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테토 투자 전문가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면 재미없죠”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근사한 한옥에 살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존에 앞장서며 강연에 칼럼까지 섭렵한 남자. 두루마기를 입은 어르신이 아닌 멀끔한 슈트 차림의 미국인, 마크 테토에 대한 이야기다. 심지어 그는 유능한 금융 및 투자 전문가이자 토포앤코코리아(TCK)의 전무로 일하고 있다. 모든 것이 낯선 타지에서 자신의 본업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까지 통달한 그에게 슬럼프는 없었을까. 말도 통하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에 사는 우리조차도 슬럼프에 힘들어하는 데도 말이다.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한 한옥 안에서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4월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잠깐 출연하셨죠. 오랜만에 방송에서 보니 반가웠어요.
“가끔 방송인 마크 테토로 소개되곤 하는데, 전 금융과 투자 전문 회사를 다니고 있고, 본업에 충실히 생활하고 있어요. 다만 제가 알리고 싶거나 관심 있는 분야라면 방송에 흔쾌히 출연하곤 해요. 이번 <나 혼자 산다>도 그런 기회였어요. 가수 헨리가 자신이 처음 배운 바이올린을 경매로 내놓았는데, 경매사가 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했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문화와 한옥마을의 보존을 방송에서 잘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요. 저는 소반과 수막새 세트를 경매에 위탁하면서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요. 낙찰되면 기부금으로도 사용되니 의미도 있었어요.”
그런 의도라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수막새 세트가 실시간 검색어에 떴으니까요.
“제 이름도 실시간 검색어에 떴지만, 그보다도 수막새가 더 높게 떠서 깜짝 놀랐어요. 아마 수막새가 최초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웃음) 수막새는 지붕 기와 밑을 받치는 흙이 비가 올 때 빠지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해요. 사실 전 문화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배운 적도 없는데, 그냥 이 한옥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호기심을 갖게 돼요. 방송을 통해 이런 문화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여겼으면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전무님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한옥으로 이사 오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생긴 건가요.
“그렇죠. 이 집은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서울 강남에 위치한 작은 오피스텔에 살았는데 친구를 따라 북촌 한옥마을을 돌아보던 중 이 집을 알게 됐죠. 처음엔 집이 좋다, 한 번 살아보자고 생각해서 이사를 왔어요. 이곳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눈앞에 이것저것이 보여요. 지붕이 예쁘니 기와에 대해 알아보고, 창문에 비치는 햇살이 아름다워서 창호지와 한지에 대해 공부해보고, 또 집 안에 어울리는 가구를 찾다 보니 반닫이나 함, 조선시대의 책장 같은 고가구들 심지어 가야 시대의 토기까지 알게 됐죠. 원래는 논현동 가구거리에서 한번에 가구들을 구비하려 했는데, 도통 어울리는 걸 못 찾겠더라고요.”
본업은 물론, 강연자로서, 칼럼니스트로서, 방송인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해 오셨죠. 역할 갈등을 느낀 적도 있을 것 같은데.
“아마 최근 4년이 저에게 가장 바쁜 시기지 않았나 싶어요. 4년 전에 현재 다니는 회사로 옮겼고, 이 집으로 이사도 왔고, 방송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죠. 주중에는 일하고, 토요일에는 칼럼을 쓰거나 잡지 촬영을 하고, 일요일에는 JTBC 프로그램 <비정상회담> 녹화를 했어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재밌게 느껴졌어요. 단, 일하는 데 있어 우선순위를 두었죠. 제 본업이 첫 번째, 방송이 두 번째, 그리고 강연이나 칼럼 등 기타 활동이 세 번째였어요. <비정상회담>의 패널들이 모두 직장을 갖고 있는 일반인이었기 때문에 일요일에 녹화를 했거든요. 그 외에 주중에 녹화하는 방송 섭외는 거절했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겠어요.
“제가 뉴욕에서 투자은행(IB)을 다닐 때 보통 80시간에서 최대 120시간까지 일해봤는데, 일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비슷할 거예요. 정신없이 바빴지만 이 집이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냐면, 한옥은 저절로 힐링이 되는 특징을 갖고 있단 거예요. 식탁에 앉아 전경을 바라보며 모닝커피를 마시거나 스케줄이 없을 때 집에 혼자 느긋이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어요. 뉴욕이나 서울 강남의 오피스텔에 있었을 때에는 정신없이 출근했는데, 이 한옥은 그걸 허용하지 않아요. 창문을 보세요. 지금은 버튼 하나로 문과 창문이 다 잠기지만, 여기는 하나하나 창문 잠금쇠를 돌리고 잠가야 해요. 집의 모든 창문을 잠그려면 5분 정도 걸리는 귀찮은 작업이죠. 하지만 이 동안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매일매일 명상을 하는 것과 같죠.”
우리나라에는 3·6·9 법칙이 있어요. 3년, 6년, 9년마다 슬럼프를 느낀다고요. 직장 생활을 오래 했을 텐데, 슬럼프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슬럼프까지는 아니었고, 개인적으로는 4년 단위로 전환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회사에서는 업무 관련 스킬을 배우기도 하지만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해요. 3~4년이 지나면 어느 정도 판단이 생기겠죠. 그걸 슬럼프가 아닌 기회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퇴사를 한다고 해서 실패는 아니니까. 나와 더 맞는 회사로 가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인 거죠. 단, 2년보다 짧게 다니다가 퇴사를 하는 건 권하지 않아요. 나도 나에 대해 배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인생을 장기적인 여정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다음 스텝이 무엇인지 굳이 정할 필요는 없죠. 다만 현재에 충실할 뿐이에요.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면 재미없겠죠.”
그렇다면, 지금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나요.
“‘More of this.’ 현재 제 업무에 충실하고, 책도 내보고 싶고,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깊이 유지하고 싶어요. 대학에 다닐 때는 목적지가 무엇일지 엄청 고민했지만, 살다 보니 인생은 목적지보단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것도 한옥에서 배운 철학인데, ‘일보일경’이라고 하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고요. 한옥은 처음부터 집의 모든 구조를 보여주지 않아요. 특히 이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집의 크기조차 분간이 되지 않고, 현관을 열고 들어와도 방이 몇 개인지, 복도는 있는지 알 수가 없죠. 사는 것도 한 걸음씩 전진하면서 나와 맞는 일, 회사, 사람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와서 이렇게 유명해지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 같아요.
“그랬죠. 단, 삼성전자에 스카우트가 돼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몇 가지만 지키기로 했어요. 첫째, 본업에 충실할 것. 둘째, 한국어를 열심히 배울 것. 셋째, 다양한 분야의 한국 친구들을 사귀어볼 것. 이 세 가지만 지키면 뭔지는 모르지만 엄청 재밌고 다양한 기회가 생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목적지는 몰라도 돼요. 자신의 기준을 확실히 세우고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는 언젠가 오게 돼 있으니까요.”
칼럼을 봐도 그렇고, 인스타그램에 주기적으로 올리는 글들을 봐도 필력이 상당하세요.
“말하기보다 쓰기가 더 쉽다고 생각해요. 말하는 건 순발력이 필요한 데 반해 쓰기의 핵심은 아이디어죠.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에게는 색다르게 보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강남의 뒷골목 거리에 대해 쓴 것처럼요.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으로 돌아다니는 평범한 길이지만, 제가 바라본 그곳은 뉴욕의 거리와 다른, 신기한 곳이었거든요. 그리고 <비정상회담> PD가 제게 해준 조언도 도움이 됐어요. 좋은 콘텐츠를 만들려면, 그 순간의 노력보다 중요한 게 일상에서 호기심을 갖는 거라고요. 누군가는 ‘예쁘다’ 하고 끝날 수 있는 걸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면 나중에 글을 쓸 때 발휘되는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14살은 어떤 시기였나요.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로 기억해요. 첫 연애도 했었고요. 여러모로 많이 깨우침을 받았던 시기랄까요. 제가 있었던 세상보다 더 넓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느낌. 관심이 있는 걸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는 걸 느끼게 되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절이었어요.”
한민수 전 파라아이스하키 선수
“실패해도 남는 건 너무 많아요”
인터넷 서핑 중 시선을 사로잡은 사진 하나. 2019년 가을·겨울 서울 패션위크 런웨이에 선 한민수 선수의 모습이었다.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부분 동메달을 따며 멋지게 은퇴한 그는 반바지 슈트를 입고 의족을 훤히 드러낸 채 위풍당당하게 걸어다녔다. 목에는 그 동메달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자태는 존경을 넘어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했을 정도. 순간 그의 14살이 남다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처음 만난 순간, 그는 스프린터 의족을 착용하며 이제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달리는 게 뭐 대수인가 싶었다. 뭔가 더 큰 뜻이 있는 줄 알았다. 싱글벙글 웃는 그와의 첫 만남은 다소 어리석은 질문으로 시작됐다.
달리기를 시작한다고요. 육상 종목에 도전하나 봐요.
“육상 선수를 시작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갖고 있었거든요. 평생 달리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국가대표 선수 생활 20년 동안 아이스하키에만 매진하다 보니, 은퇴 후 하고 싶은 게 많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달리기였어요.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겠지만요. 다행히 박동현 오토복코리아 대표가 제게 이 스프린터 의족을 선물해주셨어요. 패럴림픽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나 행사 때도 후원을 받았는데 이런 큰 선물을 받게 되니 너무 감사했죠.”
이렇게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장애를 갖고 있지만 나도 한번 해보자’는 용기를 내는 거죠. 저도 왜 이렇게 용감한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패한다고 남는 게 없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도전 그 자체가 굉장히 가치 있는 행위고, 그 과정 또한 중요한 거죠. 지금 달리는 것도 언젠가는 체력이 달려서 못하고, 포기할 수 있겠죠. 하지만 열한 번까지 뛴 지금까지는 너무 행복했어요. 비장애인도 뛰는 게 힘들겠다고도 느끼고요. 이런 경험들, 감정들도 소중한 거예요. 실패해도 남는 건 너무 많아요.”
당연히 실패도 해봤겠죠.
“물론이죠. 결혼하고 퇴직금으로 치킨집을 했는데, 결국엔 망했어요. 하지만 ‘나는 망했다’라고 망연자실하기보단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를 깨우쳤어요. 저는 돈 버는 것에만 급급했지, 인내하는 법을 몰랐거든요. 산전수전 다 겪으신 어르신들도 장사를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도요. 만약 그때 망하지 않았다면, 선수 은퇴 후 첫 번째로 생각한 게 치킨 장사였고 또 망했을지도 몰라요. 장사 까짓 거 쉽게 생각하고요.”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죠. 당시 ‘울보 캡틴’이라는 별명도 붙었어요.
“그냥 울었어요. 2000년부터 국가대표 파라아이스하키 팀 창단 멤버로 시작해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까지, 세 번의 세계선수권 대회와 세 번의 패럴림픽 끝에 메달을 얻었잖아요. 주변에선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 은퇴하라고 했는데 사실 메달 하나 없이 은퇴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지도자 과정을 미루고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데다가 부상도 많이 겪었죠. 이런 희로애락들과 함께 했으면 좋았을 사람들, 특히 저를 파라아이스하키 선수로 이끌어주셨던 분이자 국가대표 팀을 창단했던 고(故) 이성근 감독님이 창단 3개월 후에 돌아가셨는데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울컥했죠.”
은퇴 후 1년 정도 지났어요. 그동안 어떤 일을 준비하고 있었나요.
“국가대표를 선출하면 1년 동안 계약을 맺는데, 지난 5월 세계선수권 대회를 끝으로 시즌이 끝났어요. 돌아오는 시즌을 위해 코치 준비를 해 왔죠. 사실 현재 장애인 선수 출신의 지도자가 없거든요. 지도자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코칭 심포지엄을 받으러 갔었어요. 레벨 1부터 레벨 5까지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려면 2년 정도 걸리는데 두 달 만에 속성으로 받고 왔어요. 또 국내에서는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하는 리더십 과정이 있어요. 5개월 과정을 수료했죠.”
강연도 한다고 들었어요.
“우리나라에 등록된 장애인의 수는 500만 명이에요. 그중 90%가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사고로 장애를 얻은 중도 장애인이죠. 장애를 얻고 나서 자살 충동을 많이 느낀다고 해요. 실제로 자살한 이들도 많고요. 다치고 나서부터는 살아갈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복지가 잘돼 있어서 그들이 세상에 나올 제도적인 뒷받침이 든든한 것도 아니고요. 저는 중도 장애인은 아니지만, 그들과 같이 생활해 왔고, 그중에는 10년 동안 세상과 떨어져 있다가 운동하겠다고 나온 친구들도 있어요. 장애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걸 강연을 통해 알려주고 싶었어요. 스스로가 장애인이라는 걸 인정해야 더디더라도 조금씩, 세상을 향해 올라갈 수 있거든요.”
11년 동안 파라아이스하키 팀 주장을 맡아 오셨죠. 당연 힘들고 지칠 때가 있었을 거 같아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사실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훈련이 힘든 건 견딜 수 있는데, 동료나 스태프들 간에 불화가 생길 때 힘들었던 거 같아요. 팀으로 하는 운동은 결속력 있게 해야 하는데, 팀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성적도 잘 나오지 않거든요. 결국엔 소통이 답이더라고요. 올림픽 메달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으니 자기주장만 내세울 게 아니라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힘든 적은 없었나요.
“경제적인 부분이 있었죠. 국가대표 팀 창단 이후 6년 동안 실업팀이 없었어요. 직장생활과 훈련을 병행해야 했죠. 강원도청에 실업팀이 생기고 이에 소속되면서 편하게 운동했어요. 행복했죠. 스포츠는 투자라는 말도 있는데 아마 이 강원도청 실업팀이 없었으면 메달을 따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국내에 아이스하키 링크장도 원체 부족해서 연습을 위해 대관할 때도 힘들었어요.”
의족이나 장비들을 구비하고 관리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아요.
“오토복코리아의 도움이 컸어요. 오토복은 독일 브랜드인데, 전 세계 의족 및 장애인 보장구의 60%를 생산하는 기업이라고 해요. 파라아이스하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장애인체육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기업이지 않을까 싶어요. 덕분에 평생 한 번이라도 달려보고 싶었던 저도 꿈을 이루게 됐고요.”
세상이 무거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을 듯합니다.
“‘흑인 아빠가 일하러 갔다가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백인이 될 순 없지만 장애인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해요. 당장 내일도 어찌될지 모르는데 실패가 두려워서 도전을 꺼리지 말라는 거예요. 신체가 건강하다면, 아웅다웅 정체된 삶을 살지 말고 도전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14살은 어땠나요.
“30살 때 다리를 절단하기 전에는 크러치를 짚고 생활했어요. 제가 유소년, 사춘기 시절을 밝게 지낼 수 있었던 건 편견 없이 대해준 주변 친구들 덕분이죠. 예를 들면 축구를 할 때 제게 ‘몸이 불편하니 빠져 있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승패를 떠나 같이 공을 차고 놀았거든요. 이렇게 좋은 주변 사람들이 있고, 저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 밝고 당당하게 살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사진 이승재 기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9호(2019년 06월) 기사입니다.]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