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늘었다는데 취업은 바늘구멍
○사무직, 고임금 고용 감소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8월 비농업 부문 고용이 전달 대비 16만2000명 늘었다. 시장 추정치 평균(컨센서스)인 5만5000명을 3배 가까이 웃돌았다. 실업률은 4.1%로 전월과 같은 수준을 나타냈다.
수치와 달리 고용시장의 질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에서 7월 ‘신규 채용’은 27만8000명 감소한 505만4000명, 해고는 11만9000명 줄어든 166만6000명을 기록했다. 채용과 해고가 동시에 줄어들면서 취업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8월 ‘27주 이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장기 실업자는 190만 명으로 전체 실업자의 27%를 차지했다. 2년 전 이 비중은 21%였다. 노동시장 참가율은 61.6%로 지난 1월보다 0.5%포인트 하락했다. 컴퓨터시스템 설계, 연구개발(R&D), 금융 등 사무직·고임금 일자리도 줄고 있는 추세가 확인된다. 평균(시간당 32.5달러)보다 임금이 높아 ‘고임금’ 업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정보·금융·전문서비스의 8월 고용은 2만4000명 줄었다.
고용시장의 질 감소엔 복합적인 요인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은 관세, 유가, 고금리, 지정학적 위험 등의 여파로 경영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판단, 채용을 미룬다. 그렇다고 경기침체가 닥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규모 감원에 나서지 않고 있다. 기존 인력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노동력 비축(worker hoarding)’ 전략이다.
근로자 역시 외부에 더 좋은 기회가 많지 않다고 판단해 현재 직장에 머물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분위기에 대해 “해고가 적어 고용시장이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이직 감소로 빈자리가 생기지 않고 신규 채용도 함께 얼어붙는 ‘저채용·저해고’ 현상이 짙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시카고연방준비은행은 2023년부터 지난 2월까지 고용시장 상황 악화의 약 80%는 해고 증가가 아니라 실업자의 취업 성공률 하락에서 비롯됐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사람들이 대량으로 직장을 잃어 실업률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한번 실업자가 된 사람이 좀처럼 새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AI와 경쟁하는 美 대졸자
AI가 신입 사무직원이 맡던 초급 업무부터 대체하면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 영향도 큰 것으로 분석된다. WSJ는 “신입 일자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AI 시대에 기업이 신입에게 요구하는 역량과 대학을 갓 졸업한 구직자가 갖춘 역량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AI가 직무 간 경계를 허물고 있는 점도 대졸자 취업 문턱을 높이는 요인이다. AI로 본인 업무를 넘어 다른 전문 인력이 하던 일까지 수행할 수 있게 되자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 범위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 오픈AI가 업무와 관련된 대화 80만 건을 분석한 결과 약 17%가 이용자의 본업이 아니라 다른 직군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본인 직무와 관련된 대화는 22%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이메일 작성, 회의 일정 조율 등 직군과 관계없는 일반 업무였다.
이에 따라 미국 노동시장의 장점으로 꼽혔던 역동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와 달리 한 회사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야망 부족이 아니라 불확실한 고용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얘기다.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기술 전략을 짜는 킴 포하스(42)는 WSJ에 “꿈의 직장으로 여겼을 채용 공고를 보고도 지원하지 않았다”며 “회사를 옮기는 대신 자신을 해고하기 어려운 인재로 만드는 전략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군 입대 통해 돌파구 찾는 청년층
부담은 청년과 신규 진입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클리블랜드연방준비은행은 8월 4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인구 고령화와 고학력화가 역동성 감소 원인의 약 절반을 설명할 수 있다”며 “고령 근로자와 고학력 전문직일수록 상대적으로 직장을 자주 옮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또 “고령화가 계속되는 만큼 과거의 역동적인 노동시장으로 완전히 돌아가기는 어렵다”고 전망했다.
최근 실업률이 5.7%(22~27세 졸업자)에 이를 정도로 구직난이 심화하고 학자금 빚으로 부담이 커지자 청년층은 군 입대를 통해 돌파구 마련에 나섰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25년 미군 모병 실적은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최근 입대율도 높아지고 있다. 마이클 코포드 테네시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가 안 좋고 노동시장이 위축됐을 때 군 입대는 훌륭한 선택지가 된다”고 설명했다. 미군이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군인의 연방 학자금 대출 중 최대 6만5000달러까지 상환해주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것도 입대율 증가의 원인으로 꼽힌다.
○임금 상승률 떨어지면 소비 부정적
노동시장의 역동성 저하가 당장 경제 위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진단이다. 다만 기업의 채용 여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향후 해고가 증가하면 실업률이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역동성 저하는 임금 상승에도 영향을 미친다. 애틀랜타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이직이 줄어들면 임금 경쟁도 약해진다. 기업이 인재를 지키거나 영입하기 위해 높은 임금을 제시할 유인이 약해지고 근로자의 구매력이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임금 상승률(전년 동기 대비)은 3.09%로 5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한 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시카고대 베커프리드먼 경제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직장을 옮기지 않은 직원 중 5분의 2 이상이 실질 임금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인구직 사이트 ‘인디드’의 코리 스탈 이코노미스트는 “사무직 종사자의 상황이 어렵다”며 “식료품과 휘발유 가격이 오르면서 미국 노동자의 불만이 커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황정수 한국경제 특파원
hjs@hankyung.com
©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