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 Artist 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 정두화

[한경 머니 =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미술사 박사] 정두화 작가의 작품 소재는 오로지 ‘책’이다. 정확히는 책을 활용한 ‘펄프회화’다. 그가 헌책을 모아 작품의 재료로 삼기 시작한 것은 대략 25년이 넘었다. 늦깎이 미대 재학 시절부터 이미 다양한 종류의 책을 모아 작품으로 제작했다. 일일이 낱장에 풀칠해 탑처럼 쌓아 건조시킨 후, 균일하게 썰어 다양한 패턴으로 작품화했다. 매우 긴 물리적 시간을 인내해야만 비로소 완성작을 만날 수 있다.
Forest 17-F1, book on wood, 80×182cm, 2017년Sound 18-so1, book on wood, 63×63cm 4ea, 2018년
Forest 17-F1, book on wood, 80×182cm, 2017년Sound 18-so1, book on wood, 63×63cm 4ea, 2018년
자초한 고생은 결국 빛을 발했다. 정두화 작가의 작품은 이제 홍콩크리스티 경매에 단골로 출품된다. 5년 넘게 꾸준히 낙찰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특유의 작가적 순수 노동력에 대한 대가(代價)나 마찬가지다.

보통 작가의 생각을 엿보기 위해선 전시 혹은 작품의 제목을 살펴보는 방법도 괜찮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즌별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어떤 일관된 대주제를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그 작가의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로도 용이하다.

정 작가 역시 시기별 개인전 제목이 몇 가지 패턴으로 구분된다. 가령 1997년 첫 개인전인 ‘타임 스페이스(Time-Space)’를 시작으로, 2009년 ‘소리-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2011년 ‘책-우리들의 이야기’, 2013년 ‘사유의 숲-소리의 변형’ 등이다. 2013년부터는 줄곧 ‘사유의 숲(Thinking of Forest)’ 시리즈의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작품 제목 역시 개인전 제목인 ‘사유의 숲(Thinking of Forest)’ 혹은 ‘숲(Forest)’으로 같거나, 간간이 ‘소리(Sound)’를 사용함으로써 일관된 작품의 주제를 이끌어 오고 있다. 굳이 그 이면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아마도 ‘자연의 근원적인 울림에 대한 포착’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애초에 정 작가는 책 안에 담긴 텍스트의 내용보다 책 자체의 ‘상징적 원성(原性)’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책은 나무에서 태어났지만 그 안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김으로써 전혀 다른 역할과 기능을 하게 된다. 그는 다시 그 책에 부여된 후천적 기능을 해체해 선천적 원성으로 되돌린 것이다.

낱알만 한 크기로 수없이 찢고 이어 붙이거나, 미세하게 픽셀화한 수많은 도트들의 접합이 의외의 울림과 공명을 전한다. 온갖 사연의 책들은 정 작가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다. 텍스트는 증발되고, 종이는 나무(펄프)가 되며, 간접 소통의 언어는 직접 소통의 교감으로 뒤바뀐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본성회귀(本性回歸)’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간혹 형식적인 언어는 진정한 소통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오래된 연인처럼 차라리 무언의 교감이 더 많은 감정을 나눌 수 있기 마련이다.

책, ‘자연의 원성’으로 인도하는 키워드
Forest 18-fo 1-12, book on wood, 26×22cm 12ea, 2018년
Forest 18-fo 1-12, book on wood, 26×22cm 12ea, 2018년
정 작가의 작품도 소통과 교감의 방식을 전하고 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일체의 상식과 관습을 일순간에 소멸시킨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작품 재료로 차용된 ‘책 안의 만고진리(萬古眞理) 그 이상의 구현’은 아닐까. 어쩌면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그에게도 책은 매우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화두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쯤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소소한 텍스트의 나열은 그리 중요치 않다. 결국 자기 수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아(眞我)를 찾는 길은 첫 출발점인 자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 작가에게 있어 책은 ‘자연의 원성’으로 인도하는 키워드다. 그리고 그 자연에서 인간됨을 완성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이미 노자(老子) 역시 자연에서 흥미로운 인간수양(人間修養)의 덕목을 찾아냈다. 바로 ‘물이 가진 일곱 가지 덕목―수유칠덕(水有七德)’이 그것이다. 그것으로 겸손(謙遜), 지혜(智慧), 포용(包容), 융통(融通), 인내(忍耐), 용기(勇氣), 대의(大義) 등의 덕목을 설명한다. 그의 작품에도 자연의 원성을 지닌 나무(책, 종이)를 활용한 그만의 인간수양 덕목이 함축돼 있다. 물론 수유칠덕은 기본이고, 그것에 ‘사유(思惟)’의 덕목을 더했다. 아마 적어도 ‘목유팔덕(木有八德)’ 정도로 불러야 되지 않을까.

“책은 우리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에서 역사, 종교, 학문, 예술 등의 광범위한 소통을 끌어내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인쇄된 활자에 의해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의미로 또는 지식의 축적과 전달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소통의 장을 열게 됩니다. 책의 질료적 측면을 표현함에 있어, 책 속에 담긴 의미와 우리들의 작고 큰 이야기를 내면적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무에서 종이로, 그 종이 위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책으로 태어나, 각각의 역할과 의미를 담고 이야기가 되며 시간을 초월한 소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 작가의 연작 <사유의 숲>은 ‘시공간의 재해석’이나 마찬가지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 속엔 무궁무진한 시공간의 퍼즐이 잠들어 있다. 그는 그 퍼즐들이 미처 깨어나기 전에 최초의 카오스(cha- os) 상태로 되돌려놓는다. 찢어 붙이고, 쌓고, 말아서 채집된 우리들의 일상이 담긴 타임캡슐을 완성한다. 그래서일까. 수없이 많은 미세한 낱알 크기의 파편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규칙성을 발견하게 된다. 일련의 이 과정들을 반복하며 ‘정두화만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덕분이다. 읽는 것 이전의 느끼는 책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하게 된다.

소리 없이 대화도 가능하다. 그것은 교감(交感)이다. 서로의 느낌을 주고받으면서 마음을 통하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말의 전령사인 ‘글자―텍스트’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정 작가의 작품은 바로 이 사족(蛇足)을 없애는 과정이다. 그는 스스로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삶의 과정에서 서로의 교감을 통해 상대의 삶을 이해해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전시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 ‘숲(Forest)’은 큰 의미로는 ‘삶’을 대변한다고도 강조한다. 그 ‘삶에 대한 사유의 결과’가 곧 작품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이 모든 삶의 감흥과 여정이 담긴 작품이야말로 ‘무언의 교감에 이른 결정체’인 셈이다.

정 작가의 작품은 무궁한 이야기의 보고인 책(종이)을 질료적 매개체로 의존하면서도 그를 통한 인위적인 형상이나 상징성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책에 대한 일반적인 담론 이전의 ‘자연원성’이나 ‘인간수양’이란 차원까지 사유의 폭을 넓혀 나간다.

그의 작품에서 종이, 책, 나무 등 개별적 정의는 결코 중요치 않다. 서로의 존재감들이 유기적으로 병합된 이후에 새로운 교감의 채널이 열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정 작가의 나뭇결은 사유와 통찰의 숲을 이룬다. 정 작가 작품의 전시 가격은 보통 ‘100×100cm’에 1400만 원, ‘122×122cm’에 2500만 원 정도다.
온갖 사연의 책으로 쌓아 올린 ‘사유의 숲’
김윤섭 소장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간 미술세계 편집팀장, 월간 아트프라이스 편집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교보문고 교보아트스페이스 기획위원, 숙명여대 겸임교수,
계간 조각 편집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추천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3호(2018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