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44-Electronic Nostalgia, 캔버스에 유채, 184×184cm, 2019년
p1944-Electronic Nostalgia, 캔버스에 유채, 184×184cm, 2019년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김영헌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인간의 감각 중에 청각이 기본이다. 먼저 멀리의 소리를 듣고, 일정 거리에서 형상을 알아보며, 코앞의 냄새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김영헌 작가는 마치 전자기파(電磁氣波)를 보여 주듯 기본적인 감각의 흔적이나 리듬을 화면에 옮겨 낸다.


내면에 잠재된 영감들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신체가 내뿜는 파동(波動)이나 소리를 시각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할까. 모든 물질처럼 신체도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 자체다. 신체 감각의 고통은 세포가 전하는 파동을 인지하는 과정이며,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도 역시 파장(波長)에 불과한 셈이다. 이러한 인체가 지닌 미세한 파동의 원리를 다양한 방면에서 활용한다. 그래서 신체의 세포는 ‘선천적 ESP 파동 단말기’다. ESP(Electronic Stability Program)는 차량자세제어장치다. 차량의 속도나 회전 혹은 미끄러짐을 스스로 감지해서 브레이크와 엔진을 제어해 사고를 미연(未然)에 방지하는 제동 시스템다. 결국 세포의 작용은 인간의 초감각적 지각이나 초능력에 비유할 만하다.


인간은 세포라는 ESP 수신기를 통해 의식의 세계인 마음을 열고 읽어 낸다. 김영헌 작가의 그림 역시 자신만의 ESP로 인지 감각을 시각화시켰다. 신체와 정신의 작용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디지털적인 명상회화다.


“그림의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줄무늬 표현들은 혁필 기법을 사용하지만, 캔버스 표면의 유성 물감은 서로 혼합되고 번지는 유동적인 느낌들을 보여 줍니다. 최근 회화 작업들은 디지털적 요소들과 아날로그적 요소가 공존합니다. 이 줄무늬들은 다듬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보통 한 번의 붓질로 생성됩니다. 여러 번의 묘사로 얻은 매끈함보다 ‘단 하나의 층’으로 붓의 떨림과 움직임 등의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길 원합니다. 또한 회화 속 반복적인 줄무늬 요소는 ‘전자적 느낌의 추상언어’를 발생시킬 중요한 특질을 이룹니다. 이 과정들은 현대 추상회화의 어떤 섬세한 경계 부분을 건드리거나 그 영역을 밀어내는 데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2005-Electronic Nostalgia, 캔버스에 유채, 102×152.4cm, 2020년
p2005-Electronic Nostalgia, 캔버스에 유채, 102×152.4cm, 2020년
김 작가의 그림은 ‘회화적 상상력’이 참으로 풍부하다. 제작 기법은 서양화의 기본 바탕인 캔버스 천에 유화물감이다. 관건은 붓질이다. 일반 붓 대신 동양회화의 전통 기법 재료 중 하나인 혁필(革筆)을 사용했다. 화면을 미끄러지듯 휘젓는 리듬감은 혁필의 지나간 흔적이다. 분명 처음엔 선(線)의 움직임으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파스텔톤의 면(面)이 겹쳐 입체적인 효과를 만들어 낸다. 선과 면이 어우러진 입체 드로잉의 탄생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혁필을 활용한 회화 기법으로 여러 번의 반복된 줄무늬 붓질이 중첩돼 지나간 흔적에는 시공간이 버무려진 파장 혹은 파동이 일렁인다. 김 작가의 그림에선 수직과 수평, 직선과 곡선, 원형과 각형 등 서로 다른 상반된 요소들이 한 몸으로 쉽게 섞인다. 자연적인 파동의 에너지는 기하학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다. 화면에 펼쳐지는 파동의 리듬감은 여러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며 들려주는 감각적인 재즈나 현대음악을 닮았다. 적당한 호흡 주기와 시각화된 음표의 언어들은 그대로 추상미술의 시적 언어로 재탄생시켜 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뚜렷한 형상이나 일상적인 텍스트의 메시지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감상자는 부지불식간에 그림 속에서 ‘잠재된 사인(sign)’을 해독하게 된다.


“작가인 제 입장에서 보자면, 작품은 ‘화면을 읽는 관객이 회화적 상상력을 구동시키도록 창작된 음악 같은 것’입니다. 굳이 담고 싶은 바를 이야기하자면 텍스트적인 메시지라고 하기보다는 ‘감성이나 감정, 시각언어를 읽고 상상을 즐기는 정신적 작용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시각예술이 작동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정신적 작용을 발달시킨 사람은 어떤 동시대 예술이든지 그가 대하는 작품들을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흔히 작가의 삶은 ‘먼 길을 혼자 걷는 외로운 여행’에 비유할 만하다. 처음엔 좋은 전시나 흠모하고 존경했던 선배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내적 영감과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작가적 숙명이다. 아무리 답답하고 힘겨울지라도 잠들었던 자신만의 초감각을 일깨울 때 자족할 수 있는 해답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모호한 생각의 퍼즐들을 꿰맞추기 위해 음악을 듣고 시를 쓰며 여행을 한다. 물론 오로지 혼자서 완주해야만 한다. 결국 동시대의 다양한 감성을 어떻게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화면 위에 시각적으로 펼쳐 내는가에 따라 그림의 깊이는 좌우된다.


그래서 ‘좋은 작가’의 덕목을 꼽으라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실험을 지속할 수 있는 의지와 자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김영헌만 한 작가도 드물다. 지금에야 전형적인 회화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초기엔 전혀 다른 장르의 설치작가로도 큰 주목을 받았었다. 특히 1995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할 만한 작가’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어 2000년 초반엔 삼성 아틀리에 프로그램인 파리 시테데자르 레지던시(Cité Internationale des Arts)나 독일 뒤셀도르프 회허베크 레지던시에도 수년간 입주 작가로서 초청돼 유럽 활동을 시작했다. 2010년 영국에서 귀국한 이후엔 성곡미술관을 시작으로 연이어 미술관급 개인전을 선보였다.


지금은 다시 뉴욕이다. 지난해와 올해엔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분주하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 초까지 파리의 갤러리 리차드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3월엔 뉴욕 아모리쇼와 볼타뉴욕 2020 쇼에 개인전으로 참여한 것이 뉴욕타임스에도 소개됐는가 하면, 김 작가를 연구하는 현지 평론가도 생겨 뉴욕의 유명 미술 전문 사이트에 비평이 실리고 있다. 4월에서 6월 초까진 홍콩 솔루나파인아트(Soluna Fine Art), 가을과 내년엔 뉴욕과 파리의 갤러리 리차드에서 지난해에 이은 2차 개인전이 예정됐다. 실로 눈코 틀 새 없는 활약이다. 현대미술가에게 국경은 의미가 없다. 단지 어느 도시에서 어떤 시대적 감성을 이야기하는가의 문제다.


어린 시절엔 누구나 한 분야의 최고가 되고 싶다는 유사한 꿈과 목표를 세운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그 꿈과 목표의 색깔은 제각각 달라진다.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티스트들이 듣고 가장 기뻐할 코멘트는 무엇일까. 작품들이 단순히 ‘독창적’이란 평가보다는 점차 ‘발전적인 변화가 인상적’이란 말일 것이다. 만약 그 말을 동료 작가들에게 들을 수 있다면 더더욱 만족스러울 것이다. 김 작가 역시 시간이 쌓일수록 작품들이 새로운 단계나 차원으로 진전할 수 있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종착역 없는 여정에 올라 있다. 지금은 뉴욕역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작품 가격은 1차 시장인 갤러리나 아트페어 전시가격 기준 50호(116.8×92cm)는 900만~1000만 원, 100호(162.2×130.3cm)가 1500만~1800만 원 선에 형성돼 있다.


아티스트 김영헌은…

인간 내면을 파동으로 옮긴 명상회화
1963년생.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Fine Art) 석사과정 1년 수학한 이후 런던예술대 첼시칼리지(Fine Art)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그동안 1995년 토탈미술관을 시작으로 서울, 파리, 뒤셀도르프, 뉴욕, 홍콩 등에서 20여 회의 크고 작은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홍콩 크리스티, 뉴욕 갤러리 리차드, 쾰른 초이앤라거갤러리, 노르웨이 베스트포센미술관, 서울 아르코미술관· 성공미술관·호암갤러리·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초대됐다. 1995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2002년 프랑스 파리 이시레몰리노(Issy-les-Moulineaux) 디지털아트센터에서 아티스트 토크, 2003 회허베크 스튜디오스(뒤셀도르프)·2000~2002 파리 시테 삼성아틀리에 프로그램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뉴욕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런던 더 아트 클럽(The Arts Club), 삼성미술관리움, 성곡미술관, 자하미술관, 코오롱그룹, 한국석유 등 다수의 국내외 미술관과 주요 기업들에 소장돼 있다. 현재는 뉴욕과 양평에서 작품 활동 중이다.


김윤섭 소장은…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19 안양국제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인천국제공항 문화예술자문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조각 편집장, 2020 경주국제레지던시아트페스타 전시감독,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