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이동찬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 한여름에 제일 생각나는 것. 아마 뼛속까지 시린 에어컨 바람과 얼음이 동동 뜬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닐까. 이열치열이라 했지만 8월의 뙤약볕은 뜨끈한 사골 국물보단 시원한 냉면 육수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무더위에 뜨거운 불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직업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흘린 숭고한 땀의 의미를 들어봤다.
THE GLASS ARTIST
안나리사 유리공방 안나리사 알라스탈로 작가
“불에서 태어난 유리, 극복의 과정 매력적”
유리공예는 뜨거운 불에서 태어나 투명한 빛을 담는 예술이다. 그 영롱한 자태가 완성될 때까지 유리공예가는 이글거리는 용해로 앞에서 수많은 작업들을 반복한다. 한국인 남편과 함께 ‘안나리사 유리공방’을 운영하는 핀란드 출신의 안나리사 알라스탈로(Annaliisa Alastalo) 작가는 이런 과정들을 거쳐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낼 때마다 푸른 그녀의 눈동자는 유리보다 더 반짝였다.
한여름에도 불 앞에서 일하시죠.
“뜨겁긴 하지만 힘든 걸 이겨내는 즐거움도 있어요. 유리공예가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몸은 고되지만 오히려 머리는 식히는 셈이죠.”
용해로가 굉장히 뜨거워 보여요.
“유리가 액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용해로는 섭씨 1130도에 맞춰져 있어요. 보통 용해로 앞에서 작업할 때 40도가 넘는데 덮개를 열면 기온은 더 올라가죠. 에어컨 바람이 나오긴 하지만 일에 집중하면 더위를 잘 느끼지 못하기도 해요. 그래도 8월은 1년 중 가장 덥고, 무엇보다 습도도 높아서 오래 작업하진 못해요. 반면, 겨울에는 딱 좋아요. 따뜻함을 느끼고 싶어서 일을 하기도 해요. (웃음)”
유리공예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원래 도자기에 관심이 있어서 대학 때 도자기를 전공했어요. 도예와 유리공예를 같이 배우는 전공이었죠. 물론 당시에 유리공예도 매력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한국에서 유리공예가로서 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핀란드 재학 시절 우연히 유리예술가이자 지금의 남편인 홍성환 작가를 만나게 됐고, 결혼해서 2006년 한국으로 왔어요. 잠시 놀러 왔다가 다시 학업을 하러 핀란드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한국이 너무 좋아서 남편과 함께 이곳에 유리공방을 차리게 됐어요. 사실 현실적으로 이런 작업공간을 갖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남편과 함께여서 가능했던 일이죠.”
어쩐지 작품들이 도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각국의 그릇이나 옹기들을 좋아해요. 큰 틀에서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나라마다 조금씩 디테일이 달라요. 한국의 전통 도자기뿐만 아니라 각국의 도자기들에서 영감을 받아 유리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화병을 만들 때는 정원에 핀 꽃을 보고 작품을 구상하기도 해요. 꽃의 모양이나 색깔 등을 보고 어울릴 화병들을 즉흥적으로 제작할 때도 있어요.”
도예와 다른 유리공예만의 매력을 느꼈을 것 같아요.
“도자기는 직접 빚어서 제작할 수 있어요. 하지만 유리는 직접적으로 손을 대서 작업할 수 없죠. 그리고 완성된 작품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요. 유리공예는 스스로 이겨내고 인내하면서 도전하고 극복해야 하는 일렬의 과정들이 필요해요. 이 점이 저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인생은 짧은데 쉽고 지루한 일만 하는 건 재미없잖아요.”
유리공예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먼저 액체 상태로 용해로 안에 녹아 있는 유리를 긴 파이프 끝 부분에 유리를 말아 꺼낸 후 왼손으로는 파이프를 회전을 하고 오른손으로는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모양을 잡아 가죠. 색을 넣고자 하면 색 원료를 묻힌 다음 다시 가열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요.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는데, 입으로 파이프를 부는 블로잉 작업으로 볼륨을 키우기도 하고, 작은 집게로 구멍을 넓혀 가면서 화병의 입구를 만들기도 하고, 토치로 모양을 세밀하게 다듬는 등 복합적인 작업들이 수반돼요. 모양이 다 갖춰지면 파이프에서 작품을 조심스레 분리해 낸 다음, 서냉로에서 최소 12시간 이상 서서히 식혀요. 그 후 연마와 광택 작업을 하면 작품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죠.”
손님들이 이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일요일마다 손님들이 체험하실 수 있도록 팝업 카페를 비롯해 오픈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예약해서 방문하신 손님들은 블로잉 작업과 컵이나 화병의 입구 부분을 직접 벌리는 작업들을 체험하게 돼요. 나머지 작업들은 저희가 마무리하고요. 직접 만든 작품들은 하룻밤 식혔다가 바닥 연마 등 후처리 과정 후 택배로 보내드려요.”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나요.
“물론 제 작품이 잘 나왔을 때 가장 뿌듯하죠. 그 기분은 처음 시작했을 때와 항상 똑같은 거 같아요. 만들고 있는 과정에서 잘 풀릴 때도 기분이 좋고, 다음 날 마무리된 작품을 마주하면 그때도 기분이 좋아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작품 사진들을 남기기도 해요.”
반면 속상할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작품이 생각대로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있어요. 유리공예는 엄청 예민하고 까다로운 작업이거든요. 전반적인 성형 과정이 긴장의 연속이에요. 온도와 무게, 가열 시간 등의 조화가 어긋날 경우 성형 중인 유리가 깨져 버리거나 대롱에 매달린 유리가 떨어져 버릴 수 있으니까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하는 작업이죠. 크기가 큰 작품들은 1시간가량 작업할 때도 있는데, 마지막 순간에 떨어져서 깨지는 경우도 없지 않아요. 속상하지만 감내해야죠.”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지난해에 핀란드에 있을 때 남동생이 하늘나라로 갔어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아프고 슬픈 마음을 치유하는 의미로 만든 작품이 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저희 공방에는 없고, 전시회 때 컬렉터가 냉큼 구매하셨어요. 최근에 만족스러웠던 작품은 고려시대 청자를 보고 만든 작품이에요. 대학에서 도자기를 공부했을 때 한국의 전통 청자에 매력을 느꼈던 적이 있어요. 청자의 아름다운 선과 유리의 투명함, 그리고 빛을 담을 수 있다는 속성이 합쳐져서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유리로 계속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작업을 할수록 보는 눈도 높아지고 더 예쁜 작품들이 나오는 걸 느끼거든요.”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3호(2020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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