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제재 6년 만에 뒤집혀
애프터마켓 규제 기준 첫 제시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서초동 대법원. 사진=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사진=연합뉴스
대법원이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지식재산권 행사를 폭넓게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놨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애프터마켓(후속시장) 시장 첫 제재 사례였던 지멘스 사건에서 제조사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며 63억원대 과징금 부과를 취소했다.

의료기기 제조사의 서비스키 유상제공이 시장지배적지위 남용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최종 판단한 것이다. 자동차와 핸드폰 등 다양한 분야의 애프터마켓에서 제조회사와 서비스 업체의 사업 방식을 처음 명확히 규정한 판결이어서 업계 파장이 예상된다.

‘무상제공 관행’ 존재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이번 소송은 2018년 1월 공정위가 지멘스와 자회사들이 컴퓨터단층촬영(CT)과 자기공명영상촬영(MRI) 유지·보수 시장에서 중소 경쟁업체를 위법하게 배제했다며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하면서 시작됐다.

공정위의 제재 이후 6년 만에 나온 대법원의 최종 판단은 애프터마켓 시장에서 제조사의 권리 범위를 폭넓게 인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핵심은 의료기기 유지·보수를 위한 서비스키의 유상제공이 ‘정상적인 거래 관행’에 반하는지 여부였다.

공정위는 CT·MRI 유지·보수 서비스를 위한 소프트웨어 접근키가 통상 무상으로 제공된다며 독립유지보수사업자(ISO)와 거래하는 병원에만 154만원의 대가를 받은 것은 차별이라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11월 28일 지멘스 헬시니어스가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등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2020두36892).

대법원은 “원고들이 이 사건 서비스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관행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무상제공 관행이 없었다는 판단의 근거로 계약서 내용을 제시했다.

“표준 장비 매매계약서에는 보증기간이 끝난 후에 서비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점이 명시돼 있다”며 “병원들은 서비스 소프트웨어 사용 허락이 지멘스에 유보돼 있고 유상 라이선스 정책이 있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지멘스가 2012년 1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52건의 무상 서비스키를 발급한 사실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했다.

재판부는 “이들 사례는 K병원과 L병원과 같은 M병원이 자체적인 인력으로 유지·보수를 하고자 하는 경우이거나 개별 병원이 자체 인력으로 정도관리 항목 측정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급된 경우에 불과하다”며 “이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근거로 일반적으로 서비스키를 무상으로 제공한 관행이 있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저작권자의 정당한 권리 범위 인정

대법원은 특히 저작권자의 권리 보호 측면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 사용에 대해 그 대가를 지급받을 권리는 저작권자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라며 “서비스키 발급 대가를 수취한 것을 두고 정당한 권리 범위를 넘어섰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더 나아가 “바람직한 경쟁 질서에 부합하는 정상적인 거래 관행을 판단할 때는 저작권자의 정당한 권리 범위를 고려해야 한다”며 지식재산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행위가 경쟁 제한적인지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도 제시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책정한 서비스키 발급 대가로 인해 유지·보수 서비스 시장에서 원고들과 동등하게 효율적으로 사업을 하는 ISO가 경쟁에서 배제될 개연성이 크거나 신규 ISO의 진입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차단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 증명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154만원의 발급 대가가 지나치게 높은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유상제공 그 자체만으로 경쟁 배제나 진입 차단 효과가 있다는 점이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수직통합 시장지배적 사업자 규제 기준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수직 통합된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규제 기준도 상세히 제시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서비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시장과 유지·보수 시장을 수직적으로 통합한 시장지배적 사업자로서 라이선스를 독점 공급하면서 유지·보수 시장에서도 95%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시장지배적지위 남용행위가 되려면 경쟁제한 효과가 실증적으로 입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은 최근 공정위가 강화하고 있는 시장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제재에도 일정한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다. 공정위는 그동안 다수의 시장지배적 사업자들의 지식재산권 행사를 경쟁제한행위로 보고 제재해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지식재산권의 정당한 행사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시장지배적 사업자라도 정당한 지식재산권 행사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며 “앞으로 공정위가 지식재산권 행사에 대해 제재를 할 때는 보다 구체적인 경쟁제한 효과 입증이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판결은 제조사가 독점하고 있는 핵심 부품이나 소프트웨어를 다른 서비스 업체에 제공해야 하는지, 제공한다면 어떤 조건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의미가 있다.

한 공정거래 전문 변호사는 “자동차 정비나 스마트폰 수리 등 다양한 애프터마켓에서 제조사와 독립 서비스업체 간 분쟁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번 판결이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돋보기]
“경영 자유냐 소비자 보호냐”…쿠팡 검색 조작 논란의 쟁점

대법원이 공정거래위원회와 지멘스의 과징금 소송에서 ‘지식재산권의 정당한 행사’를 인정한 가운데 이번에는 쿠팡의 ‘기업 경영의 자유’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주목받고 있다.

쿠팡은 자체 브랜드(PB) 상품 판매를 늘리기 위해 검색 순위 알고리즘을 조작했다며 공정위가 부과한 1628억원의 과징금을 두고 양측이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공정위는 쿠팡이 자사 PB 상품에만 순위 점수를 가중 부여하거나 순위를 인위적으로 조정했고, 임직원을 동원해 긍정적 구매 후기를 달았다고 보고 제재를 가했다.

서울고법 행정7부(구회근·배상원·최다은 부장판사)는 11월 21일 쿠팡이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 명령 취소 소송 첫 변론을 진행했다.

쿠팡 측은 “필요에 따라 상품을 추천하는 것은 유통업의 본질”이라며 “온라인 유통업자의 검색 추천은 쇼핑몰 내에서 상품 판매를 위한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항변했다. 또 “단순 검색 서비스 제공자와 달리 검색 중립성 의무가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정위는 “서점에서 책을 진열하는 것은 해당 서점의 자유이지만 ‘판매량에 따라 진열한다’고 말하면서 수익성이 높은 책을 진열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며 쿠팡의 행위가 ‘위계(거짓 계책)’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이번 사건은 온라인 유통업체의 상품 추천 범위와 한계를 가르는 중요한 선례가 될 전망이다. 특히 최근 PB 상품 비중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플랫폼 사업자의 자율성과 공정성의 균형점을 어디에 둘지 주목된다.

지멘스 판결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영업상 자유와 공정거래법상 규제의 접점이 쟁점이 된 사안이다. 다만 지멘스 사건이 정당한 지식재산권 행사로 인정됐지만 쿠팡 사건은 소비자 오인 가능성이 있는 행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