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1940년대 말 서울의 작은 공방. 자전거 안장에 끼우는 쇳조각을 두드리는 소리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손으로 깎아낸 그 부품들은 삼륜차를 거쳐 승용차, 그리고 오늘의 전기차와 목적기반모빌리티(PBV)로 이어지는 기아 80년 서사의 첫 장이 됐다.

우여곡절을 겪은 기아의 본격적인 성장기는 정의선 체제에서 열렸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2005년 정의선 당시 부사장(현 회장)을 기아 사장으로 앉혔고 그의 지휘 아래 기아는 디자인 혁신에 시동을 걸었다. ‘아재들의 싼 차’ 이미지를 벗고 젊고 세련된 브랜드로 재탄생한 것이다. 보호무역 강화와 미국 관세 변수, 중국발 공습 속에서도 시장의 재평가가 이어지며 최근 주가는 다시 고점(12만원대)을 회복했다. 작은 공방의 쇳소리는 이제 글로벌 모빌리티 기업의 엔진음으로 바뀌었다.
◆쇳조각에서 스포티지까지
기아의 역사는 1944년 김철호 창업자가 서울에 세운 ‘경성정공’에서 출발한다. 자전거 부품 제조업에서 시작한 이 회사는 1952년 ‘아시아에서 일어선다’는 뜻을 담아 ‘기아산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국산 1호 자전거 ‘3000리호’를 생산하며 제조업 기반을 다졌다. 1962년에는 최초의 국산 오토바이와 삼륜차 K-360을 선보였고 1973년 국내 첫 종합 자동차 공장인 소하리공장을 완공했다. 이듬해 등장한 ‘브리사’는 기아의 승용차 생산 시대를 연 모델이다.

기아는 이후 ‘프라이드’, ‘세피아’, ‘스포티지’ 등 히트 모델을 잇달아 내놓으며 제품 라인업을 확장했다. 일본산 엔진을 국산 엔진으로 대체하며 국산화율을 89.5%까지 끌어올리는 등 한국 자동차 기술 발전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기아의 여정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자전거 사업 부진으로 첫 부도를 맞아 은행관리 체제에 들어갔고 1980년대 정부의 자동차산업 통폐합 조치로 승용차 사업을 한동안 중단해야 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는 ‘부도 유예’ 대상에 포함되며 또다시 존폐 위기에 몰렸다. 결국 1998년 12월 현대차그룹 편입을 결정했다. 기아의 디젤엔진 기술력을 현대그룹은 높이 샀다.

이후 기아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인수 후 불과 1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고 22개월 만에 법정관리 족쇄를 벗어났다. 회생의 중심에는 정몽구 명예회장(당시 회장)이 있었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제품 라인업 정비 같은 조직적 처방에 더해 그는 ‘품질 경영’을 전면에 내세웠다. 매달 한 번씩 기아 공장을 직접 찾아 자동차 제조 공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챙겼다. 1999년 카니발 첫 출시를 앞두고 수시간 동안 차량을 세세히 살피고 직접 시승까지 하며 품질을 점검한 일화는 지금도 기아 내부에서 회자된다.

정의선 회장은 이 같은 기아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지난 12월 5일 열린 기아 8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는 “기아는 한국 산업사에 매우 특별한 회사”라며 “김철호 창업자는 자전거에서 출발해 오토바이, 삼륜차, 최초의 종합 자동차 공장, 나아가 엔진 국산화까지 이뤄내며 대한민국 모빌리티의 뿌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몽구 명예회장은 언제나 품질과 글로벌 현장을 강조했다”며 “과거 슬로바키아 질리나 공장을 방문했을 때 검수가 채 끝나지 않은 신차 씨드에 저를 태우고 직접 공장을 달리신 적이 있다. 그 순간은 명예회장님의 품질 중시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회상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로 부도 위기에 빠진 기아자동차를 1999년 인수해 현대차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편입시키며 현대·기아차를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사진은 정몽구 명예회장이 2001년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을 방문해 카니발 수출차종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로 부도 위기에 빠진 기아자동차를 1999년 인수해 현대차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편입시키며 현대·기아차를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사진은 정몽구 명예회장이 2001년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을 방문해 카니발 수출차종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거장 손길 거치면서 다시 태어난 브랜드
기아는 2000년대 후반 들어 전혀 다른 회사가 됐다. 변화의 동력은 당시 35세의 젊은 대표였던 정의선 회장이 내세운 ‘디자인 중심 경영’이었다. 그는 후발 주자인 한국 자동차 브랜드가 독일·일본·미국 업체들이 쌓아온 독보적 엔진 기술을 단숨에 따라잡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디자인은 단기간에 브랜드 인식을 뒤바꿀 수 있는 영역이라고 봤다. 기아의 새 얼굴을 만들 글로벌 거장의 영입이 필수적이었다.

정의선 회장은 독일 출신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서울로 데려왔다. 슈라이어는 BMW의 크리스 뱅글, 아우디의 월터 드실바와 함께 유럽의 빅3 디자이너에 꼽힌다.

기아는 최고경영자(CEO)를 능가하는 수준의 연봉과 디자인 수장 자리를 제시했고 정의선 회장은 슈라이어 설득을 위해 남양연구소를 직접 소개하며 한국 디자이너들의 열정과 역량을 보여줬다. 첫 만남에서는 그의 가족까지 초대해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아우디 TT를 만든 인물로 유명한 슈라이어는 기아에 오자마자 스케치북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호랑이코 그릴’. 그가 그린 단순한 선 하나는 훗날 기아의 브랜드 정체성을 결정지은 분기점이 됐다.

2007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공개된 콘셉트카 ‘키(Kee)’는 그 선이 실차로 구현된 첫 장면이었다. 이후 양산차에서는 2008년 로체 이노베이션을 시작으로 K7·K5·쏘울·모닝 등 거의 전 라인업으로 확산했고 ‘타이거 노즈’는 기아의 얼굴로 굳어졌다. 정체성이 없던 브랜드가 단숨에 사람들에게 ‘한 번 보면 기아임을 알 수 있는 회사’로 변모한 시점이었다.

“기아차는 마치 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래서 짧은 기간 내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슈라이어는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2016년 1월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총괄 사장이 당시 나온 신차 ‘올 뉴 K7’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현대차그룹
2016년 1월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총괄 사장이 당시 나온 신차 ‘올 뉴 K7’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현대차그룹
◆질주, 그리고 새로운 질주
기아는 생산 무대를 세계로 넓혔다. 슬로바키아 질리나와 미국 조지아에 이어 중국·인도·멕시코까지 주요 시장에 생산거점을 구축하며 ‘현지에서 만들고 현지에서 파는’ 글로벌 체제를 확립했다.

1999년 8조원에 가까웠던 매출은 지난해 처음으로 100조원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488억원에서 12조6617억원으로 250배 넘게 뛰었다. 지난해에만 309만 대 가까운 차량이 세계 시장에서 판매돼 창사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글로벌 누적 판매량은 6368만 대에 달한다. 현대차그룹이 인수한 이후인 2000년(819만 대)과 비교해 8배 급증했다.

2020년을 기점으로 기아는 더 이상 ‘차를 만드는 회사’에 머물지 않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단순 제조업의 외피를 벗고 전동화·모빌리티 중심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2021년 사명을 ‘기아자동차’에서 ‘기아’로 바꾼 것은 상징적 조치였다. 이름을 덜어내며 사업의 경계를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셈이다.

사명 변경 이후 기아는 친환경 중심의 사업구조 재편에 속도를 올렸다. 자율주행과 모빌리티 플랫폼, 인공지능(AI) 기반 차량 데이터 서비스 등 자동차 이후의 시장을 겨냥한 신사업을 잇달아 포트폴리오에 추가했다. EV3·EV5·EV9로 이어지는 전동화 라인업도 확대했다.

그러나 전기차 시장에선 중국 비야디(BYD)의 초저가 공세가 기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배터리부터 반도체까지 전 과정을 내재화한 BYD의 원가 경쟁력은 글로벌 완성차 업계 전체에 부담이지만 기아에도 직접적인 위협이다.

기아가 마련한 돌파구는 PBV다. PBV는 다목적 차량인 봉고의 유산을 잇는 만큼 기아가 상대적으로 강점이 있는 영역이다. 내부 공간을 상업·물류·서비스용으로 사업자가 원하는 형태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바퀴 달린 비즈니스 플랫폼’이다. 이를 위해 기아는 경기도 화성에 전용 생산기지 ‘이보 플랜트(EVO Plant)’를 짓고 있다. 호출형 택시, 배달 밴 시장을 겨냥한 첫 모델 PV5를 시작으로 PBV 신차 출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래차 청사진도 내놨다. 기아는 최근 미래 콘셉트카 ‘비전 메타투리스모’를 공개하며 이동의 의미를 ‘주행’에서 ‘머무름·소통·휴식’으로 확장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스티어링휠을 숨기고 실내 공간을 재해석한 이 실험은 기아가 바라보는 미래 모빌리티의 단면을 드러낸 상징적인 시도다.
비전 메타투리스모. 사진=기아
비전 메타투리스모. 사진=기아
◆현대차그룹이 넘어서야 할 과제
현대차그룹은 내연기관·하이브리드·수소·전기차까지 전 구동체계를 확보한 몇 안 되는 글로벌 완성차 기업이다. 전기차를 넘어 자율주행·로봇·AI로 확장하는 기업은 테슬라와 현대차그룹, 그리고 중국의 샤오미·BYD 등 손에 꼽히는 수준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강력한 수직계열화 구조도 강점이다. 현대차그룹은 철강·부품·물류·소프트웨어·AS까지 제조의 전 과정을 그룹 내에서 통합해왔다. 경쟁사들이 코로나19 기간 반도체·부품 수급난에 흔들릴 때 현대차그룹은 비교적 안정적인 생산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풀 스택 구조’가 새로운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전환의 속도를 더디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조직과 공정이 지나치게 견고해지면 기존 레거시(전통)가 혁신적 전환의 관성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대차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글로벌 경쟁사들과 비교하면 아직 격차가 크다는 지적도 있다. 현대자동차 2024년도 사업보고서와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의 지난해 R&D 투자 규모는 33억3980만 달러로 폭스바겐(230억 달러)이나 GM(92억 달러), 테슬라(45억4000만 달러)에 비해 상당히 낮다. 매출 대비 R&D 비중 역시 2.8%에 그쳐 폭스바겐(6.05%), GM(4.9%), 테슬라(4.64%)와 큰 차이를 보인다. R&D 투자가 미래차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현대차가 고민할 과제로 꼽힌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