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일본의 공습이 재개됐다. 한국이 아베 정부의 경제 공습에 무조건 반발한다면 수출이 둔화되면서 ‘구조적 장기 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 정부 차원의 섬세하고 치밀한 대응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한·일 간 경제보복 맞대결이 갈수록 꼬이는 양상이다. ‘일제 36년 지배’라는 역사적 반일 감정과 ‘남북 분단’이라는 지정학적 특수성까지 결부돼 양국이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통상 게임 방식을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과정에 답습해 적용하고 있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고도의 협상 전략가다. 성공한 욕심 많은 기업인 출신답게 참가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샤프리-로스식 공생적 게임’보다 참가자별로 이해득실이 분명히 판가름 나는 ‘노이먼-내시식 제로섬 게임’을 즐긴다. ‘모든 게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그다.
아베 일본 총리는 전형적인 금수저 출신의 정치 3세대다. 선친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은 ‘우경화 성향’이 강한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베 총리도 취임한 이후 신사참배로 국제적으로 비난의 표적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치에서 잔뼈가 굵고 국수주의 성향이 짙은 정치인일수록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지는 게임을 싫어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아베 총리는 ‘정치가(statesman)’가 아니라 ‘정치꾼(politician)’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다음 세대’와 ‘국민’을 생각하는 데 반해 후자는 ‘다음 선거’와 ‘자신의 자리’만을 연연하는 정치인을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에 치를 대선에 주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베 총리도 참의원 선거 등 다음 선거에 집착하고 있다.
◆트럼프 vs 아베, 대외 통상정책 특징은
트럼프 정부가 추진하는 대외 통상정책의 최종 목표는 ‘미국의 재건’이다. 직전 오바마 정부의 태생적 한계였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손상됐던 국제 위상과 주도권의 반작용에서 나온 대외정책 기조다. 지난 2년 동안 보여준 트럼프 정부의 대외 통상정책에 있어서는 이전 정부와 구별되는 4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첫째, 미국에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부담과 책임만 지는 국제규범과 협상에 대한 우순선위가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점이다. 세계무역기구(WTO)와 범태평양경제협의체(TPP) 탈퇴 의사, 파리 신기후 협상 불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혹은 폐기 등이 대표적인 예다.
둘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통상 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종전과 다른 점이다. 국제적으로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수단뿐만 아니라 환율보고서 등 자국법에 근거한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다. 심지어는 새로운 상호 호혜세를 부과한다든가 미국 의회를 거치지 않고 행정명령으로 발동할 수 있는 ‘슈퍼 301조’까지 동원한 태세다.
셋째, 통상정책을 다른 목적과 결부시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미국 ‘통상법’ 232조에 근거해 통상을 안보와 연계시킨다든가, 대북한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국에 대해 집중적으로 통상 압력을 높이고 있다. 한국 등 해당 국가가 트럼프 정부의 통상정책에 쉽게 대처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넷째, 국가별로는 무역적자 확대 여부에 따라 이원적 전략(two track)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뚜렷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무역적자를 대미국 흑자국에 성장과 고용을 빼앗기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이 때문에 무역적자 확대국에 대해 통상 압력을 가해 시정하고, 다른 국가와는 공존을 모색하는 ‘차별적 보호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가 중국과 무역 협상 과정에서 적용한 게임 방식을 적용해 앞으로 전개될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과정을 예상해보면 경제보복 대상은 계속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과의 무역마찰 과정에서 미국은 자신의 입장 관철 여부에 따라 지금까지 보복관세 대상을 네 차례에 걸쳐 확대 적용해 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확정한 경제보복 대상 품목만 하더라도 190개에 달한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핵심 품목 순으로 보복 대상을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앞으로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혜택)에서 제외시킬 경우 그 대상이 110개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 정부는 이 방침도 확정해 놓은 상태다.
안보와 결부시켜 경제보복의 정당성과 국제 공조 분위기를 형성시키려는 조치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세정제인 불화가스가 북한에 밀반출됐다는 주장이다. 확실한 증거 부족으로 초반에 보인 강경한 입장에서 다소 누그러졌지만 만의 하나 사실이라면 바세나르체제와 유엔안보리 규정을 동시에 위반해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바세나르체제란 핵과 핵무기, 생화학무기의 모든 형태의 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자는 종전의 ‘코콤(COCOM: 공산권 국가에 대해 전략물자 수출 통제)을 민주권 국가에도 확대시킨 국제협약을 말한다. 불화가스는 핵과 핵무기의 세정제로 활용되고 사린가스 제조로 악용될 수 있는 무색무취의 독가스다.
경제보복 대상이 금융 분야로 확대될 가능성도 주목된다. 일본계 자금은 국제금융시장에서 독특한 자금으로 분류된다. ‘일본인은 경제적 동물’이란 오명에서 보듯이 철저하게 실속에 따라 움직인다. 국수주의 성향도 강해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는 정부에 협조하는 모습도 와타나베 부인의 움직임에서 쉽게 확인된다.
외환위기 당시 일본계 자금이 보였던 행태가 전형적인 사례다. 1997년 여름 휴가철이 끝난 직후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외화 부족 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외환보유액이 3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믿었던 일본계 자금이 제일 먼저 이탈하자 다른 외국인 자금이 이탈하면서 우리는 외환위기를 당했다.
일본은 전후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바탕으로 세계 최대 순채권국이 됐다. 대외 순자산 규모가 우리 돈으로 3340조 원이 넘는다. 이 중 한국 내 유입된 일본계 자금은 신디케이트론,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다양한 형태로 330조 원에 달한다. 일본의 대외 순자산 규모의 10%에 달하는 최대 투자국이다.
이 밖에 화웨이 등 첨단 기술 견제와 관련해 아베 총리는 이번 기회에 삼성전자 등 한국 업체에 빼앗긴 반도체 위상을 되찾는다는 야망이다. ‘전파탐지기형 인간형’인 아베 총리가 언론 플레이를 통해 각종 선거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또한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하다.
미·중 간 무역마찰이 장기화되는 속에 한·일 간 경제보복 마찰은 세계 경제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이다. ‘기업 간 무역(inter firm trade)’과 ‘기업 내 무역(intra firm trade)’으로 대변되는 세계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 GVC)이 붕괴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 부품을 통제하면 세계 70%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업체의 공급에 차질이 발생해 미국, 중국 등 모든 세계 반도체 업체가 타격을 받게 된다.
◆日의 경제보복, 어떻게 풀어야 할까
한국과 일본이 지금까지 보여준 입장을 감안하면 경제보복 마찰이 쉽게 끝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유일한 중재자인 트럼프 대통령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대응 자세가 뒤늦게 강경하게 대응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대외적으로는 WTO 제소, 미국과 협의 등을 통해 공조 분위기를 형성해 나가는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수입선 다변화, 국산화 제고의 정책을 발표했다. 삼성전자 등 관련 기업과도 적극 연계해 대처해 나가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WTO에 제소한다 하더라도 확정하기까지 최소 3년 이상이 걸린다. 설사 WTO 제소를 통해 우리에게 유리한 판정을 받더라도 아베 정부가 이행하느냐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WTO 판결이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수입선 다변화와 국산화 정책도 그렇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다. 국제 공조 분위기를 형성하는 노력도 ‘키(key)’를 쥐고 있는 미국이 한국의 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다.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 간의 긴밀한 관계(상대적으로 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은 소원한 관계)를 감안하면 오히려 일본을 두둔할 가능성이 높다.
하루 빨리 아베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대처를 ‘옴니버스 방식’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경제보복 대응을 남북 관계 등의 다른 정책과 분리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나, 아베 정부가 북한과 연관시켜 추진하는 움직임과 맞지 않아 의외로 효과가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가 일본에 의해 국권이 피탈된 지 햇수로 110년이 된다. 일본의 공습이 재개됐다. 군사적 수단에서 경제적 수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이 아베 정부의 경제보복에 무조건 반발한다면 수출이 둔화되면서 구조적 장기 침체론(L자형 장기 침체, 일본식 잃어버린 10년 혹은 중진국 함정)이 급부상하고 남북 관계를 풀어 나가는 데 난항이 예상된다.
각국의 이익을 개진하기 위한 국제 협상은 그 자체가 타결되기가 힘들다. 특히 한·일 관계는 역사적 감정과 지정학적 위험까지 겹쳐 더 어렵고 예민하다. 이 때문에 한·일 간 협상은 ‘사후’보다 ‘사전’ 대응이 중요하다.
지난 2년 동안 숨 가쁘게 전개돼 왔던 미·중 무역마찰도 잠시 휴지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막 오른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입지 여부에 따라 언제든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한·일 경제보복 과정과 대책도 이 같은 각도에서 내다보고 짜야 한다. 조급증에 모든 패(霸)를 한꺼번에 내놓을 경우 장기전은 패배로 직결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1호(2019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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