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문현선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 대학원 초빙교수]한때 <주말의 명화>와 <명화극장>을 꽉 채웠던 추억의 명작들은 모두 아카데미 영화제의 수상작들이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인들의 대축제, 아카데미 시상식. 이제껏 한국 영화와 한국 배우가 그 시상식에 선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매직은 어떻게 현실이 됐을까. 사진 한국경제DB·CJ ENM 제공

기생충, 아카데미를 먹어 치우다
끝까지 설마,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미술상, 국제영화상까지 무려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을 때만 해도 ‘한국 영화 최초의 아카데미상’이라는 설레발은 아스라한 신기루처럼 보였다. 황금종려상의 빛나는 영광에도 불구하고, 아니, 칸에서의 영광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노미네이트는 No미네이트’가 아닐까 싶은 조바심이 더했던 것이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너무도 로컬이니까(They’re very local).

칸이 선택하는 영화와 아카데미가 선택하는 영화가 전혀 다른 방향성을 지닌다는 점도 성급한 체념의 이유였다. <기생충>의 수상에 대해 ‘파괴(destruction)’라는 표현을 썼던 존 밀러는 “계급 갈등을 심화시키는 외국 영화에 상을 주는 할리우드 사람들”을 그 ‘파괴’의 주체로 지목한 바 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이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영어권의 유색인종 감독이 만든 계급 갈등에 대한 영화.’ 밀러와 같은 이른바 ‘정통주의자’들의 눈에 <기생충>은 미국의 백인 중심 엘리트주의 전통에 대한 파괴적 시도로 보이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카데미는 왜 <기생충>을 허하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는 <기생충>을 선택했다. 사실 국제영화상(Best International Feature Film)은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60여 년 동안이나 사용해 왔던 ‘외국어영화상(Best Foreign Language Film)’이라는 이름 대신 ‘국제(International)’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상 아카데미도 보다 폭 넓은 시야와 행보를 보여 줄 필요가 있을 테니 말이다. 전 세계의 비평가들이 공인하는 영화를 아카데미만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작은 각본상이었다. 한국 영화 최초, 아시아 최초의 기록이다. 자막 영화는 선택지에서 제외하고 보는 미국 관객의 특성을 고려하면 <기생충>의 각본상 수상은 그야말로 놀라운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2시간 동안이나 뭔가를 읽도록 만들었어요. 도서관 사서들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죠(It made Americans read for two hours. Librarians can’t even do that)”라는 우스개는 미국에서 영어라는 제1 언어의 위계를 짐작하게 해 준다. 언어의 위계는 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본과 미디어의 결합이 전제되는 현대 대중사회에서 ‘언어’는 당연히 문화자본의 규모와 연관된다. 한 세기 가까이 문화대국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려 왔던 미국 사회에서 ‘자막’은 성가실 뿐 아니라 불필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위계는 변화한다. 중세 유럽의 라틴문자나 조선시대의 한자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기피 대상이 돼 가는 문자들을 떠올려 보면 무상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라틴 문자의 절대적인 위상이 ‘파괴’됐을 때, 유럽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됐고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막의 장벽, 그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봉 감독의 말은 어쩌면 미국의 지성을 일깨우는 경종이 됐을 것이다.
기생충, 아카데미를 먹어 치우다
국제영화상 수상이 결정됐을 때, 이미 기대치는 완전히 충족됐다. ‘그러면 그렇지. 국제영화상을 주지, 작품상을 주겠어?’라는 자학적인 패배주의라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감독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수상한 소식이 날아왔을 때는 심지어 ‘아카데미가 미쳤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작품이나 감독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아는 그 아카데미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이 사실이다.

아카데미는 가장 미국적인 행사 가운데 하나다. 자본과 미디어의 결합이 대중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그 상징과도 같은 행사가 바로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마치 월스트리트가 세계 경제수도의 중심가인 것처럼. 그래서 사방을 향해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봉준호의 오스카 트로피는 2011년의 월스트리트 시위를 연상시킨다.

시위참여자들은 “미국 전체 자산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상위 1%에 저항하는 99%의 미국인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지상의 가족, 반지하의 가족, 지하층의 가족이라는 영화적 비유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구조의 균형이 깨질 때 일어나는 일은 대낮의 참극에 다름 아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엄격한 선 긋기로 보장되지 않는다. 때로는 저항에 대한 포용이 시스템의 한계를 경신한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은 하나의 상징이다. 미국은 변하고 있다. 아니, 세계가 변하고 있으니 미국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 차례의 시위가 미국 사회를 변모시킨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생충>의 오스카 획득도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징들은 모두 세계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도래하는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세계는 분명 변화하고 있으며 거대한 미국도 그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비영어권의 유색인종 감독이 만든 계급 갈등에 대한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이 된 이유다.

봉준호, 그 참을 수 없는 불편함
설레는 맘으로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는 몇몇 감독들이 있다. 봉준호는 물론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몹시도 기다려지는 동시에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개봉일이 다가올수록 그런 마음은 점점 더 커진다. 그래서 <옥자>도 <기생충>도 극장에서 보는 기회를 놓쳤다. 1000만 영화 <괴물> 이후 이런 딜레마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다. 보면 틀림없이 좋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러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봉준호의 영화는 기발하다. 매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 준다. 지리멸렬하고 찌질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 유머들이 있어 즐겁다. 감독이 강요하지는 않아도 바람직한 주제의식은 관객을 떳떳하게 만든다. 그런데 불편하다. 피할 수가 없어서, 웃고 있는 틈틈이 들이치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선뜻 떨쳐지지 않는 불편함이 매번 한 발 앞서 극장으로 달려가려는 발길을 붙잡는다. 어쩌면 그래서 봉준호의 영화는 ‘진정한 예술’일 것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유명한 아도르노는 ‘진정한 예술’이란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비판적 내용이란, 현존재나 현재 상태에 대한 부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비평적 관점에서 재고하는 것,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되 작품이 이를 설파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진정한 예술은 자본에 의해 관리되는 사회에 편입되지 않는 비사회적 태도를 드러내면서 무기능성을 통해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에 저항한다.

봉준호식으로 표현하자면 덩치가 엄청 큰 옥자를 그려놓고 ‘얘는 왜 덩치가 클까’에서 시작해서 유기농 조작 식품을 계획하는 기업 이야기로 이야기가 뻗어 나가는 것, 예술 지향적인 건축디자이너가 지은 주택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사람들과 그 집 안에 비합법적으로 침입하거나 무단으로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의 계층과 계급 문제를 재고하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냐를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을 던져 놓고 해답을 구하는 지난한 임무를 관객의 몫으로 돌리는 특징 때문에 ‘나’는 봉준호의 영화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기생충>에 대하여
영화는 딱 눈높이에서 바깥세상의 바닥 부분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반지하실에서 출발한다. 지나가는 취객들이 인적 드문 골목이라고 안심하고 토하거나 소변을 보는 바로 그곳에 한 가족의 보금자리가 있다. 휴대전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아 일용한 부업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돈독한 애정을 드러내는 가족의 모습은 팍팍한 일상을 버티고 살아가는 모두에게 애틋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합법적인 일자리를 찾고 싶어도 충분한 자격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아버지는 쉽지 않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 아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아들은 과외 면접을 위해 준비한 가짜 서류를 들고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전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 자기 일자리를 구했으니 좋은 일자리에 사랑하는 가족을 취직시키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모르는 척 하면서 당겨 주고 밀어 주며 고용주의 ‘좋은 집’으로 들어간다. 당겨 주고 밀어 주며 세상을 살아가는 건 ‘있는 사람들’만 하는 일이 아니다.

‘없는 사람들’도 상부상조한다. 그게 나쁜 일인가. 그래서 자신과 조금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밀어내는 일에는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돈 많고 순진한 사모님과 똑똑한 척 하는 사장님을 속이는 데도 낯을 붉히지 않는다. 신분은 가짜지만 마음은 진짜라고 믿으면서 달달한 사랑을 꿈꾸기도 한다. 한낮의 백일몽일 뿐이라도 꿈을 꿔 볼 수는 있지 않은가. 그러나 꿈은 꿈일 뿐 언젠가는 깨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주인 없는 빈집에서 (개껌인 줄 모르고) 개껌을 씹으며 맥주를 마시던 딸은 자기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우리 앞가림이나 하면 된다고 반박한다. 화가 나는 것은 아버지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계를 앞세워 잠재웠던 양심이 깨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순간 꿈처럼 여겨졌던 현실이 자각된다.

그들의 현실은 폭우로 물에 잠긴 텐트를 캠핑장에서 자기 집 마당으로 옮기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은 집중호우가 쏟아질 때마다 홍수에 휩쓸려 가는 일상이고,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고 선을 넘어가는 삶의 ‘냄새’다. 거기에 자신들의 사기가 폭로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불법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공포가 얹힌다. 이 정도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느와르 영화라면 이 시점에서 막다른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비장한 엔딩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봉준호의 <기생충>은 딱 그 지점에서 목에 걸린 가시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 사람들이 저지른 불법을 과연 양심의 가책 없이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때로 불법까지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손을 들어 줄 것인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합법과 불법에 비해 선과 악의 판단은 한층 더 어렵다. 다들 열심히 살았다, 나름대로.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있어도 선과 악의 차이는 논하기 어렵다. 상대평가가 보편적인 시스템에서는 누군가 상위를 차지한다면 필연적으로 하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생긴다. 지하실이 없다면 펜트하우스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누가 진정 기생충인가.

<기생충>의 모든 것이 처음이다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다. 더욱이 후보에 오른 6개 부문 가운데 작품상, 감독상, 국제영화상, 각본상까지 4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획득했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도, 국제영화상과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도 최초다. 오스카만이 아니다. 칸 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도 한국 영화로는 최초였고, 골든글로브의 외국어영화상도 최초였다. 미국 배우조합상(SAG)에서 최고의 영예인 캐스팅 앙상블 상을 수상한 것도 비영어권 영화 중 최초다.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도 처음이고, 각본상을 수상한 것도 처음이다.

비영어권 영화가 영어권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기생충>은 미국 작가조합상과 아카데미 시상식, 그리고 영국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는데, 사실 영화 속 우리말 대사들은 매우 미묘한 뉘앙스를 띠고 있으며 집중하지 않으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까지 포함돼 있다. 번역이란 어떻게 해도 100% 전달이 어려운 작업이다.

오죽하면 “번역자는 반역자다”라는 속설이 정설로 통할까. 서사보다는 시가, 비극보다는 희극이 번역하기 더 어렵다. 그러나 <기생충>이라는 블랙 코미디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것이 우리 세대 모두가 통감하는 보편적 비극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슬프지만.


문현선 교수는…
세종대 공연·영상·애니메이션 대학원 초빙교수이자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이다. 또한 공작소 파수(破守) 스토리텔러 & 캐릭터 프로파일러, 레 필로소피(LP) 인문 프로그램 ‘타로와 별자리’ 인문학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무협>, <삶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를 썼고, <꿈의 해석을 읽다>, <장자를 읽다> 등을 옮겼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8호(2020년 0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