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한창수 고려대 정신건강의학 교수]행복은 몰입에서 온다. ‘덕질’이 자기만족, 행복을 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행복한 덕질을 균형감 있게 유지하기 위해 어떤 몰입의 자세가 필요할까.

#1 40대 가장 민수 씨는 견실한 중소기업의 과장이다. 이른 아침 출근해서 영업팀 직원들의 활동 계획을 확인하고 하루 종일 구매서류와 수금전표를 확인하느라 정신없이 보낸다. 저녁이면 아직 어린 자녀들과 놀아 주고 집안일을 돕기도 하는 좋은 남편이기도 하다. 이런 민수 씨가 틈만 나면 하는 일이 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새로 출시된 카메라의 스펙을 살피고 중고사이트에 올라 있는 물건 중에 쓸 만한 게 있는지 검색하는 일이다. 사진도 좋아하지만, 카메라 들여다보다가 좋은 걸로 바꾸는 일도 즐거워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아내도 아는 일이긴 한데, 요즘 뜨고 있는 아이돌 그룹 행사가 있으면 휴일에 혹은 반차를 내서라도 그곳에 가서 좋아하는 멤버의 사진을 찍는 일이다.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끼리 온라인 동호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저 좋아하는 멤버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쁜 사진을 찍어 주는 게 좋단다. 이런 행동을 맘에 안 들어 하던 아내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고 한다.

중고생 시절 우표 모으기나 연예인 사진 모으던 남자아이들 같아서 영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직장과 가족에 소홀하지는 않으니까. 취미활동에 돈을 쓰기는 하지만 월급도 제때 들어오고.

#2 50대 중반 미진 씨는 요즘 TV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얼마 전엔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아들 또래 친구들을 응원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동호회 활동도 하면서 같은 마음을 가진 동년배 친구들도 여럿 만났다. 아이돌 경연을 하는 날이면 스마트폰 투표를 열심히 해 주고, 음원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구매버튼을 여러 번 눌러 주면서 응원을 했다. 팬들에게 판매한다는 예쁜 물건들은 당장 구매한다.

물론, 그렇다고 집안일을 소홀히 한 적은 없다. 요즘은 아이들이 다 성장을 해서 손 갈 일도 별로 없고, 신랑도 아직은 본인 일에 바빠서 그런지 챙겨 달라고 심술부리거나 하지 않기도 하다. 요즘 들어서는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20년도 더 전에 데뷔했던 그 남자 가수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

벌써 같은 50대가 됐는데도 아직 예쁘고 세련된 모습 그대로다. 왜 그때는 이 친구를 잘 몰랐던 건지 아쉽기만 하다. 요즘 그 가수가 나와서 노래하고 말하는 걸 보면 그저 마음이 가고 막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미국에서 한참을 고생하면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좀 인기가 오래가서 그동안 돈도 좀 벌어 갔으면 좋겠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사회적 인간의 본능적 욕구 중 하나다. 반대로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정을 주고 싶은 욕구도 있다. 이건 육체적이고 성적인 욕망과는 다른 의미다. 그저 누군가를 흠모하고 애정을 쏟아 내고 싶은 대상이 필요한 거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하다못해 작은 인형이나 담요 조각에 정을 주고 살던 때가 있다. 엄마 잠옷의 냄새를 맡으면서 늦게 귀가하는 엄마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된 소녀들은 교생 선생님을 흠모해 연애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요즘은 아이돌 멤버를 따라다니는 사생팬이 되거나 각종 아이돌 관련 물건을 사들이면서 소위 ‘팬질’을 하기도 한다.

중년이 돼서 연예인에게 마음을 주고, 열중하는 부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 시기 여인들의 마음은 젊은 시절 가졌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싱싱하게 젊고 예뻤던 시절의 그 소녀가 아직 마음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결혼하고 생활을 하면서 직장이나 가정에서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마음 힘든 건 둘째치더라도 정말 숨 가쁜 세월을 지나왔다. 일 끝나면 집으로 뛰어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시부모 병원 뒷바라지에 각종 대소사를 도맡아 했다. 그때는 정말 드라마 하나 편하게 볼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그 젊고 칼칼하던 남편도 늙어 가는 중년 남자가 돼 있고, 자녀들은 다 성장해서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집에만 오면 엄마를 찾던 가족들이 이제는 별로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족들끼리 사이가 나빠진 것은 아니지만, 이젠 24시간 내내 같이 있으면 오히려 불편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남편이 그나마 같이 있어 주면 좋기는 하지만, 그도 허한 곳이 있는지 뭔가 다른 데 정신 팔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남편과 하루 종일 계속 같이 있는 것도 좋지만, 매일이라면. 글쎄, 조금 불편할 것 같다. 자식들이 대학 가고 시집장가라도 가고 나면 그들의 세계는 이제 엄마의 인생과는 분리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젠 예전처럼 중년 부인들이 끼어들 곳이 없어진 것이다. 거기다 소위 ‘빈 둥지 증후군’까지 겹치면서 마음을 왠지 허전하다.

이럴 때 눈앞에 나타난 등장한 TV 속 젊은 친구들은 내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해 주면서 공허한 마음을 채워 주는 귀여운 동생들인 것이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의 인간관계는 친구들과 직장동료였다. 그들과 함께 뛰어놀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인생의 담대한 계획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기도 했다.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느덧 중년이 넘어가고 보니, 그 친구들 중 상당수는 이미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다. 자기 일을 하겠다고, 혹은 회사에서 밀려 나면서 그 친하던 ‘형님’과 ‘동생’은 남이 돼 버린 것 같다. 남자들의 인간관계 대부분은 직장이 맺어 준 동료였던 거지, 인생의 동반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이 남자 주변엔 가족이 아니라 동료로서 직장 부하와 상사만 남아 있다.

가족들과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가장으로서 경제적·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왠지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과 쓸쓸함이 점점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음 줄 곳이 없어져 간다. 이때 자칫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넘어가면 중년의 바람처럼 불륜의 덫에 빠져들 수도 있다. 아니면 친하게 다가오는 학창시절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즐겁게 지내다가, 마음 대신 믿거니 하고 건네준 투자금을 날리기도 한다. 좌절하고 허탈한 마음에 알코올중독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big story]중년의 덕질, 행복 밸런스는

균형 있는 덕후 생활
이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채워 주는 방법 중 하나로서 ‘덕질’은 좋은 기능을 할 수 있다. 넘쳐나는 애정과 마음속 빈 공간을 헛된 투자와 불륜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취미생활과 연예인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는 것이니까. 덕질의 대상은 일반적인 일대일 사랑과는 다르다. 일대일 인간관계에서는 대부분 내가 해 준 것만큼 상대방이 똑같이 해 주기를 기대한다. 인간관계 신뢰의 기본적 조건 중 하나가 ‘내가 해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상호성(reciprocity)이기 때문에 그렇다.

연애할 때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그 사람도 나를 생각할까 고민하고, 내가 해 준 만큼 그 사람은 사랑을 덜 해 주는 것 같아 질투에 휩싸여 다투기도 한다. 관계에 대한 집착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게 극단적이 되면 의부증과 의처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향한 덕질은 다르다. 사랑의 상대에게 반대급부로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없다.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 사랑을 받아 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 된다면 우리 뇌에는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 등 소위 행복호르몬으로 충만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이것을 할 때면 가슴이 뛰고, 살짝 흥분된 상태로 집중하게 된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굳이 사람에 대한 덕질뿐 아니라 운동에 빠져들거나 바이크, 카메라, 물건 수집하기 등의 덕질도 비슷한 몰입의 경험을 줄 수 있다.

타고나기를 도통 뭔가에 빠져들거나 중독이 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저 그날그날 주어진 대로 자신의 일상을 살지만, 뭔가 하고 싶어 죽겠다 하는 취미는 도통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하나씩은 빠져 있는 경우가 있다. 당장 읽지 못하면서도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수시로 사들이거나 영화, TV 드라마에 심취해 있는 경우처럼 말이다. 아주 좋은 예는 아니지만, 가족들을 핑계로 홈쇼핑 채널에서 보여 주는 음식들을 자주 구매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결국 어딘가에는 애정을 쏟고 몰입할 수 있는 상대가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중년의 덕질이 건강하려면 몇 가지 마음에 둬야 할 밸런스(균형)가 있다. 첫째는 시간의 균형이다. 게임을 좋아하는 중학생이 하루 종일 PC방에만 있다면 바라보는 부모들의 걱정이 아주 많을 것이다. 중년인 당신도 지금 몰입하고 있는 그 취미에 쏟아 붓고 있는 시간이 내가 원래 해야 할 일들을 방해할 정도는 아닌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둘째는 애정의 균형이다. 내가 아끼는 아이돌 행사에 가야 한다고 가족들 생일 행사까지 빠지는 것은 없어야겠다. 물론, 식구들이 흔쾌히 인정해 주고 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나 좋자고 가족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내가 맡은 일까지 팽개칠 정도라면 이게 나의 덕질인지, 아니면 본업으로 바꿔도 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밸런스가 중요하다. 중년의 덕질이 마음의 평화를 준다고 해서 과도한 경제적 소비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좋다. 결국은 가정경제의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거니와 이와 관련해 배우자와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서 덕질을 하는 이유는 내 가족과의 삶, 내 직업생활을 보다 풍성하고 행복하게 잘해 나가도록 마음 충전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