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칭찬으로 혹은 ‘안 된다’는 주의들로 내가 하고 싶은 바를 숨기거나 삼킨 채 산다.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이들을 ‘청개구리’라 칭하기도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청개구리들을 위한 오늘의 동화, <청개구리>다. “옛날에 엄마 개구리와 말썽꾸러기 청개구리가 살았다. 청개구리는 항상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엄마가 하는 말과 반대로 행동했다. 어느 날 엄마가 몸져누웠다. 엄마는 죽으면서 늘 자신의 말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청개구리에게 자신이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 달라고 당부하는데….”
예전에는 청개구리라는 표현이 참 많이도 쓰였습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라든가 말썽꾸러기 아이들에게 수식어처럼 붙여졌죠.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가 왜 그들의 의견을, 조언을, 명령을 무조건 수렴해야 하죠? 동화 <청개구리>는 어머니를 개울가에 묻습니다. 어렸을 땐 그것이 청개구리의 변덕 때문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어머니의 변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청개구리야, 엄마가 죽게 되면 개울가에 묻어주겠니? 알아, 비가 오면 무덤이 쓸려 내려갈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엄만 너무 바르게만 살았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았지.
엄만 널 보며 생각했어. ‘나도 제멋대로 굴어볼걸, 원하는 대로 살아볼걸.’ 어린 시절 내가 원하던 것들은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들도 아니었어. 양치질을 안 하고 자거나 내 맘대로 방을 어지럽힌다든가.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했어.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생기면, 나는 당연한 듯 바른길을 택했지. 나는 사실 착한 아이가 아니었어. 그저 내 행동을 책임질 자신감이 없었을 뿐이야. 그러니 이젠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걸 말해보고 싶어.
나도 알아. 무덤은 땅에 있어야지. 그렇지만 엄마는 물가가 좋은걸. 땅에만 있으면 너무 갑갑할 것 같아. 물 내음도 맡고 싶고 철마다 바뀌는 새들도 구경하고 싶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설령 그게 틀린 결정이라고 해도 엄마는 그렇게 하고 싶어. 청개구리야, 엄마를 개울가에 묻어주지 않을래?”
어쩌면 청개구리 엄마의 말은, 저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누군가의 이야기에 맞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죠.
우리가 미처 자라기도 전에, 우리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어요. “이렇게 하는 게 좋아”, “저렇게 하면 안 돼” 등 그 많은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다가 정작 내 목소리는 못 들어요.
청개구리 소리 좀 들으면 어떻습니까. 그걸 해야 혹은 하지 않아야 내가 행복하다는 데 말예요. 오늘 하루는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하루가 됐으면 합니다.
※김남규 작가의 동화 연재는 6월호를 끝으로 마감합니다.
“그동안 저의 엉터리 동화를 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9호(2019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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