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법학박사]유언자가 형식적으로는 하자 없이 유언을 철회했으나 그 철회가 실제로는 어떤 사실이나 법률에 대한 오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구제하기 위해 법원이 개발한 형평법적 이론이 상대적 철회의 원칙(dependent relative revocation) 또는 조건부 철회의 원칙(conditional revocation doctrine)이다.
잘못 철회된 유언도 구제되나
상대적 철회의 원칙 또는 조건부 철회의 원칙이란, 유언자가 어떤 법률이나 사실에 관한 오인에 기해 유언을 철회했는데 만약 유언자가 제대로 알았었더라면 철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될 경우 그 철회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추정적 의사이론의 일종으로서, 철회가 그 근거가 된 사실과 반대되는 사실의 부존재와 조건적으로 관계돼 있고 이러한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원칙의 이름에 조건적(conditional), 의존적(dependent), 상대적(relative)이라는 용어가 붙은 것이다.

제3차 재산법 리스테이트먼트는 이 원칙을 규정하면서 그것을 효력 없는 철회의 원칙(doctrine of ineffective revocation)이라 부르고 있다. 이 원칙은 유언자가 새로운 유언이 유효하다고 믿고, 이전 유언장을 폐기했는데 새로운 유언이 어떤 이유로 인해 효력이 없게 된 경우에 주로 문제된다.

유언자가 새로운 유언이 효력이 없음을 알았더라면 이전 유언장을 폐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확인될 경우, 법원은 이 원칙을 적용해 철회를 취소하고 폐기된 이전 유언장에 대한 검인을 승인할 수 있다.

예컨대 유언자가 유언장의 어떤 조항 위에 줄을 그어 지우거나 새로운 조항을 적어 넣음으로써 유언장을 수정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경우, 문제가 된 조항이 철회된 것으로 처리하는 것보다는 유언장의 원래 내용을 회복시키는 것이 유언자의 의도에 더욱 근접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법원은 쉽게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무유언상속법’ 적용 여부
이 원칙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한 리딩케이스가 시나이더 대 해링턴(Schneider v. Harrington)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유언자인 레티셔 블리스(Letitia Bliss)는 남편과 자식이 없었고 상속인으로 4명의 여동생들과 22명의 조카들이 있었다. 블리스는 자신이 사망하면 전 재산을 다음과 같이 분배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잘못 철회된 유언도 구제되나
이 유언장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도 들어 있었다. “나는 나의 다른 형제자매들을 의도적으로 상속에서 누락시켰다. 그들은 이미 잘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언장에는 잔여 재산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블리스는 유언장 제3항을 취소하고 제1항과 제2항의 상속분을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증가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이 연필로 제3항 전체에 횡선을 긋고, 제1항과 제2항의 ‘3분의 1’이라는 숫자 부분에도 횡선을 그었다. 그리고 제1항과 제2항에 ‘3분의 1’이라는 글자는 그대로 둔 채 연필로 ‘2분의 1’이라는 숫자를 적어 넣었다.
잘못 철회된 유언도 구제되나
이 유언장에 대한 어떠한 유언보충서도 없었고, 유언장이 추완되거나 다시 작성되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유언검인판사는 줄이 그어진 부분만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한 유언검인을 허용했다. 이에 따르면 시나이더와 슈가만은 3분의 1씩 유증을 받게 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무유언상속법’에 따라 상속되게 된다.

당연히 해링턴은 상소했다. 이에 대해 1947년 매사추세츠주 최고법원(Supreme Judicial Court of Massachusetts)은 유언검인법원의 결정을 파기하고, 유언이 철회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변경 전의 상태 그대로 유언장을 검인하도록 명했다. 그 판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취소(cancellations)와 대체(substitutions)는 하나의 처리 과정의 일부분으로서 서로 불가분적으로 결합돼 있다. 대체가 유효한 경우에 한해서만 취소가 효력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유언자의 의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대체는 법정요건을 갖추지 못해 효력이 없고, 결과적으로 취소의 효과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결론이 타당함을 뒷받침하는 부수적인 근거로서 이 사건 유언장에 잔여 재산에 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언검인법원의 결정대로라면 부분적인 무유언상속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결과는 유언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유언장에 횡선을 그은 것은 철회로서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연필로 2분의 1이라고만 기입하고 새로이 서명을 하지 않은 것은 자필유언보충서로서 요건을 갖추지 못해 효력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유언장 제3항만 철회된 것으로 보아 3분의 1을 ‘무유언상속법’에 따라 상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철회 자체가 효력이 없다고 보아 애초의 유언대로 세 사람에게 각 3분의 1씩 나누어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법원은 후자의 결론이 유언자의 의사에 보다 부합한다고 보아 상대적 철회의 원칙을 적용해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유언자가 해링턴을 미워해서 해링턴에 대한 유증을 철회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법원의 결론이 반드시 유언자의 의사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2호(2018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