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이강욱

Detail Image, The Gesture-17009, 캔버스에 혼합 재료, 162×262cm, 2017년
Detail Image, The Gesture-17009, 캔버스에 혼합 재료, 162×262cm, 2017년

[한경 머니 기고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이강욱 그림의 시작은 생명의 빛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 미세한 떨림, 그리고 털끝을 간질일 정도의 진동이 화면에 퍼져 있다. 마치 부드러운 빛의 물결로 샤워하듯 기분 좋은 촉감이 일렁인다. 보는 시각이나 조도(照度)에 따라 색감과 형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강욱의 그림에선 빛의 흔들림이 결처럼 쌓여 편평한 반투명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 층위(層位) 사이에서 작은 움직임이 감지된다. 생명의 시작이다. 이제 막 분열이 시작된 미세한 세포들은 어느새 생명의 집을 짓고 있다. 이강욱만의 언어로 완성된 가상공간이다.


그는 화단에 처음 ‘이강욱’이란 이름을 알릴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2002년 불과 26세의 나이로 중앙미술대전 ‘대상’과 동아미술대전 ‘동아미술상’ 등을 수상하며 불꽃처럼 등장했다. 굴지의 전국 단위 미술공모전 최연소 대상 수상 기록도 경신됐다. 그로부터 20여 년 가깝게 꾸준한 주목을 이어오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외교통상부, 한국전력, 삼성의료원, 현대자동차 등 대표적인 미술관과 공공기관은 물론 여러 대기업까지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올해 초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살리하라아트센터(Salihara Art Center)에서 대규모 초청 개인전을 가지며, 한류스타급 활약을 펼쳤다.


“대단한 인기와 유명세를 얻기보다는 본인의 생각대로 조금씩 성장해 가는 ‘건강한 작가’이고 싶어요. 회화 장르에 특별한 매력을 느껴집니다.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하는 작가 ‘평면회화 작가의 길’을 지향합니다. 다른 매체들 못지않게 회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는지 확인해 가고자 해요. 회화 자체의 순수함과 진실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지개의 끝을 잡을 순 없어도, 끊임없이 그 끝을 찾아 한평생 길고 조용한 여정을 떠날 수 있는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이강욱 작가의 말처럼 그의 관심사는 평면회화 본연의 매력을 되찾는 데 집중돼 있다. 특히 ‘미시공간에 대한 풍경’이 그 중심이다. 데뷔 초기부터 작품 제목에 자주 사용해 온 ‘인비저블 스페이스(Invisible Space)’란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볼 수 없는 공간’이다. 최대한 가까이 들여다봐도 정상적인 시각으론 분별하기 힘든 미시공간에 대한 해석이 그의 숙원 과제다. 이 과정에서 이 작가는 ‘중첩(layering)’ 기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Invisible Space-Image 19009, 캔버스에 혼합 재료, 130×80cm, 2019년
Invisible Space-Image 19009, 캔버스에 혼합 재료, 130×80cm, 2019년
그의 작업 방식은 식물의 인공 번식법 가운데 하나인 휘묻이 취목(取木)과도 비유할 만하겠다. 살아 있는 가지의 한 끝을 휘어서 땅속에 묻은 후 뿌리가 내리면 다시 가지를 잘라 새로운 개체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처럼 세포가 분열하듯 이 작가의 작품에서도 끊임없이 수많은 생명의 씨앗이 발아되고 있다. 단순히 물감의 층위로 두께를 만들어 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제각각의 층위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공간의 밭을 만들어 ‘자가 분열할 생명의 씨앗’을 파종해 놓았다. 그래서 씨눈이 움튼 그의 회화 화면은 생물학적·물리적·유기적 세계관이 동시에 함축된 생태계로 구성됐다고도 하겠다.


작품 제목으로 쓰인 인비저블에는 ‘자기 일에 조용히 매진하면서 깊은 성취감을 얻는 사람들’이란 뜻도 갖고 있다. 이처럼 이 작가의 ‘Invisible Space’ 시리즈는 비록 세포나 미립자를 포함한 아주 작은 미시 세계를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시작점은 이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품은 완성체나 마찬가지다. 감각의 환영이 실재로 옮겨 오는 과정을 그의 작품을 통해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은하수 풍경을 닮은 그의 추상회화는 처음부터 관람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선사하는 친절함을 지녔다.


작품의 제작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지만, 수행자의 고행을 감내해야만 한다. 시리즈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캔버스의 표면을 종이만큼 부드럽게 만드는 과정은 같다. 잘 정돈된 화면에 최초의 배경 이미지를 전사 혹은 그려 넣고, 그 이미지가 흐릿하게 깔리도록 반투명 막을 형성한다. 그 위에 다시 여러 재료나 기법으로 드로잉을 하거나 물감을 뿌리고, 이미지 자체를 그려 넣길 반복한다. 이어서 다시 아크릴 미디움으로 여러 겹의 층위를 만들고, 마지막 단계에선 표면에 아주 작은 유리구슬을 골고루 펴서 붙이면 된다. 말이야 쉽고 간단하지만, 전 과정이 고른 숨결과 무심한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기다림의 미학을 숙명처럼 여겨야 할 농부를 닮았다.


이 작가 회화의 매력 중에 손맛을 빼놓을 수 없다. 부드럽고 조용한 흔적들 역시 추상회화가 지닌 본연의 매력을 탐닉하는 과정이다. 최근의 작품 제목에 등장한 ‘제스처(Gesture)’라는 용어도 쉽게 넘길 대목은 아니다. 화면 위를 맴도는 무한 반복의 드로잉 흔적, 엷은 색조의 스밈이나 우러남, 일정한 리듬감을 지닌 선묘의 배열들은 그대로 담백한 독백과 같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은 제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기 마련이다. 또한 작품의 다양한 이미지를 발견해 내는 관람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작가로서 큰 기쁨이다.


이 작가에게도 컬렉터의 아주 흥미로운 반응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한 의사는 그림에서 인체 내부 혹은 혈관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고, 한 일본인 컬렉터의 경우 조선백자의 이미지와 정신성이 감돈다고 했다. 이처럼 그림에 대한 감흥은 정답이 따로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고, 그 역시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 같은 밭이라도 어떤 씨앗을 심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작물이 자라난다. 같은 씨앗이라도 어떤 밭에 심는가에 따라 성장 정도가 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농부에게 밭과 씨앗은 똑같이 소중하다. 같은 작품이라도 어느 상황에서 어떤 관객을 만나는가에 따라 운명의 색깔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강욱은 성공한 농부화가인 셈이다.


개인전은 작가로서 객관적으로 평가받기 매우 용이한 채널이다. 지금은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전문인 아라리오갤러리의 전속작가로 있지만, 그동안 이 작가는 20회가 넘게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많은 미술관이나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며 작가적 입지도 안정적으로 다져 왔지만, 미술 시장에서도 나름의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고 있다. 작품의 전시 가격을 참고로 봐도 알 수 있다. 100호(약 162×130cm) 기준으로 2002년 700만 원, 2007년 1200만 원, 2011년 1800만 원으로 높아지다가 국내 활동을 잠시 멈추고 5년 정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2016년 귀국 이후 2500만 원, 2020년 현재 3000만 원 정도로 지난 20년간 약 4.5배 상승했다.


김윤섭 소장은…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20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빛이 결처럼 쌓여 가상공간을 짓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