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는 1904년생이며 본명은 이원록이다. 그가 ‘이육사’라는 필명을 짓게 된 것은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 사건에 연루돼 수감됐을 때 수인번호 ‘264’번을 받게 되면서부터다. 당시 은행 앞에 배달된 상자가 터지면서 6명이 부상당했는데,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면서 대구지역 청년 다수가 무고하게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 일로 이육사와 이육사의 형 이원기, 그리고 동생 이원일과 이원조까지 체포된다.
육사는 진범 장진홍이 붙잡힌 뒤에도 곧바로 풀려나오지 못한 채 대구 감옥에서 1년 7개월 정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이후에도 16번을 더 감옥에 갇힌다. 한번은 광주학생운동의 열기가 전국에 퍼져 나가자 대구지역 청년들을 경찰들이 다시 압박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당시 대구지역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육사는 대구청년동맹 간부라는 이유로 체포, 구금됐고,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대구지역 격문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돼 검거되며 구금과 체포를 반복하게 된다.
그는 1932년 대구지역을 벗어나 베이징을 오가며 ‘군사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대구지역을 거점으로 기자 활동을 하던 그의 활동 지역이 변경되는 지점이다. 그는 <절정>에서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라고 쓰고 있는데, 그에게 ‘북방’은 민족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장소이자 결국은 내몰려 나온 변방이다. 그곳에서 그는 의열단 창립 멤버인 윤세주와 만나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 돼 교육을 받게 된다.
육사는 졸업 후 국내에서 이 활동을 하며 루쉰 등을 직접 만나기도 하면서 중국 내 여러 인사들과 교류한다. 이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일본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수배’ 중이었고,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붙잡히게 된다. 이 무렵 육사는 필명 ‘육사’라는 한자를 비틀어 ‘肉瀉’나 ‘戮史’로도 쓰게 된다. ‘肉瀉’는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뜻이고, ‘戮史’는 ‘역사를 죽인다’는 표현인데, 앞의 표현은 조롱과 비아냥을 겸한 표현이고, 뒤의 표현은 그의 단호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육사는 최종적으로 ‘陸史’라는 이름을 더 자주 쓰게 된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명단에도 ‘陸史’로 돼 있다.
이육사는 체포와 구금, 수감을 반복하면서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1930년대 중후반에는 문필 활동에 주력한다. 그의 시는 대개 이 시기에 쓰였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청포도>와 <절정> 등도 이때 발표됐다. 특히 시 <절정>에는 그의 고통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그는 이 시에서 당시의 삶을 ‘한 발’ 디딜 곳조차 없다고 말한다. ‘북방’으로까지 몰려 한 발 디딜 곳을 찾아다녔지만, 쉽지 않다고 전한다. 그는 <청포도>에서도 그렇고, <절정>에서도 그렇고 살아가고 싶고 살아갈 만한 ‘삶의 터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대구든 베이징이든 그가 원한 것은 ‘한 발 재겨 디딜 곳’, 다시 말해 자유롭고 평화로운 터전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절망 속에서도 그는 눈을 감은 뒤 상상한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전언이다. ‘겨울은’이라는 말 뒤에 ‘겨울’과 맥락상 어울리지 않는 ‘무지개’라는 말을 연이어 잇대고 있다. 상황의 혹독함을 알기에 쉽게 희망이 올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무지개’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역시 ‘매운 계절’에서 강철처럼 단단하게 얼어 있는 모양새다. ‘무지개’가 분명히 있지만 ‘강철로 된’ 무지개일 정도로 현실이 냉랭해 보인다.
그는 다시 ‘북방’으로 나아가며 한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 절치부심한다. 그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형이 돌아가시고, 큰형의 1년 기일을 맞아 고향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베이징 감옥에 갇히게 된다. 육사는 베이징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해방을 1년 남겨두고 생을 다한 것이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한 편의 시를 남긴다. 바로
<광야>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 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가 죽어 가면서 부르짖은 것은 ‘광야’다. 그는 마지막까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을 것이며,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뜨거운 해방의 기쁨을 기약하는 시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시가 바로 이육사의 <광야>다.
그가 남긴 시가 20여 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그 시편 하나하나가 그의 눈물과 땀으로 일궈낸 ‘광야’로 나아가는 선연한 발자국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20여 편도 적지 않다. 그 발자국으로부터 오늘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광야’를 기약했다. <청포도> 속의 풍경은 오래된 미래와 같이 ‘광야’의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있는 풍경이 단연코 그러하다. 만물의 결실을 이루는 풍요로운 한때, 그런 시간에 마을 내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시간에 대한 꿈, 평화의 시간이다. 육사가 간절히 바랐던 ‘광야’는 만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시간이었고, ‘평화’가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광야’는 ‘분단’을 넘어 자유와 평등이 주저리주저리 열릴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일러스트 전희성 | 참고 문헌 <이육사 評傳>(김학동 지음)·<이육사 평전>(김희곤 지음)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0호(2018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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