이다.
“차라리 금리인상을…” 고물가에 자영업자는 웁니다 [‘신 3고’ 쇼크]
작년 동월 대비 농산물 물가상승률은 2월과 3월 각각 20.9%, 20.5%로 두 달째 20%대를 기록해 전체 물가를 끌어 올렸다. 특히 신선과일 물가지수는 2월에 이어 3월에도 40% 넘게 올랐다. 생산량이 급감한 사과값의 3월 상승폭은 작년 동월 대비 88.2%로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80년 1월 이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흔히 총선 전에 정부가 나서 물가 인상의 고삐를 죄는데 효과는 크지 않았다. 정부가 서민 물가 부담을 덜어주고자 집중 관리해온 라면과 빵, 과자, 커피, 아이스크림, 설탕, 원유 등 7개 품목은 1분기에도 오름세를 이어갔다. “식자재 비용에 헛웃음만 난다”는 자영업자 글이 수백 개의 공감 댓글을 받는 이유다.

물가상승은 악순환의 고리다. 물가 부담에 소비자들이 외식을 줄이면서 곧 매출 부진으로 나타난다. 통계청 서비스업생산지수 중 음식점 업황을 보여주는 항목은 10개월째 감소세다. 업계의 어려움이 길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불황의 장기화는 자영업자에게는 생존 문제로 연결된다. 코로나 팬데믹 때부터 버티고 버티던 자영업자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2월 폐업 사유로 지급된 ‘노란우산’ 공제금은 3117억원으로 지난해 동기의 2523억원보다 23.5% 많았다. 지급 건수도 2만4253건으로 전년 동기(2만833건) 대비 16.4% 증가했다. 노란우산 공제 가입률이 약 23%로 추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폐업 사례는 훨씬 많다는 얘기다.

노란우산은 폐업이나 고령 등으로 생계 위협에 처한 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사업 재기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제도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운영하고 정부에서 감독한다. 폐업을 이유로 공제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가파르게 늘어난다는 건 한계 상황에 몰린 소상공인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부채냐 물가냐…한은의 딜레마
한국외식업중앙회 자영업자들이 2023년 6월 20일 국회 앞에서 생계 회복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외식업중앙회 자영업자들이 2023년 6월 20일 국회 앞에서 생계 회복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고물가 사태가 한동안 장기화될 것이란 전망이다. 농산물 물가에 이어 최근 중동 사태로 유가가 더 오를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유가 상승은 전기·가스요금을 자극할 수 있어 음식점주들에게 또 다른 부담이다. 한국전력과 한국가스공사의 재무 위기 등으로 인해 전기·가스요금 인상 필요성은 꾸준히 거론돼 왔지만 관련 논의 시점은 사실상 ‘총선 이후’로 미뤄진 상태였다.

정부 또한 에너지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물가 당국인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인상 필요성을 내부적으로 신중히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2022년 이후 6차례의 전기요금 인상으로 한전이 손해를 보고 전기를 파는 국면에서는 일단 벗어났지만 2021∼2023년 원가 밑으로 전기를 팔아 생긴 43조원의 누적적자로 한국전력은 심각한 재무 위기를 겪고 있다.

한전은 작년 3분기 이후에는 분기 영업이익을 내고 있지만 국제 에너지 가격과 환율의 동반 상승은 몇 개월의 시차를 두고 한전의 수익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국가스공사는 여전히 해외에서 들여온 액화천연가스(LNG)를 원가 이하로 국내에 공급하고 있어 환율과 가스 가격 동반 상승은 이미 15조7000억원에 달하는 미수금의 추가 증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업계에선 “이제 청구서가 날아올 것”이란 전망이 파다하다.

자영업자 B 씨는 “한쪽을 죽여야 한쪽이라도 살릴 수 있는 상황”이라며 “금리를 올려서 부채가 있는 쪽을 죽이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쪽을 택하는 게 맞다. 반대는 더 지옥”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금리인상도 인하도 할 수 없는 한국의 현재 상황이다. 가계부채는 증가 규모와 속도 모두 임계치를 넘어섰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세계 주요 34개국 가운데 1위다.

국제금융협회(IIF)가 최근 내놓은 가계부채 관련 보고서를 보면 작년 3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0.2%로 집계됐다. IIF의 조사 대상 34개국 중 GDP 규모보다 가계부채가 더 많은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2020년 이후 4년째 관련 통계에서 1위다.(한국은행은 올해 1분기 중 100% 밑으로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중에서 빚의 부담이 가장 큰 게 자영업자다. 전체 가계부채 연체율은 0.4% 정도인데 자영업자 연체율은 1.3%에 가깝다.

오죽하면 한국은행의 선택은 2023년 1월부터 2024년 4월까지 10개월 연속 동결이다.
서울 명동에 있는 빈 상가에 임차인을 구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명동에 있는 빈 상가에 임차인을 구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이창용 한은 총재는 4월 12일 금리 동결을 선택한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금융통화위원회 위원들은 지금 상황에서 하반기 금리인하 가능성에 대해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나타냈다.

그는 “농산물 등 물가 수준이 높은 것은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도 보였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나 극한 날씨로 농작물 생산이 감소해 먹거리 물가가 오르는 ‘기후플레이션’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는 무관하다는 얘기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이 제일 곤혹스러운 점은 사과 등 농산물 가격이 높은 것은 기후변화가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지구온난화가 식품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연구 결과도 최근 나왔다. 독일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는 2022년 여름 유럽 각국에 기록적인 폭염이 닥치자 식품 물가가 0.43∼0.93%포인트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또 2035년이 되면 기온 상승으로 인한 ‘기후플레이션’으로 식품 물가가 최대 3.2%포인트 오르고 전체 물가는 최대 1.2%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기후 문제라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중앙은행 제1의 목표는 ‘물가안정’이다.

이 총재는 “만일 유가 등이 안정되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당초 예측한 대로 하반기 월평균 2.3% 정도까지 둔화한다고 하면 금통위원 전체가 하반기에는 금리 인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반면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유가 등을 이유로 기존 예상 경로인 2.3%보다 높아진다면 하반기 금리 인하가 어려울 수 있다. 데이터를 보고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중앙은행(Fed)은 금리 인하가 지연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지난 4월 16일 “최근 경제 지표는 확실히 더 큰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오히려 그런 확신에 이르기까지 기대보다 더 오랜 기간이 걸릴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된다면 현재의 긴축적인 통화정책 수준을 필요한 만큼 길게 유지할 수 있으며, 동시에 노동시장이 예상 밖으로 위축된다면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상당한 완화 여지를 두고 있다”라고 말했다.

파월 의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인플레이션 둔화세가 진전을 보일 때까지 현 5.25∼5.50%인 기준금리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