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란티어의 실적과 주가가 모두 상승한 지난 1분기. CEO 앨릭스 카프가 주주서한에 남긴 문장은 단순한 경영 보고가 아니었다. 카프는 회사를 ‘이단자들의 공동체’로 규정하며 자신들을 외면했던 실리콘밸리가 이제 뒤늦게 자신들의 길을 따라오고 있다고 선언했다. 주주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는 도발적이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과 회사를 믿어준 이들에겐 보상과 자부심을, 믿지 않았던 이들에겐 조롱과 경고를 동시에 담은 글이었다. 이어진 2분기 주주서한에서 팔란티어의 성장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시장에는 다시 이렇게 일갈했다. “이는 훨씬 더 크고, 더 중요한 무언가의 시작일 뿐이다. (회의론자들은) 이미 이빨이 빠지고 일종의 복종으로 굴복했다.”
숫자보다 강한 CEO의 글
CEO의 글은 때로는 숫자를 넘어선다. 시장을 움직이고, 주주의 마음을 울리며, 기업의 정체성을 새로 쓰는 도구가 된다.
워런 버핏은 매년 발간하는 벅셔해서웨이 주주서한에서 유머와 자기반성까지 담아낸다. 투자 실패 사례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장기적 투자 철학을 설명하는 글은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교과서처럼 읽힌다. 오크트리캐피털의 하워드 막스는 ‘메모(Memo)’를 통해 투자 사이클과 리스크 관리에 관한 통찰을 풀어낸다. 그의 글은 투자심리학 교본으로 불리며 워런 버핏조차 “막스의 메모는 놓치지 않고 읽는다”고 말한 바 있다. JP모간의 제이미 다이먼은 매년 60쪽에 달하는 방대한 주주서한에서 금융 시스템 안정, 규제, 글로벌 경제 전망까지 다룬다. 단순히 은행 주주를 넘어 정책 결정자와 월가 전체가 주목하는 문서다.
팔란티어의 CEO 카프는 이들과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철학가인 그의 글은 재무 성과보다 철학과 정치적 맥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민주주의 수호”, “서구 가치를 지키는 도구” 같은 문장은 실리콘밸리 기업 서한에서는 보기 힘든 수사다. 투자자들에게 팔란티어를 ‘기업’이 아니라 ‘사명’을 가진 존재로 각인시키는 그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이들의 주주서한은 큰 인기다. 해마다 버핏의 주주서한을 담은 책이 쏟아지고 베스트셀러로 읽힌다. 공격적이지만 유려한 카프의 글에 반해 팔란티어를 좇는 추종자들도 많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는 주주서한으로 유명한 CEO나 기업이 없다. 국내 연례보고서는 법적 의무사항에 불과하고 주주에게 철학과 이야기를 전하는 장치는 드물다. 재무제표 요약과 배당 공시, IR팀이 주도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넘쳐나지만 CEO가 직접 투자자에게 편지를 쓰는 문화는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왜 한국 기업에는 이런 ‘편지’가 없을까.
한국에도 CEO의 주주서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네이버는 2021년 당시 한성숙 대표를 시작으로 현재의 최수연 대표가 취임 직후부터 주주서한을 두 차례 내며 지배구조 투명성과 AI 경쟁력 비전을 강조했다. 카카오의 정신아 대표 역시 2024년 취임 후 첫 주주서한에서 책임경영 의지를 드러냈다. 여기엔 실적 성장,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 주주가치 제고 의지가 담겨 있었고 재직하는 동안 매년 두 차례에 걸쳐 각 1억원 규모의 카카오 주식을 장내 매입하고 팔지 않겠다는 주주와의 약속이 있었다. 상장 1년을 맞은 쏘카는 ‘주주님께 드리는 글’을 발표하며 부진한 주가와 시장의 우려에 직접 응답했다. 두산 계열사들도 사업 전략을 설명하는 주주서한을 낸 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례는 위기 대응이나 특정 이벤트를 설명하는 데 국한됐다. 예컨대 고려아연은 2024년 영풍과의 경영권 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주서한을 활용했다. 최윤범 회장은 “누가 진정으로 고려아연을 지속 가능하고 투명하며 주주 중심의 미래로 이끌 최적의 위치에 있는지”를 물으며 “존경하는 주주 여러분께서 현명하고 사실에 기반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는 주주서한이 경영진의 입장을 설득하고 주총 표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쓰인 대표적 사례다.
일부 IT 기업들이 주주서한으로 소통의 의지를 보였지만 해외처럼 매년 정기적으로 철학과 비전을 공유하는 문화로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두 명의 CEO가 3차례의 주주서한을 낸 네이버 역시 2023년 이후 무소식이다.
대개의 주주서한은 CEO의 고유 언어라기보다는 IR팀이 작성한 보도자료의 확장판에 가깝다. 2024년 8월 두산에너빌리티·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등 3개사는 대표이사 명의로 일제히 주주서한을 발송했다. 서한에는 사업 재편 전략, 시장 기회, 향후 투자 계획 등이 담겼다. 주주와의 소통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경영자의 철학이나 장기적 비전을 드러낸 글이라기보다 주주와 시장에 당장의 전략을 설명하고 소통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메시지에 가까웠다.
주주서한이 뿌리내리지 못한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자산운용보고서였다. 펀드 운용사들이 분기마다 내놓는 운용보고서는 투자자에게 정기적으로 도착하는 사실상 유일한 ‘편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개 숫자와 데이터에 맞춰져 있다. 수익률과 자산배분, 매매 내역, 위험 지표가 정리돼 있을 뿐 CEO의 철학이나 기업의 장기 전략을 찾긴 어렵다.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은 경영자의 메시지보다는 표와 그래프를 통해 기업을 읽었다.
투자 신뢰를 쌓는 언어
한국에서 주주서한이 자리 잡지 못한 배경은 복합적이다. 무엇보다 기업지배구조의 특성이 크다. 많은 기업이 여전히 주주를 ‘경영 파트너’라기보다 ‘가문의 소유물’로 인식한다. 오너 중심의 경영이 강하게 뿌리내린 탓에 CEO가 직접 주주에게 철학을 밝히는 문화가 성장하기 어려웠다.
관행의 문제도 있다. 공시와 보고는 법적 의무지만 편지는 선택이다. 단기 성과를 중시하는 시장 분위기도 겹쳤다. 한국 자본시장은 분기 실적과 배당에 과도하게 민감하다. 장기적 비전과 철학을 담아내는 서한보다는 당장의 숫자로 평가받는 것이 우선순위다.
버핏이나 베이조스처럼 모두가 존경할 만한 권위를 갖춘 경영자가 드물다는 점도 주주서한이 자리 잡지 못한 이유로 꼽힌다. 버핏은 투자자뿐 아니라 시장 전체가 귀 기울이는 ‘사상가’로, 베이조스는 기업 문화를 규정한 창업자로 평가받는다. 반면 국내에선 경영자의 메시지가 시장 담론으로까지 확장되는 경우가 드물다. 주주서한이 문화로 발전하기보다 일회성 메시지에 머무는 이유다.
이런 구조 속에서 한국 기업의 주가부양이나 주주환원 등 밸류업 정책은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확대 같은 숫자 중심의 주주환원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앞으로 어떤 길을 가려는지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주주와의 소통을 통한 신뢰를 쌓을 언어가 부재한 것이다.
거버넌스 전문가들은 주주를 파트너로 인정하는 메시지야말로 밸류업의 마지막 빈칸이라고 강조한다. 워런 버핏의 주주서한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상장회사는 불특정 다수가 주식을 사지만 주주들은 회사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며 “그렇기 때문에 상장사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활동을 주주들에게 소명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또 “거버넌스에 대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시기, 핵심은 상장사가 모든 활동에서 주주를 생각하는 것”이라며 “버핏처럼 하기는 어렵더라도 주주서한은 충분히 배워야 할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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